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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남다른 곳을 돌아다녀야만 여행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제가 돌아다니는 일도 ‘여행’이라면 여행 아니겠느냐고, 자전거를 타고다니든, 두 다리로 걸어다니든, 이렇게 세상을 부대끼고 사람과 복닥이는 이야기도, ‘여행 이야기’가 되겠구나 싶어서, 이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끄적거리면서, “걷는 여행” 이야기를 펼쳐 보려고 합니다.
 
 


- 부민동 박병철(부산에서 연극과 마임을 하는 분) 형네에서 맞이하는 아침. 어제밤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정신을 잃은 듯. 그래도 다친 곳 없이 잘 드러누워 있었네. 나 때문에 옆지기며 다른 사람들이며 애먹지 않았을까.

 

- 코가 막힌다 싶어 창문을 열다. 산자락 높은 곳에 지어진 빌라 맨 위층에 있는 이 집.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다른 집들 지붕을 죽 본다. 바로 앞에 있는 집 옥상 한 귀퉁이에 텃밭이 보인다. 두 평쯤 될까. 흙을 날라 와서 마련했구나 싶다. 푸성귀가 잘 크고 있다.

 

- 머리를 감고 몸도 씻은 뒤 아침 먹으러 나갈 즈음. 옆지기한테 전화 한 통. 대구 수성경찰서 사이버범죄수사팀 온 연락. 어느 일간신문 기자가 나를 고소했단다. 뜬금없이 웬 대구 수성경찰서 연락이냐고, 누가 고소했냐고 하니, ㅊ 아무개라는 이름을 대 준다.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고소를 하나. 요사이 나를 해코지하고 있는 그 일간신문 장난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 옆지기 손전화 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그 일간신문 사람들한테도, 다른 어디에도 알린 적이 없는데?

 

- ‘작은우물’을 뜻하는 ‘小井’이라는 국밥집에서 설렁탕을 먹다. 함께 아침을 먹는 이상범 아저씨(60)가 “굳이 성깔부리며 주름살 늘려 무엇하겠습니까. 우리가 살다가 떠나는 날 무엇을 들고 가겠습니까” 하고 이야기를 한다. 예순 해 살아오며 궂은 일 좋은 일 많이 겪었다는데, 돌이켜보면 당신이 죽는 날, 돈을 가져갈 수 있지도 않고, 책이고 음반이고 움켜쥐며 갈 수도 없는데, 그런 데에 미련을 두지 말고, 좋은 사람을 만나며 좋은 생각을 나누고, 좋은 생각을 나누며 당신이 가장 아끼며 사랑할 만한 일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깨달았다고 말한다.

 

- 밥을 먹고, 이상범 아저씨가 꾸리고 있는 노래찻집 ‘무우수하(無憂樹下)’로 가다. 산딸기 우린 물을 마시고 녹차 한 잔 마시다. “부산에 문화공간이 참 없십니더. 크지도 않고 쪼매난 곳이지만, 이 쪼매난 곳에서 몇 사람이라도 쉬면서 옛노래도 듣고 차도 마실 수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상범 아저씨가 갖고 있는 옛 음반은 숫자로는 많지 않다. 하지만 상범 아저씨는 음반 하나하나에 어떤 이야기와 당신 추억이 묻어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노래 하나마다 이야기가 있고, 노랫말 한 대목마다 삶이 배어 있다.

 

 

- 동사무소에 가면 팩스를 보내 준다고 한다. 대구 수성경찰서로 ‘사건이송요청서’를 팩스로 보내야 한다. ㅂ동사무소에 가다. 민원을 맡은 직원이 혼자만 바쁘다. 다른 직원은 왜 안 도와줄까.

 

 팩스를 보내야 한다고 종이를 건넨다. 동사무소 직원은 민원서류는 팩스로 보낼 수 없고, 서식서류만 보낸다고 한다. 왜? 거저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팩스 보내는 값을 책상에 적어 놓고 있으면서? 우체국에 가서 보내라고 한다. 우체국? 우체국은 또 어디에 있나? 뒤쪽에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남자 직원 여럿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돌아나온다.

 

- 우체국을 찾아야 하나 어쩌나 생각하다가 대서소가 보여서 팩스 넣기를 부탁한다. 1500원. 우체국에 가서 등기우편을 보내는 값하고 거의 똑같다. 팩스 한 통에 1500원이라.

 

- 잠깐 피시방에 들르기로. 피시방 이름은 ‘PC마루’. ‘PC’라고 적는 한편 토박이말 ‘마루’를 적네. ‘피시’는 어쩔 수 없을 테지만, 뒤에 ‘마루’를 붙인 대목이 눈에 뜨인다. 인터넷신문에 글 셋 띄우고, 나한테 온 편지를 살펴본 다음 밖으로 나오다.

 

- 슬슬 걸어서 보수동에 닿다. 〈우리글방〉에 들러 책 네 권을 고른 뒤, 〈학문서점〉에서도 세 권 고르다. 국제시장 나들이라도 해 볼까 싶어 건널목 있는 큰길로 나오는데, 한창 새 책꽂이 짜고 있는 빈 가게터에서 〈우리글방〉 아저씨가 우리를 부른다. 엇?

 

 〈우리글방〉 아저씨는, 예전 자리는 사람 한 분을 써서 자리를 맡기고, 당신은 이곳에 새 자리를 얻어서 ‘우리글방 2호 가게’를 낼 준비를 하신다고. 이곳도 예전에 책방이 있던 자리인데, 마침 비어 버리게 되어서 넘겨받게 되었단다. 헌책방골목에서 헌책방이 사라져 가는 모습이 싫어서 넘겨받게 된단다. 이렇게 넘겨받으면 책살림 꾸리기 만만치 않으며 버겁지만, “사람들이 책을 보고 쉴 만한 자리가 없잖아요” 하고 이야기하면서, 아저씨 나름대로 ‘여태까지와는 무언가 다른 헌책방 문화’를 일구어 보고 싶으시단다.

 

 

 1층 새 자리 구경을 마칠 즈음, 3층에도 자리 하나가 더 있다고 올라가 보자고 하신다. 1층보다 한결 널찍한 자리. 쉰다섯 평쯤은 된단다. 이 자리를 전문서적을 놓는 책방으로 할지, 지역도서관으로 해 볼지, 아니면 북카페처럼 꾸며 볼지 여러 가지 생각만 있다고. “저도 이거 돈이 있어 하는 건 아니거든요. 여기저기 구걸해서 문화사업을 해요. …… 기본적인 구상은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는데, 인생이 한 번 살고 한 번 가는데, 뭔가 뜻있는 일을 해 보고 싶은데, 좋은 문화공간이 내 사후에도 유지가 됐으면 하는 생각으로 일을 진척시키고 있지요. 우리 책방에서 일하는 분이나 나나 그런 공동체적 입장에서 함께하고 있어요. 내가 죽는다 해도 이런 구조가 계속적으로 지속가능하고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야 하지 않는가 하면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아직 모르겠어요.”

 

- 〈우리글방〉 아저씨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그냥 귀로만 듣기에는 아까워서, “아저씨 내일 시간은 어떠신가요?” 하고 여쭌다. 하루 날을 잡아서 아저씨 이야기를 찬찬히 들으면서 타자로 옮겨 놓아야겠다고 느낀다. 그러면, 부산에서 하루를 더 머물게 되겠군.

 

- 내일 만날 시간을 얼추 잡고 움직이다. 국제시장으로. 저잣거리를 슬금슬금 걸으며 이것저것 구경한다. 사람도 많고 골목도 많고 물건도 많고. 인천 저잣거리는 댈 수 없을 만큼 널찍하고 사람 북적이고 물건값도 퍽 눅다고 느낀다. 저잣거리 북적이는 사람이 많을수록 물건값도 눅고 물건도 한결 좋거나 싱싱하겠지.

 

- 자갈치역. 이곳에는 건널목이 없다. 서울도 인천도 부산도, 사람들 많이 북적이는 이런 큰길에 건널목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오로지 자동차 중심. 나이든 이들은 지하도 계단 내려가고 다시 올라오기 얼마나 힘든데. 나무다리 짚고 계단 오르내리기는 또 얼마나 힘든가. 바퀴걸상을 타고 있다면 더더욱.

 

 지하도로로 길을 건너다. 계단에 미끄럼막는 띠를 둘렀다. 모든 지하철 계단에 띠를 두르지는 않았다만, 사람들 많이 오가는 곳에 두른 띠가 퍽 괜찮다고 느껴진다.

 

- 모든 버려지는 것들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적바림해 놓지 않으면 그예 버려지는 그때 사라지고 말겠구나 싶다. 흔한 과자봉지 하나조차도. 헌책방 문화마저도.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까지도.

 

- “좋은 책 목록”만을 바라는 사람들한테,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묻지 마시고, 아무 책이나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서 읽으면 돼요” 또는 “어떤 책을 읽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차근차근 알아간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살피며 읽으면 돼요” 하고 말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옆지기 이야기. 그런가? 그렇겠구나. 돈만 바라는 사람들 세상에서, “책을 읽어 돈벌 생각을 하지 마셔요”라든지 “책을 하나 펴내서 돈벌 생각을 하면 안 돼요” 하고 말해야 무엇하겠는가.

 

- 자갈치시장에서는 버스나 자가용 모두 천천히 구른다. 앞에 걷는 사람한테 빵빵대는 차가 퍽 드물다. 그러나 저잣거리나 골목길을 내달리는 오토바이는 어디나 마찬가지.

 

- 바다를 죽 둘러보고 자갈치시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걷다. 배가 조금 고프기는 했지만 아무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다. 주머니에 돈도 없지만, 부산사람이 아닌 우리들로서는 바가지를 쓸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느 가게에서도 ‘물고기 값이 얼마’인지 적어 놓고 있지 않다. 뭐, 흥정하기 나름이겠지.

 

 

- 다시 지하도를 건너야 한다. 유리문을 밀려고 하는데 앞에서 마주오는 사람 하나. 멈칫 하고 선다. 마주오던 사람도 멈칫 하고 선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고 오른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며 먼저 지나가라고 한다. “고맙습니다” 맞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 국제영화제를 한다는 골목을 걷다. 학교옷 입은 여고생이 참 많다. 가게마다 불빛이 밝다. 영화잔치는 극장에서만 하나? 하긴, 이 둘레 길에서 영화를 걸 만한 자리는 따로 보이지 않는다. 널따란 찻길을 막고 하지 않는다면, 마땅한 자리가 없겠지.

 

- 다시 국제시장으로. 밀면 한 그릇에 2000원 하는 곳이 있어서 찾아들다. ‘30년 전통’이라는 간판이 붙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만한 전통을 내세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맛이? 값이? 자리가? 글쎄.

 

- 맥도널드 집으로 가다. 안쪽에 앉아서 다리쉼. 저녁에 만나기로 한 분을 기다리며.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이런 패스트푸드집에서는 주문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문화를 익히 알면서 잘 쓰고 있겠지. 그러고 보니, 젊은 학생들로서는 불 밝고 시원하고 깨끗해 보이는 패스트푸드집에서 다리를 쉬며 수다를 떨거나 책을 읽을 때가 한결 낫다고 생각하겠구나. 헌책방에 가면 무엇보다도 ‘패스트푸드집보다 깨끗하지 않다’고 느낄 테고, 뒷간 가기 번거로우며, 앉을 만한 넉넉한 자리가 모자라고, 어둡다고 생각할 테니까. 문화도 돈에 따라 움직이는가.

 

- 광안리에 사는 조상현 형을 만나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왔을 줄 알고 짐차를 끌고 왔다고. 마음써 주어 고맙다. 하지만 난 짐차가 더 좋다. 자가용보다.

 

 “버스에 3개 국어 적힌 데는 부산밖에 없을 거예요.” 하면서 옆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보라고 한다. 가만 보면, 세 나라 말이라기보다는, 한글 밑에 대충 알파벳과 한자를 적었을 뿐이다. ‘西面롯데百貨店’ 같은 글월을 보면, 세 나라 말로 적었다는 말이 무엇인가 싶어 웃음이 나온다. 일본사람을 생각해서 적은 한자였다면 가타가나로 적어야 하지 않겠나. 더욱이, 나라밖 사람들은 버스 타기 힘들다. 버스가 어디로 갈 줄 알고? 나라밖 사람들은 지하철을 탄다. 나라안 사람들도 버스 타기 힘들다. 인천사람이 서울버스 타기 힘들고, 서울사람이 인천버스 타기 힘들다. 대구사람이 광주버스를 쉬 탈 수 있겠나? 대전사람이 제주버스를 탈 수 있겠나? 버스에 여러 나라 말 적는 일은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이라고 느낀다.

 

- 부산도 우리 나라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아파트와 상가만 줄줄이 늘어서 있다. 어느 네거리 신호에 걸려 멈춰 있을 때, 조상현 형이 요 앞에 보이는 아파트숲이 다섯 해 앞서만 해도 모두 판자집이었다고 이야기해 준다. 아, 그러면, 이 판자집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옮겨갔을까? 그이들이 느긋하게 두 다리 뻗고 쉴 만한 집터를 얻어서 살 만한 곳이 부산 다른 곳에 있을까? 그 판자집 사람들이 걱정없이 일할 만한 자리는 있을까?

 

- 길에 차가 참 많다. 우리가 탄 차도 이 가운데 하나. 모두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려고 할까. 자가용 아니면 움직일 수 없을까.

 

- 광안다리를 지나다. 우리보고 부산 구경을 시켜 준다며 일부러 지나는 다리. 다리에서 바라다보이는 광안리 바닷가 아파트들. 바닷가 모래밭을 죄 덮어 버리고 시멘트로 처바른 뒤 올려세운 아파트들. 저 아파트에 깃들 만한 돈이 없으면 바다 구경은 하지 말라는 소리일까.

 

- 저녁과 술을 함께 먹을 자리로 찾아가다. 상현 형한테 ㅎ학회 소식을 얻어듣다. 머잖아 100돌을 맞이한다고 하는데, “학회 100돌을 기리며 200억을 모아서 새 건물을 짓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고 한다. 200억? 그 돈으로 새 건물? 오랫동안 꿋꿋이 이어온 학회에서 할 일이 사람들한테 돈을 모아서 새 건물 짓기일까. 슬프다.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 그렇게까지 돈을 모으지 않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고기집 에어컨에 술 광고 하나 붙어 있다. 술이름은 ‘좋은데이’. 사투리를 흉내내는 한편, ‘좋은 + day’로 지었다는 이름. 씁쓸하다. 웃기다. 시원소주 마시다.

 

 상현 형이 여관방을 잡아 주고 방삯까지 치러 주다. 돈없는 우리들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이 고마움을 갚을 날이 있을까.

 


태그:#걷기, #걷기 여행,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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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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