비와 답사, 그 불편한 동행심양에서 일곱 시간도 넘게 버스로 달려 도착한 곳이 집안이었다. 고구려 두 번째 수도였던 곳이다. 출발부터 줄기차게 쏟아지던 비가 집안 유적지 답사 내내 따라다녔다. 답사길 비는 반갑잖은 손님이다. 그래도 내칠 방법이 없어 동행했다.
“오회분 5호묘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우산 미리미리 준비하세요.”
“내 우산은 버스 트렁크에 있는데요.”
“내릴 때 꺼내 줄게.”
“큰일 났다.”
“왜?”
“우산을 호텔에 두고 왔어요.”내릴 때가 되니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우산을 챙겨오지 못한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우산을 써도 우산을 쓸 수 없는 아이가 생겼다. 부근 매점에서 비옷을 살 수 없을까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힘들 거라 대답했다. 다행히 동행한 여행사 사장님이 준비해온 비옷이 있었다. 여행 많이 다니는 분이라 준비가 철저했다. 트렁크 짐에서 비옷을 꺼내 우산이 없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우산 쓰고, 비옷 입고 아이들은 화장실을 먼저 찾았다. 장시간 버스로 이동하다보니 화장실 갈 시간을 제대로 주지 못한 탓이다. 버스에서 화장실까지 아이들의 행렬로 긴 줄이 만들어졌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아이들의 긴 행렬을 골고루 적셔주고 있었다.
사신도와 굴식돌방 무덤
투구 모양의 무덤 다섯이 있다고 해서 오회분이다. 그 무덤은 각각 1호, 2호, 3호 등의 이름이 붙었는데, 무덤 내부를 공개하는 무덤은 오호묘이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고구려에 살던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오호묘에 들어가면 고구려 벽화인 사신도를 직접 볼 수 있다고 했다.
“무덤 안에서 사신도를 찍을 수 있나요?”
“사진은 무덤 밖에서만 찍어야 합니다. 안에서는 못 찍습니다.”고구려 고분벽화 사신도는 국사 수업 시간에 등장하는 것이라 사진을 찍어두면 활용 가치가 높을 거 같아 가이드에게 물어본 건데, 예상대로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수밖에….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무섭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쏟아지는 날 무덤에 들어간다는 게 내키는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혼자 들어가는 게 아니라 5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거라 아이들은 순순히 무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어두운 통로가 아래로 이어졌다. 긴 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사신도가 있다는 돌방이 있었다. 굴식돌방무덤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한꺼번에 설명하기 어렵네요. 앞에 있는 사람들 먼저 설명 듣고 나가면 뒷사람들은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가이드는 돌방 내부를 설명해주었다. 관이 놓인 장소부터 시작해서 사신도 벽화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돌방 내부가 워낙 어둡고 아이들이 한꺼번에 많이 들어와 가이드의 설명이 효과적으로 아이들에게 전달되기 어려웠다.
“벽에 그려진 그림은 사신도에요. 무덤에 묻힌 귀족들을 지켜주기 위해 동, 서, 남, 북 네 방향을 그린 그림입니다.”가이드의 손짓에 따라 사방에 그려진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보려고 애썼지만 조명이 어두워 제대로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사신도가 어떤 모습인지 가닥도 잡지 못하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아이들은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먼저 설명을 들은 아이들보다 먼저 무덤을 나왔다. 무덤 입구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사신도가 어떤 그림인지, 어떤 종교의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 구조의 무덤에서 벽화가 발견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사신도에 영향을 주었던 도교가 어떤 종교인지 아이들에게는 막연할 뿐이다. 하지만 쥐띠, 소띠, 호랑이띠 등의 12간지를 곁들여 설명해주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불교나 기독교처럼 일신교가 아닌 다신교로서 도교를 이해하면 사신도의 의미가 훨씬 쉽게 이해된다.
고분 벽화가 주로 굴식돌방무덤에서 발견되는 이유를 아이들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벽화는 벽이 있는 무덤에 그려진 그림이란 걸 알면 답은 간단해진다. 벽이 있는 방 구조를 갖춘 무덤에서 벽화가 발견되는 건 당연한 일일 터. 그래서 굴식돌방무덤에서 벽화가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제대로 느껴보기
버스를 타고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사진보다 훨씬 컸다. 비각 안으로 들어가 본 비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자연석에 사방으로 빼곡하게 새겨놓은 글자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사를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 중 하나가 유물이나 유적지의 크기나 규모다. 크고 웅장한 유물과 유적에서 웅장함과 힘을 느낀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서 고구려의 힘과 기상을 느껴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는 현재 남아 전하는 역사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역사서 중에서 삼국사기 이전에 편찬된 것은 남아 전하는 게 하나도 없다.
광개토대왕비는 삼국사기보다 700여 년 앞서 세워진 것이다. 6.39미터의 거대한 자연석에 주몽에 의해 고구려가 건국된 이후부터 광개토대왕 때까지의 역사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또 하나의 역사서인 셈이다.
광개토대왕비의 참 가치가 여기에 있다. 고구려 역사뿐 아니라 고구려를 둘러싼 각 국가의 움직임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그러다보니 신묘년 기사를 둘러싸고 일본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저렇게 큰 비석에 글자를 어떻게 새겼을까?”“사다리 놓고 올라가 새겼어요.”
“글자 새기다 틀리면 지우개로 지울 수 있었을까?”
“아니요.”“그러니 그 일이 무척 힘들고 어려웠겠지.”“맞아요.”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비각 밖에선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