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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포괄적이고도 구체적인 합의가 나오면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할 때, 이번 정상회담의 성과 이면에는 북미관계와 6자회담의 진전이라는 국제정세의 호전이 크게 작용했다. 정상회담이 남북관계 발전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라고 하기에는 지난 4년여 동안의 남북관계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올해부터 시작된 극적인 반전을 더욱 공고히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특히 북미관계가 급진전되면서 '남북관계가 뒤처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불식시키고, 남북관계와 6자회담의 선순환적 구도를 정착시키게 되었다.

 

기실 정상회담 전만 해도 "만남 자체가 의의"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뤘다. 이러한 전망의 핵심적인 근거로는, 이미 미국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정상회담을 통해 남한으로부터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4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정상회담 회의론'에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하면서도 비관적인 전망을 뛰어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적 선택과 이를 잘 포착한 노무현 대통령의 대응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된 정세가 만들어내고 있는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는 인식이 서로 통했던 것이다.

 

북한의 핵포기는 연목구어?

 

김 위원장의 전략과 관련해,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시설의 폐쇄 및 봉인, 그리고 불능화 등을 통해 얻을 것은 얻으면서, 핵무기나 핵물질은 폐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선군정치를 표방해온 북한이 그 표상이자 군사적 억제력의 핵심으로 삼아온 핵무기를 폐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의 핵포기 여부는 결국 득실관계 판단에 달려 있다. 쉽게 말해 김 위원장이 핵포기에 대한 반대급부가 핵보유보다 더 크고 이러한 기대이익이 달성가능하다고 판단한다면, 핵포기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핵포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로 선군정치를 내세운다. 그러나 선군정치는 북한의 위기가 첨예해졌던 1990년대 중·후반에 나온 것인데, 이 시기에 북한은 핵포기를 약속한 제네바 합의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북한이 핵개발에 다시 나선 시점은 미국의 대북강경책이 본격화되고 확실한 근거도 없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개발 의혹을 제기한 2002년 10월 이후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볼 때, 선군정치가 나온 지 수년이 지난 시점이다. 북한이 선군정치를 표방하기 이전에 핵개발을 중단했고 선군정치를 공고히 하면서도 핵개발 중단 상태를 유지했으며 핵개발의 재개는 미국의 대북강경책과 깊은 연관이 있다면, 선군정치와 핵보유가 불가분의 관계는 아니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는 '북한이 선군정치 때문에 핵무기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오히려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극적인 변화를 '선군정치의 덕'으로 돌리면서 핵포기의 근거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2차 남북정상회담 직후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김정일과 부시가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며, 미국이 대북정책을 전환한 데에는 북한의 핵실험이라는 "외교적 공세" 덕분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약해진 부시 행정부와 강해진 민주당의 조합

 

그렇다면 북한이 완전 핵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리게 하는 데 핵심적인 반대급부는 무엇일까? 최근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대체, 테러지원국 및 경제제재 해제,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 등은 이미 많이 거론돼온 것들이다. 이에 덧붙여 "적절한 시점에 논의"하기로 한 경수로 제공과 한미 양국의 군사적 상응조치들도-한미합동군사훈련의 축소 내지 폐지, 미국의 핵우산 철수, 한반도 군축 등-북한이 원하는 반대급부에 속한다.

 

6자회담을 비롯한 다양한 협상 테이블에서 이러한 반대급부의 제공 여부 및 그 수준이 논의되겠지만, 김정일이 이들 가운데 상당 부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 핵포기라는 전략적 결단도 충분히 가능하다.

 

김정일의 전략적 계산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핵포기로 얻고자 하는 기대이익의 '실현가능성'이다. 이와 관련해 김 위원장은 '약해지고 보수적이지만 대북정책을 전환한 부시 행정부'와 '강해지고 온건하지만 변화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크게 반대하지 않는 민주당'의 조합이 절호의 기회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자신은 "이미 결심했다"며 북한에게 전략적 결단을 촉구하고 신뢰구축과 단계적인 핵포기 조치에 대한 상응조치를 취해나가자, 김 위원장은 이러한 인식을 더욱 굳힌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 김정일', 무엇을 남길 것인가

 

김정일 위원장은 이미 자신의 업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핵무기를 가졌지만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북한을 남길 것인지, 아니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에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고,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시켜 북미관계 정상화를 이루며, 경제회생의 발판을 마련한 북한을 남길 것인지 말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후자가 김정일을 포함한 북한에게 훨씬 이득이고, 북한도 이를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이를 마다한 쪽은 미국이었고, 올해 들어 그러한 미국이 바뀌면서 북한도 핵포기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 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수용하고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에 합의한 것은, 남한 대선 개입과 같은 '정략적 의도'보다는 자신이 그려온 로드맵을 공고히 하는데 디딤돌을 놓고자 했던 '전략적 판단'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대선 개입이 우선적 목표였다면, 대선을 앞두고 남측에 보혁 구도를 부각시킬 수 있는 한단계 높은 통일 방안이나 서해 해상분계선 설정과 같은 '민감한 이슈'를 강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7 남북 정상선언'에 이러한 내용도 없고, 정상회담 때 이들 문제를 놓고 남측과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김 위원장은 우회적이지만 비핵화 의지를 밝혔고, 종전선언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등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이는 결국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관계 정상화로 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디딤돌이었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태그:#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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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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