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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짧고 가을비가 잦았는지라 요즘 밭에 자주 나가지 못했다. 가을걷이가 밀렸다. 오늘은 뭐부터 할까? 마음이 급하다. 약속도 뒤로 미루고, 퇴근을 서둘렀다. 부지런히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하니 해가 서산에 걸렸다.

 

우리 마당 앞에서 이웃 할머니가 밭일을 하시다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한다. 할머니의 살가운 미소가 정겹다.

 

"선생님, 지금 퇴근하는 모양이네.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어!"
"먼 데 학교로 옮기고 밭일 할 시간이 없네요. 또 비까지 자주 오니…."

 

비 이야기에 할머니가 한숨을 내쉰다. 쓰러진 벼가 싹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란다. 논바닥 물이 빨리 빠져야 수확을 할 텐데, 다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한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오며 밭을 둘러보신다. 할머니는 초보 농사꾼인 나에게 늘 선생님이시다. 오늘 무슨 훈수를 하시려나?

 

"들깨 벨 때가 되었는데 뭐하고 있어! 잎이 누레지고, 씨 맺힌 곳이 갈색이잖아. 지금 베면 똑 참이야. 후딱 베라고."

 

할머니 채근이 여간 아니다. 농사는 애써 가꾼 것을 허실 없이 거둬야한다는 것이다. 한 이틀 넘기면 씨알이 터져 바닥에 떨어지는 게 많아 안 되겠다고 한다.

 

들깨는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닌가?

 

우리는 들깨를 여러 해 심지만 어느 때 베야 알맞을까 늘 주춤주춤한다. 일찍 베면 덜 여문 씨를 거두고, 시기를 늦췄다가는 땅에 떨어뜨리는 게 많다. 할머니가 바로 할 일을 찾아준 셈이다.

 

낫을 찾아들고 들깨를 베는 나를 보고 할머니가 묻는다.

 

"깻잎 장아찌는 담갔나?"
"애 엄마가 푸른 것으로 많이 담갔어요."
"푸른 것보단 노릇노릇한 것을 담가야 제 맛이야."
"그런가요? 진즉 가르쳐주시지?"

 

할머니는 누런 깻잎으로 장아찌를 담그면 더 부드럽고 씹히는 맛이 더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의 경험에서 나온 맛이리라. 이듬해는 들깨를 베기 전에 미리 좋은 잎을 골라 담가보라고 권한다.

 

나는 부지런히 깻대를 베기 시작했다. 금방 해가 떨어질 것 같다. 이럴 때 아내가 도와주면 오죽 좋으련만! 서울로 출장 간 아내는 함흥차사이다.

 

두 이랑을 베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땅에 떨어지는 씨알이 별로 없어 다행이다.  딱 알맞은 시기인 듯싶다. 농사도 다 때가 있는 법, 씨 뿌리는 데도 적기가 있고, 때맞춰 거둬야 실한 열매를 거둔다는 말이 틀림없다.

 

알고 보면 들깨처럼 사람 몸에 좋은 작물도 없을 것이다. 씨알은 씨알대로, 깻잎은 깻잎대로 아주 요긴한 먹을거리다.

 

깻잎은 상추와 함께 쌈의 대명사이다. 고기의 누린내와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줘 사람들이 즐겨먹는다. 나물 반찬이나 장아찌, 깻잎김치 등 밑반찬으로도 많이 이용하고, 매운탕을 끓일 때 향신료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들깨로 짠 기름은 고소한 맛이 참기름 못지않다. 또 들깨를 갈아 탕국에 넣거나 나물을 무칠 때 넣어먹으면 특유의 냄새가 음식 맛을 더해준다.

 

또 영양은 어떠한가? '동의보감'에 들깨는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으며 기운을 돋워준다고 했다. 특히 들깨 속에 포한된 리놀렌산은 피부 미용뿐만 아니라 동맥경화 등 성인병 예방에 아주 효과적이라고 알려졌다.

 

생각지도 않은 들깨 수확

 

6시 반이 넘어서자 벌써 해는 떨어졌다. 주위가 벌써 어둑어둑하다. 마당에 가로등을 켰다.

 

뒷집 할아버지가 우리 집 앞을 지나다 일하는 내 모습을 본 모양이다.

 

"아니! 해 떨어져도 일을 하나? 뭘 그리 열심히 해!"
"들깨 베요. 하던 일이라 끝을 내려는 데 날이 어두워지네요."
"하여튼 대단해! 그래, 들깨 많이 거두겠어?"
"털어봐야 알겠지만 꽤 나오겠어요."

 

씨가 잘 여물었다는 소리에 할아버지도 자기 일처럼 좋아한다. 아마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은 다 같은 모양이다.

 

7월 초순, 우리는 감자를 수확한 자리에 간단히 밭을 정리하여 들깨 모를 옮겼다. 모가 좋지 못해 자라는 게 시원찮았다. 할아버지는 모 자라는 꼴을 보고는 혀를 찼다. 아예 뽑아버리고 서리태를 심으라고 권했다.

 

나도 비실비실 자라는 모습이 싫어 뽑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던 것이 모를 낸 지 여러 날 지나고부터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자연은 가만 둬도 자란다는 말이 맞는 듯싶었다. 거름도 주지 않고, 농약도 치지 않았는데 제 모습을 갖춘 것이 너무도 대견했다. 진득하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이런 무공해가 어디 있느냐며 들깻잎을 아주 소중히 여기며 수도 없이 따먹었다. 그리고 집에 다니러 온 분들께도 후한 인심을 썼다.

 

그러니까 지금 거두는 들깨는 어찌 보면 덤을 얻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깻잎을 따먹은 것만으로도 본전을 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들깨를 털어 들기름을 짜고, 들깨가루를 내어 걸쭉하게 토장국과 나물에 넣어먹을 셈이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이런 경우가 아닌가?

 

고소한 냄새가 우리 식탁에!

 

마당에 깔개를 펴고 벤 들깨 더미를 쌓았다. 일을 다 마치자 기분이 너무 좋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 며칠 해에 말리고 밑동을 묶어 털면 톡톡 알갱이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멀리서 차량 불빛이 우리 앞마당을 비춘다. 아내 차가 들어오는 모양이다.

 

"여보, 오늘 깨 베었네. 혼자 하느라 힘들었지? 터는 것은 내가 할게! 내 들깨 터는 실력 알죠?"

 

아내가 일을 거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호들갑이다. 들깨 터는 것은 자기가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란다.

 

이제 고슬고슬 말려서 들깨 터는 일만 남았다. 들깨 터는 일은 만만찮다. 넓게 깔개를 펴고 들깨 더미를 한 아름씩 나뭇가지로 토닥거려 턴다. 그러면 꽃이 핀 자리의 주머니 속에서 작은 알갱이가 튀어나온다.

 

털려나온 씨앗에는 많은 검불이 섞여있다. 검불을 가려내는 일은 터는 일보다 쉽지 않다. 이 때 어레미와 키가 필요하다. 예전 장모님께서 하던 일을 눈 여겨 보았는지 아내는 키질을 썩 잘한다. 구멍이 큰 어레미로 체질을 하면 알갱이는 밑으로 쏟아지고 검불만 남는다. 그런 다음 키질을 하여 까불리면 고운 들깨 알갱이만 남게 된다. 아내가 할일에 기대를 걸어본다.

 

아내가 늦은 저녁을 지으며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앞으로 우리 식탁엔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풀풀 나겠지! 당신은 시래기 토장국에 들깨 갈아 넣으면 아주 좋죠!"


태그:#들깨, #들깨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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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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