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린성(吉林省)과 랴오닝성(遼寧省)을 잇는 교통의 요충인 통화(通化)에서 남쪽으로 고갯길 몇 개만 넘으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맞닿은 도시, 지안(集安)에 닿습니다. 졸본(현재의 환인(桓仁))에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이었던 국내성이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과 더불어 고구려 유적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지역입니다.
도시 전체가 공사장일 만큼 곳곳에서 굴착기의 굉음이 시끄럽지만,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고구려 관련 유적을 대충 둘러보려 해도 하루 이틀 정도로는 어림없는 '보물 창고'입니다.
잘 닦인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통화와 지안의 경계인 제법 가파른 능선에 올라서면 압록강까지 일망무제의 후련한 풍광이 펼쳐집니다. 그러고 보면 이 능선이 지안이라는 도시의 북쪽을 막아주는 천연 성벽인 셈이어서, 지금이야 교통의 장애물일지언정 옛 고구려의 도읍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고갯마루 너머 압록강과 나란하게 좁고 긴 평원이 이어져 있고, 그곳의 한가운데에 지안 시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거 인접 국가와 교류가 빈번했고 압록강이 중요한 교통로로 쓰였던 시절, 고구려의 도읍지이기에 앞서 중요한 무역항으로서 기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구려의 많은 유적들도 압록강을 따라 늘어서 있고, 그 물길을 따라 현재 지안 주민들의 삶 역시 꾸려지고 있습니다. 아쉬운 게 있다면 강 너머가 북한 땅인 탓에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건널 수 없다는 점입니다. 종이접기하듯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접으면 일치할 만큼 어우러지는 삶과 문화가 있을 텐데, 국경이라는 이유로 단절돼 자연경관마저 많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압록강가 지안을 한 번 가보는 것이 김부식이 지은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썼습니다. 일제강점기 투철한 민족의식과 자긍심이 화두였던 시절, 우리 민족사로서 고구려의 존재를 강조하는 말일 테지만, 남아있는 유적의 '양과 질'을 생각해보건대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지안 주변의 볼거리는 크게 고분 유적과 성터 유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안 시내에 촘촘히 모여 있어서 동선을 어떻게 하든 쉽게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유적이 근 2000년 전의 동시대 것으로서 어느 것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유구한 고구려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지안에 들어서자마자 오회분(五墳)으로 잘 알려진 통구고묘군(通古墓群)을 찾았습니다. 오회분이란 투구를 뒤집어 놓은 듯한 다섯 개의 무덤이 연이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으로, 북한에서는 그냥 '다섯 무덤'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중 일반인들에게는 5호분만 개방한 채 안내원의 인솔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비스듬한 지하 통로를 내려가자 각진 돔 형태의 현실(玄室)이 나타납니다. 사방 벽면에 사신도가 뚜렷하고, 우물천장의 층층마다 신화의 내용을 담은 벽화가 남아 있어 흥미롭습니다.
비록 벽화의 해석을 두고 중국과 우리나라가 서로 어긋나 있어 역사적 접점을 찾기가 쉽진 않지만, 그보다 우선 관심을 두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워낙 훼손이 심각해 벽면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습기로 인해 곳곳에 희끗희끗한 곰팡이가 덕지덕지 끼어 있습니다. 현실 안이 온통 퀴퀴한 냄새가 가득 찰 정도입니다.
산책로와 벤치를 갖추고 공원처럼 꾸며진 오회분을 나와 단출한 무덤 두 기가 어깨동무하듯 나란히 붙어있는 무용총(舞踊塚)과 각저총(角抵塚)을 향합니다. 기실 고구려 고분이 유명한 것은 그 안에 그려진 벽화가 뚜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며, 그 고구려 고분 벽화들 중에도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말을 탄 채 활로 사냥하는 그림인 수렵도(狩獵圖)와 새가 앉아있는 나무 아래 맞붙어 씨름을 하는 그림인 씨름도입니다. 이 벽화들의 주인이 각각 바로 이 두 고분입니다.
이 두 벽화는 미술 교과서나 박물관 등에서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을 뿐 실물은 직접 볼 수 없습니다. 고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굳게 잠겨 있을뿐더러 주변에 2m도 넘는 철로 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고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눈을 부릅뜨고 있어 아예 접근조차 꺼려집니다. 두 고분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모양새입니다.
울타리에 기대자 달려들 기세로 컹컹거리며 짖는 개 한 마리와 함께 허리 구부정한 노인 한 분이 길을 막아섭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그는 수묘인(守墓人)마냥 허름한 집을 짓고 고분 두 기를 베개 삼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덤 안 벽화를 들여다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이 '쌍둥이 고분'의 백미는 또 하나 있었습니다. 고분의 높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에 비해 무덤 규모도 작고 관리도 허술해 '대우'가 초라하지만, 대략 50m의, 산책하듯 두 무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시골 마을의 고샅길 마냥 소담한 듯 정겹습니다. 보도블록이나 콘크리트를 덮지 않은 채 옛 모습 그대로의 질박한 멋이 남아있는 산책로입니다.
무용총과 각저총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고구려 유적의 중심이랄 수 있는 태왕릉(太王陵)과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장군총(將軍塚)이 있습니다. 관광객들에게 애써 지안에 온 이유를 단 한 가지만 꼽으라면 예외 없이 이 세 유적을 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정도로, 이 지역의 중요한 랜드마크입니다.
광개토대왕릉으로 알려진 태왕릉에 가자면 광개토대왕릉비를 거쳐야 하고, 태왕릉 봉분에 올라서면 비와 저 멀리 장군총이 일직선으로 나란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가둬 둔 유리 보호각은 웬만한 빌딩 크기로 멀리서도 볼 수 있고, 이르는 길가에 호위 무사인 듯 투구를 쓴 모양의 '우산 나무'를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놓아 비의 위엄을 한층 높이고 있습니다.
과연 크고 육중해 보였습니다. 마치 광개토대왕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듯한 거구의 비석이 유리벽 안에 갇혀 무척 답답하게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 어떤 역사책보다도 많은 사실이 담겨져 있고, 당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보물'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며 법당이나 교회의 제단 앞에서 느끼는 경건함을 체험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릉이 나란히 선, 공원처럼 넓게 가꿔진 이 유적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정비되었는데, 그전까지는 민가가 빼곡하게 들어차 접근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주변이 모두 평평한 잔디밭이 된 까닭에 태왕릉은 반쯤 허물어진 상태지만 산처럼 높습니다.
태왕릉. 광개토대왕릉으로 정리돼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밝혀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유적입니다. 거대한 봉분에 비해 시신과 껴묻거리를 안치한 현실이 너무 비좁아 관대(棺臺) 두 개를 간신히 놓을 정도입니다.
고구려의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의 위세와 걸맞지 않은 현실도 그렇지만, 비를 등지고 있는 현실 입구의 방향도 무덤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마구 헛갈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극히 적은 상태에서 주변에서 발굴된 기와 조각 따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보니 국가 간, 학자 간 주장이 사뭇 다른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선, 완벽하게 원형이 남은 돌무덤인 장군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간주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름을 '장수왕릉'으로 고치지 못하고 여전히 장군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본디 장군총이란 이름은 청나라 때 발굴될 당시 압록강 유역을 지키는 맹장(猛將)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해 붙여진 것입니다. 높이가 7층인 피라미드 형식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데, 5층에 있는 현실은 태왕릉에 견줘 매우 크고 넓습니다. 만약 그렸다면 수 미터에 이르는 대형 고분벽화도 가능했을 만큼 화강암 벽면이 매끈하며, 언뜻 보면 웅장한 석축과도 같습니다.
장군총을 광개토대왕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첫손에 꼽는 근거가 무덤 뒤편 양쪽에 순장(殉葬)의 자취로 추측되는 배총(陪冢)의 존재와 바로 이 웅장한 현실에 있습니다. 또, 맨 위 7층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둥근 기둥을 꽂아 세웠을 법한 22개의 홈이 일정한 간격으로 파여 있는데, 무덤 전체를 덮을 만큼 큰 지붕을 가진 건물이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실이 있는 5층까지는 사다리가 놓여 있어 무덤에 올라설 수 있는데, 세월의 더께에다 넘쳐나는 관광객의 발길 탓에 아래쪽 기단부의 틈이 많이 벌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서쪽 사면은 짓누르는 무게를 버텨내질 못하고 육중한 둘레돌(護石)조차 밀려날 정도로 기단이 바깥쪽으로 튀어 나오고 있습니다. 훼손이 심각한 상황에서 시급히 보수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관광객이 무덤 위로 올라서는 것부터 막아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주한 시내를 관통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通河)를 거슬러 올라가면 막다른 곳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환도산성(丸都山城, 또는 山城子山城)이 지안과 압록강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시내에 성벽 일부만 간신히 남은 국내성(國內城)터에 비해 비교적 온전한 모습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구려의 성은 대개 산성과 평지성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장수왕 때 이곳으로부터 천도한 평양의 대성산성과 안학궁성도 다르지 않으며, 평상시에는 평지성에서 생활하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산성으로 올라가 방어 태세를 갖추려는 의도입니다. 또, 성벽 곳곳에 방어에 유리하도록 옹성과 치성의 흔적이 남아있고, 돌을 촘촘하게 비스듬히 쌓아올리는 독특한 축성법 또한 고구려 성의 특징입니다.
통구하가 해자 역할을 하고 사방의 거친 산세가 절묘하게 조합된 지세를 통해 고구려인의 탁월한 지리 감각을 볼 수 있습니다. 돌무지를 둥그렇게 쌓아올린 망루에서 유일하게 트인 통구하 쪽을 내려다보면 저 멀리 지안 시내와 압록강 너머 북한 땅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명당(明堂) 중의 명당인 환도산성에서 망루는 혈(穴)에 해당하는 자리인 셈입니다.
가파른 산세 탓에 성 안이 좁아 보이지만, 왕의 행궁터와 군사들이 머물렀던 병영터, 연못과 경작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산성의 옛 모습을 쉽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시대를 넘어 이곳의 역사와 늘 함께 했을 아름드리나무들과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흐르는 통구하의 맑은 물 역시 산성의 빼놓을 수 없는 '조연'입니다.
산성을 빠져나오니 통구하가 쌓아놓은 제법 넓은 퇴적 평원 위에 무덤떼가 조성돼 있습니다. 아담하고 소박한 생김새로 보아, 이곳이 도읍이었던 시절 고구려 귀족들의 공동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형태도, 크기도 각양각색이고, 돌을 쌓은 것부터 흙을 다져 놓은 것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연을 담은 무덤들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무수합니다.
시기상 산성이 먼저인지, 이 무덤떼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덤의 중요한 터잡기 기준인 음택풍수(陰宅風水)와 삶과 직결된 산성 축성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조건인 양택풍수(陽宅風水)가 이렇듯 통구하 들판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오후, 지안에서의 고구려 여행을 마치며 끝인사를 할 요량으로 다시 압록강가에 섰습니다. 압록강 중하류쯤 되는 곳이라 그런지 폭도 넓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와 제법 강답습니다. 지안을 떠나 랴오닝성(遼寧省)의 수도인 셴양(瀋陽)에 닿은 후 이내 항공편으로 귀국하게 되니, 이곳 압록강이 이번 여정의 끝인 셈입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 그 기상이 서린 탯자리에 기대어 서서,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넘나들며 연해주로부터 시작해 동북3성에 이르는 '대장정'을 갈무리하게 되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깨달은 체험이 사라지거나 묻히지 않고 삶 속에서 배어날 수 있도록 꼼꼼히 정리해두어야 하겠습니다.
이번 여정을 돌이켜 보니 대충 1만km 정도를 헤쳐 왔습니다. 제게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차도록 놀라운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2일부터 8월 5일까지 (사)동북아평화연대가 주관하는 연해주-동북3성 답사에 참가한 후 정리한 기록입니다. 이 열네 번째 답사기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열네 편의 답사기를 통해 저와 함께 여행을 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