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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 배우고 외워보았을 시가 하나 있다. 바로 시인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이다. 굳이 외우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래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의 몇 구절 정도는 맴돌고 있을 것이다.

시인 신동엽은 현재의 학생들에겐 단순한 시인으로만 기억될지 모른다. 아니, 신동엽이라고 하면 시인이 아닌 개그맨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다수인 시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동엽은 한국 시문학의 60년대를 대표하는 한 시인이다.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며, 어릴 적부터 민중의 삶을 인식하였고, 그 울분을 시에 써놓은 사람이다.

그의 민중적 저항의식을 담은 시를 읽을 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거나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게 되곤 하는데, 짧고 굵은 삶을 살아간 신동엽은 그처럼 강렬한 사나이였을지도 모른다.

신동엽을 아시나요? 개그맨 말고 시인 신동엽

신동엽생가 입구. 이곳을 찾은지 꼭 1년하고 20일이 지났다. 이곳에는 늘 차가 한대 주차되어 있다.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유적의 조망이 힘들게 한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신동엽생가 입구.이곳을 찾은지 꼭 1년하고 20일이 지났다. 이곳에는 늘 차가 한대 주차되어 있다.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한다면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유적의 조망이 힘들게 한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 송영대
시인 신동엽은 충남 부여 출신이다. 1930년 8월 18일에 태어난 그는 역사의 흐름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으면서 살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에 수탈되는 농민들의 피폐한 삶, 그리고 그러한 민중의 눈물을 보고 살았다. 또 6·25전쟁을 겪으면서 같은 핏줄끼리 싸워야 하는 저주스런 역사에 울분을 토했다.

또한, 세상을 바꾸겠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을 보면서 역사의 역행을 직접 맛보았다.

시인 신동엽은 바로 이러한 삶에 의하여, 그의 시문학 성격 또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신동엽의 출생지인 부여는 백제의 왕도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시인 신동엽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그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남겨 놓았다. 부여 읍내에 신동엽생가가 남아 있으며, 금강변에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능산리 고분군 앞에는 신동엽의 묘소가 있으니, 결국 신동엽은 고향에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난 이 대표적인 민족시인인 신동엽 생가에 3번 가량 가봤다. 첫 번째는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이 부여의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 이 신동엽 생가에 와서 그분의 시를 외우고, 힌트를 얻기 위해 닭싸움까지 했다. 두 번째는 부여의 여러 유적을 돌아다닌 후 어느 날,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그 분이나 한 번 뵙자는 생각에 간 기억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번에 간 것으로서, 금강 하류인 군산에 갈 일이 생겼는데, 문득 차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다. 그냥 PC방에서 시간 보내기도 별로라는 생각에 고민을 하다가, 내가 가는 곳이 금강 하류라는 점을 상기하였다. 부여나 군산이나 같은 금강을 끼고 있으며, 이 금강에 대하여 서사시를 읊은 이가 바로 신동엽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생각에 다시 한번 신동엽 생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신동엽은 좋지만, 신동엽 생가는 싫은 까닭

신동엽생가. 파란색 페인트를 발라 쌓아 올린 기와와 아래의 백제시대 전돌을 본따서 만든 길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지붕 아래에 있는 슬래트와 파이프는 시쳇말로 좀 깬다.
신동엽생가.파란색 페인트를 발라 쌓아 올린 기와와 아래의 백제시대 전돌을 본따서 만든 길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지붕 아래에 있는 슬래트와 파이프는 시쳇말로 좀 깬다. ⓒ 송영대
부여에는 로터리가 2개 있다. 하나는 성왕의 동상이 가운데에 있는 로터리이며, 또 다른 하나는 부여군청 앞에 있는 계백장군상이 있는 로터리다.

신동엽 생가는 바로 이 사이에 있으며, 계백장군상 가까이 한 골목길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갔을 땐 신동엽생가로 가는 팻말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 2번의 방문에는 팻말을 보고 곧장 들어갔는데, 이번엔 결국 예전의 감각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왠지 느낌이 오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도 안 보인다 싶어서 다시 밖으로 나오려고 생각한 순간 파란 기와지붕이 눈에 띠었다. 곧장 그 곳으로 가니 역시 신동엽생가가 맞았다.

사실 신동엽이라는 시인은 민족시인으로서 존경하고, 또 그의 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의 생가는 좋아하지 않는다.

신동엽 생가는 이미 신동엽의 생가가 아니다. 애초에 이 곳을 보존하겠다고 개축하면서 그 정취는 사라졌다. 이미 작고한 신동엽 시인이 고향에 다시 돌아와 그의 집을 찾으려고 한다면, 과연 그게 가능할까란 의문이 든다. 이미 많은 인위적인 변경으로 시인의 느낌은 사라졌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페인트를 칠해놓은 것인지, 아니면 페인트에 담가서 올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란 기와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다. 진짜로 신동엽 시인이 파란 기와를 올린 지붕 아래에서 살았을까라는 생각에는 갸우뚱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슬레이트와 파이프로 대충 만들어 놓은 지붕물받이는 유적의 보존이 아닌 원형의 훼손으로 비친다. 한옥은 비가 올 때 낙수면으로 떨어지는 그러한 맛이 감흥을 살려주는데, 이런 건물에선 그런 감흥은 찾기조차도 힘들다.

이곳은 더 이상 '신동엽 생가'가 아닌 '신동엽 폐가'일 뿐이다

신동엽 생가인지 폐가인지... 찢어진 창호지가 답사객의 가슴마저도 찢어 놓는다. 이곳은 부여군청에서 가장 가까운 유적지이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이곳의 모든 방문은 자물쇠로 걸어 잠겨있어, 건물은 힘겨워하며 썩어가고 있다.
신동엽 생가인지 폐가인지...찢어진 창호지가 답사객의 가슴마저도 찢어 놓는다. 이곳은 부여군청에서 가장 가까운 유적지이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이곳의 모든 방문은 자물쇠로 걸어 잠겨있어, 건물은 힘겨워하며 썩어가고 있다. ⓒ 송영대
어색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신동엽 생가의 마당에 블록을 깔아놓아 걸어다닐 수 있게 해놓았는데, 백제의 전돌에 새겨진 문양을 이용하였다.

언뜻 생각하면 좋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균형이 맞지 않는다.

잔디를 깐 것이야 그나마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굳이 이렇게 전돌을 깔아놓아 돈 냄새를 풍길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이렇게 전돌을 깔아놓느니 유적의 관리에 신경을 쓰는 게 어떨까?

이 곳은 더 이상 시인 신동엽 생가가 아니다. 시인 신동엽이 있었던 '폐가'일 뿐이다. 이곳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건물은 보존의 차원에서 아무도 살지 않으면 잘 남을 거라 생각할진 몰라도,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은 숨을 쉬지 않고 썩어갈 뿐이다. 그리고 이곳이 특별히 신동엽 생가라고 하지 않는다면 어디까지나 농촌을 피해 도시로 간 이름 모를 이웃이 살던 집 정도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모든 문은 잠겨있다. 오직 입구만 열려 있을 뿐이다. 곳간과 뒷간, 그리고 안방과 주방의 문은 묵직한 자물쇠로 무겁게 잠겨 있으며 때로는 이중으로 닫혀 있는데도 있다. 애초에 생명기는 싹 빼놓고 조용히 박제시킨 것 같은 느낌을 들어 이를 보는 이마다 괜히 쓴맛만 느껴지게 한다.

게다가 방문의 창호지마다 찢겨있어서 오히려 괴기스러운 풍경을 연출시킨다. 문화재를 보존한다면서 방치를 시켜두는 사례라 하겠으니, 이를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곳곳에 치어진 거미줄이나 뜯겨나간 벽면 등의 모습은 이미 그 정취가 사라졌다고 하겠다.

이곳이 이렇게 된 것은 관리의 소홀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부여군청에서 가장 가까운 문화유적이 바로 이 신동엽생가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이는 어디까지나 무관심에서 일어난 일이라 하겠다.

찢긴 창호지, 입구 옆 쓰레기... 괴기스럽다

생가 옆 쓰레기봉투. 먹은지 얼마되어 보이지 않는 음식물쓰레기가 미관을 어지럽히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곳곳에 쓰레기가 보이는데, 애초에 이곳 주민들마저 이 유적에 대한 관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생가 옆 쓰레기봉투.먹은지 얼마되어 보이지 않는 음식물쓰레기가 미관을 어지럽히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곳곳에 쓰레기가 보이는데, 애초에 이곳 주민들마저 이 유적에 대한 관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 송영대
그런다고 해서 주위의 주민들이 이 신동엽 생가에 정을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입구 바로 옆에는 쓰레기봉투에 쓰레기가 가득 담겨 있으며, 그 옆에는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자장면과 깍두기가 이를 뭐라고 하겠는가?

이 곳을 첫 번째 찾았을 때엔 그나마 '이곳이 신동엽 시인의 집이구나'란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친필원고를 나무에 옮겨놓은 것.

그러나 두 번째에 찾았을 때엔 그게 마루에 나뒹굴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찾았을 때는 그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단지 예전에 걸렸던 곳의 벽면이 뜯겨져 있을 뿐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신동엽 생가에는 신동엽의 정취가 느껴지는 그 무엇도 없는 것이다. 그나마 있다고 한다면, 신동엽 시인의 부인이자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인 인병선씨가 쓴 '生家'라는 시 하나뿐이다.

生家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러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다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 글 인병선 / 글씨 신영복

덧붙이는 글 | 2007년 9월 29일 신동엽 생가를 가고 그 관리 실태를 본 후에 쓴 글입니다.



#신동엽생가#신동엽#껍데기는 가라#금강#안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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