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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 등나무 씨앗이 퍼져간다
▲ 등나무처럼 어울려 살 수 있다면 탁탁 등나무 씨앗이 퍼져간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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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빈자리
▲ 등나무 아래 벤치 비어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빈자리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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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가 있는 곳은 벤치가 있다. 벤치가 있는 곳은 사람이 있다. 등나무가 가닥가닥 꼬여서 만드는 등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지 않고, 어디론가 길게 핸드폰 통화를 하는 모습을 자주 만난다.

커피자판기가 있고, 또 쓰레기통과 담배 재떨이가 있는 도서관이나 사무실, 그리고 마을의 쉼터 등 등나무 벤치가 있는 곳에 앉아 있으면 왠지 등나무 그늘 아래서는 누군가를 절실히 그리워하게 되는지…. 등나무를 무거운 넝쿨을 올려놓은 평발의 기둥에 '영희야 보고싶다'라던지, '철수와 민정왔다 가다', '생일을 축하한다' 등 다양한 낙서와 볼이 빨개지는 연서들로 가득하다.

벽돌에는 하얀 수정펜의 낙서와 연서들이 가득하다
▲ 평발을 세운 벽돌에는 하얀 수정펜의 낙서와 연서들이 가득하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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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의 씨앗이 탁탁 터지는 소리 들리네요.
▲ 가닥가닥 꼬여서 하나가 되는 ....나무 동무 등나무의 씨앗이 탁탁 터지는 소리 들리네요.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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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서는 누구라도 등나무 아래 쓴 연서의 그대와 사랑하는 당신이 된다. 파아란 초록 빛깔의 등불 같은 등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워지는 시간인지 모른다.

가을의 열매를 총소리처럼 내면서 탁탁 등나무 씨앗이 터지는 소리는 먼 미지를 향해 퍼져가는 소리의 향기 같고…. 그 가닥가닥 꼬인 등나무 가지에 뻗어나온 길 하나는,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의 길, 구름의 길, 바람의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또르르 끝이 말리면서 실은 화살표처럼 하늘로 뻗어가는 잎사귀의 너울거리는 파란 잎맥 속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면, 그곳으로부터 무수히 엇갈리고 꼬이면서도 실타래를 차곡차곡 풀어서 나온, 세상의 환한 희망찬 길 하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한껏 구름의 나들이가 보기 좋은 날
등나무 아래 기대어 서서 보면
가닥가닥 꼬여 넝쿨져 뻗는 것이
참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철없이 주걱주걱 흐르던 눈물도 이제는
잘게 부서져 구슬같은 소리를 내고
슬픔에다 기쁨을 반반씩 버무린 색깔로
연등날 지등의 불빛이 흔들리듯
내 가슴에 기쁨 같은 슬픔 같은 것의 물결이
반반씩 한꺼번에 녹아 흐르기 시작한 것은
평발 밑으로 처져 내린 연꽃송이를 보고 난
그 후부터다.

밑뿌리야 절제 없이 뻗어 있겠지만
아랫도리의 두어 가닥 튼튼한 줄기가 꼬여
큰 둥치를 이루는 것을 보면
그렇다 너와 내가 자꾸 꼬여 가는 그 속에서
좋은 꽃들이 피어 나지 않겠느냐?

또 구름이 내 머리 위 평발을 밟고 가나 보다.
그러면 어느 문갑 속에서 파란 옥빛 구슬
꺼내 드는 은은한 소리가 들린다.


- 송수권 <등꽃 아래서>

가을 벤치의 등나무 아래서
▲ 등을 밝힌 듯 환한 가을 벤치의 등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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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여 있지만 그 끝에는 각자의 길이 하늘에 닿아 있다
▲ 어느새 하나가 되어 꼬여 있지만 그 끝에는 각자의 길이 하늘에 닿아 있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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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불빛, 교사의 불빛, 목수의 불빛 같은 가장 미천한 불빛까지도 양식을 달라고 하였다. 이 살아 있는 별들 중에 닫힌 창문이 얼마나 많았으며 꺼진 별과 잠든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가, 서로 만날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들판 여기저기에 흩어져 타고 있는 이 불들 중의 몇몇하고 통신을 해 봐야 할 것이다."

이 글귀는 야간 비행기를 타고 하늘 속으로 사라져 영영 돌아오지 않는 생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에 씌인 글귀다. 새삼 등나무 아래 서니 그의 말처럼 멀리 떠나 있는 사람과의 다시 만날 궁리를 해봐야겠다. 가까이 있지만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만남의 약속을 해야 할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의 마음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과 같다, 이 흔들리는 마음의 등불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이웃과 사랑과 대화가 필요하다.

이 세상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등나무는 일러준다. 가닥가닥 인연의 실타래를 틀고 있는 등나무는 숱한 나무 중의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풍속의 거울이다.

가닥가닥 꼬여서 풀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등나무 아래 오면, 모든 것은 쉽게 풀리는 실마리 하나를 찾는다. 탁탁 씨앗을 터뜨리는 폭죽소리보다 요란한 소리들이 멀리 멀리 가을 하늘 속으로 퍼져 나간다.


태그:#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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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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