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 많은 불갑사를 1시간30분만에 답사하고 불갑면 쌍운리에 있는 내산서원으로 향했다. 차로 한 10여분 가니 서원의 주차장이 나온다. 차를 내리니 바로 앞에 수운(睡隱) 강항(姜沆: 1567-1618) 동상이 보인다.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는 모습이 천생 꼬장꼬장한 선비다.
수은 선생은 왼손에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조금 높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저 높은 곳이 어디일까? 이상세계일까 아니면 자신이 3년 동안 포로로 잡혀갔던 일본 땅일까? 한민족의 역사에서 전쟁포로로 중국이나 일본 땅으로 끌려간 사람이 수도 없이 많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적지를 벗어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수은 강항 선생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강항은 1567년(명종 22년) 전라도 영광군 불갑면 유봉리(酉峰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어찌나 영리하던지 한번 본 것은 잊지를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책장수가 이 지방을 지나가는데 한 소년이 책을 한번 보고 싶어 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책장수가 어린 수은에게 책을 잠깐 보여주었다고 한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넘기고 난 수은은 다시 책을 책장수에게 돌려주더라는 것이다. 책장수가 수은에게 책을 사겠느냐고 묻었고 이에 수은은 사지 않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책장수가 안 사는 이유를 다시 묻자, 책 내용을 벌써 다 외워서 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수은 강항선생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니 서인 계열의 학자이다. 1588년에 진사가 되고 그 해 결혼을 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워 왜군에 대항할 것을 촉구했다. 선생은 이듬해인 1593년 전주에서 시행된 정시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교서관 박사(校書館 博士),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을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다. 그는 경서와 사기에 능했으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1597년 여름에는 남원에서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왜군과 대치하였으나 남원이 함락되었고 이에 고향인 영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치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무안을 떠나 오사카에 도착한 수은 선생은 사도(佐渡)를 따라 시코쿠 이요주(伊豫州)의 오즈(大洲)에서 살게 된다. 이곳에서 선생은 왜인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쳐 일본에서 유교가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오즈시에서는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를 세워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600년 봄이 되자 수은 선생은 사도에게 귀국 요청을 하였고, 그가 가르쳤던 경안(慶安)의 도움을 받아 그해 5월 부산포에 도착하게 된다. 선생은 왜국에서 보낸 3년 동안 보고 들은 바를 정리한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을 조정에 올리고 잠깐 동안 벼슬에 복귀했다. 그러나 전후 정치의 주도권이 동인에게 있어 이후 선생은 향리인 영광으로 낙향 후학들을 가르치며 평생을 보내다 1618년 세상을 떠났다.
수은 강항의 글은 1658년 그의 문인인 윤순거(尹舜擧)가 금구현령으로 있을 때 <수은집>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 초간본 수은집은 4권의 원집과 간양록(看羊錄), 부록, 별집의 4책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간양록이 가장 유명한데, 왜국에 포로로 끌려갈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내산서원은 1635년(인조 13년) 수운 선생을 모시는 용계사(龍溪祠)라는 사당 형태로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서원으로 확장되었다. 1702년(숙종 28년)에 사원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원군 때인 1868년 훼철되었다. 1974년 다시 서원을 복원하면서 향사가 시작되었고, 1993년 문화재 정비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 서원에는 수은 강항과 그의 제자인 윤순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윤순거는 소론의 거두인 명재 윤증(尹拯)의 큰 아버지(仲父)이다.
간양록(看羊錄) |
간양록은 저자의 충절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저술로 당시에도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저자는 포로가 된 죄인의 글이라는 의미에서 ‘건차록’이라고 제명하였으나 문인인 윤순거가 한 나라 소무의 충절에 비의된다는 뜻으로 권필의 시구에서 따와 ‘간양록’이라고 개명하였다.
전체적인 구성은 〈적중봉소〉〈적중문견록〉〈고부인격〉〈예승정원계사〉〈섭란사적〉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중봉소〉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부분은 포로가 된 상황부터 절의를 버리지 않고 왜정을 정탐해 올리는 자신의 심정을 적은 서론과 같은 글로 1599년에 쓴 것이다. 이후 왜국팔도부터 풍신수길의 죽음을 적은 22판 전까지는 이예주에서 1598년에 기록하여 김석복에게 조정에 올리도록 부탁한 글이다. 마지막으로 22판~27판까지는 왜국의 정세와 우리나라의 정책을 비교 분석하면서 저자가 생각한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이 봉소는 1599년 모두 두 벌을 등사하여 중국 차관 왕건공과 조선인 신정남에게 각각 올리도록 하였는데 왕건공의 주본이 선조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적중문견록〉은 왜국백관도, 왜국팔도육십육주도 및 임진정유년에 침입했던 왜장의 수효 등 상세한 정황을 적어 1600년 귀국하던 해에 올린 것이다. 〈예승정원계사〉도 1600년 8월 소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올린 글이며, 〈섭란사적〉은 1597년 포로가 되던 때부터 1600년 부산으로 돌아오기까지 저자가 겪은 고초와 참담한 심정을 일기체로 시와 함께 서술한 글이다. 권말에는 〈왜국지도〉와 윤순거, 유계가 지은 발이 있다.(민족문화추진회 김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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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내산서원에 모셔져 있는 수은 강항 선생의 삶을 정리했다. 그는 <간양록>을 통해 선비의 충성과 올곧은 지조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