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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자암으로 가는 길.
 중사자암으로 가는 길.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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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개에선 보현보살도 숨을 할딱거린다

복천암을 지나 문장대로 가는 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얼마 걷지 않아 보현재에 이른다. 속칭 '할딱 고개'라 부르는 곳이다. 고개를 오르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숨이 가쁠 것이니 그렇다 치자.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는 보현보살도 이 고개를 오르노라면 할딱거린다는 뜻인가. 

할딱 고개가 필연적으로 할딱 고개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고개에 자리 잡은 '주막' 때문이기도 하리라. 이곳에서 음료수 삼아 한 잔  들이켠 사람들은 다시 산행에 나설 때면 달아오르는 술기운 때문에라도 당연히 할딱거리지 않을까.

할딱 고개를 전혀 할딱거리지 않고 넘어간다. 문장대 1.3km라 쓰인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중사자암으로 가려고 좌측으로 방향을 튼다. 중사자암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자마자, 오랜만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반가웠던지 큰 바위 하나가 마중나와서 길가에 읍하고 선다.

몇 걸음 더 가자,  이번엔 몇 백 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이 마중나와 섰다. 중사자암으로 가는 오솔길은 나그네의 마음을 아늑하게 하면서 한없이 걷고 싶게 한다. 그러나 길은 생각만큼 멀리까지 뻗어가지 못한다. 높다란 축대 위에 걸터앉은 중사자암이 "한눈 팔지 말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기 때문이다.

원당지에 버려진 석조,
 원당지에 버려진 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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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라는 나그네에겐 목표한 곳을 향해 곧장 질러가지 못하는 오랜 불치의 병이 있다. 중사자암에 오르기 전 먼저 인조 아버지 원종 대왕의 원당지에서 잠시 서성인다. 원종 대왕이란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이르는 말이다. 생전에 쓰던 이름은 이부(李琈)인데 사후에 원종 대왕으로 추존되었다.

1641년(인조 19년), 왕의 명에 따라 이곳에 원종의 원당을 세웠다. 이때 원종의 아들이자 인조의 동생이기도 한 능원대군이 자신의 전답을 절에 바쳤다고 한다. 이후로도 중사자암은 몇 차례 더 왕실의 지원을 받게 된다.

빈터 여기저기엔 주춧돌이 널려 있다. 네모진 꽤나 큰 석조도 눈에 띈다. 무용지물이라, 몸만 남고 쓰임새를 잃은 사물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15년 동안 중사자암을 지켜온 지륜 스님

중사자암.
 중사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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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주인 지륜 스님. 원만한 인품이 엿보이는 얼굴이다.
 암주인 지륜 스님. 원만한 인품이 엿보이는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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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자암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알려진 바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의신 조사가 문을 열었다고 한다. 탈골암과 같은 시기다. 아무튼 중사자암은 조선시대에 들어 원종의 원당으로 지정되는 등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암자 역시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가 보다. 암자 전체가 불타버렸으니. 현재의 암자는 1957년 이후에 중건한 것이다.

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다. 중앙의 3칸은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좌우 2칸은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불단 중앙에는 통견을 한 비로자나불이 봉안돼 있다. 비로자나 특유의 지권인을 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 법주사 극락전에서 모셔온 것이라 한다. 불상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다. 후불탱화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세 분씩 보살이 그려져 있으며 양쪽엔 사천왕이 지키고 섰다.

"새벽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하루종일 밤까지 비가 내렸다.밤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세수한 다음 옷을 차려 입고 앉아서 영천의 선묘를 우러러 생각하였다. 새벽에 꾸벅꾸벅 졸았다. 홍연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다. 설제가 일찍 와서 보았다. 조금 늦게 대암암에서 출발하니, 설제와 운밀이 전송하였다. 성희가 옷가지와 양식을 지고 중사자암에 도착하니, 암자의 승려들은 모두 나가고 단지 상좌 차현 만이 있었다.

뜰앞에 있는 암대에 올라가 도량을 둘러보니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 한동안 앉았다가 차현으로 하여금 행장을 지게 하고 재 하나를 넘어서 상사자암을 바라보니 공허하였다."- 정시한의 <산중일기>, 1686년 10월 10일치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던 정시한은 도착 즉시 중사자암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법주사에 있다가 올라온 지륜(智輪) 스님은 이곳에 사신 지 15년이 됐다고 한다. 이 스님은 외로움에 젖어버린 분일까, 아니면 초월한 분일까.

법당 오른쪽 칸 책장에는 각종 경전이 그득하다. <산중일기>라는 옛 책에 중사자암 얘기가 나온다고 했더니 책 이름을 다시 확인하시며 반색하신다.

다람쥐와 청설모를 우렁각시로 받아들이다

사적비로 추정되는 비.
 사적비로 추정되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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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에 모아놓은 잣송이들.
 마당가에 모아놓은 잣송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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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자암 법당 앞마당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거북이가 비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몸 크기에 비해 얼굴이 아주 크다. 마치 찰흙을 뭉쳐 붙이듯 돌을 조각한 것이다. 실제보다 과장된 코와 눈이 거북을 익살스럽게 보이게 한다.

언제 세운 것인지, 비문은 마모가 심해 전혀 글자를 읽을 수 없다. 추측건대, 사찰의 내력을 기록한 사적비가 아닌가 싶다. 몸돌 꼭대기에는 소박한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지륜 스님이 모아 놓은 것일까. 공양 간 앞에는 잣 송이 한 무더기가 쌓여 있다. 이 산속에서 15년이란 세월을 났으면 아마도 자급자족에는 아주 이골이 났을 것이다. 훗날, 누군가 우연히 지륜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다면 이 사실을 추가해도 좋으리라.

'가을이 오면 지륜 스님은 잣나무의 잣을 다람쥐나 청설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주야로 노심초사했다. 백방으로 대책을 궁리하던 스님은 원당지에 있는 밤나무들을 송두리째 그들에게 분양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략질은 쉽게 그칠 줄 몰랐다. 스님은 마침내 다람쥐와 청설모를 자신과 함께 살 우렁각시로 공식 인정하고야 말았다.'

삼성각.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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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각 안에 봉안된 칠성탱화.
 삼성각 안에 봉안된 칠성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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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오른쪽에 있는 삼성각으로 올라간다. 삼성각은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단 앙증스런 건물이다. 여염집 가묘를 연상시키는 작은 규모다.

왼쪽에는 산신 탱화가 걸려 있다. 호랑이를 어루는 산신의 모습이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저만큼 호랑이를 능수능란하게 어루려면 몇 백 년이나 늙어야 하는가.

오른쪽에는 칠성의 모습을 그린 칠성탱화가 걸려 있다. 산신탱화가 채색화인데 반해 칠성탱화는 검은색 바탕 위에 가는 선만으로 그렸다. 불필요한 선을 죽이고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할 수 있다는 건 웬만큼 자신감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탱화를 그린 사람의 활달한 성격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앞산 봉우리와 가끔 눈싸움도 하면서 살고 싶은 곳

법당 마당가 암대.
 법당 마당가 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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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대 위에 놓인 나무의자.
 암대 위에 놓인 나무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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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잇대어 있는 넓은 암대 위로 올라간다. 모양이 감투를 닮았다고  '감투 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다. 바위에는 군데군데 인위적으로 판 작은 홈이 있다. 여기에 꽃을 꽂고 기도를 하면 관직에 오른다고 하는 속설이 전해진다 한다.

난 "뜰앞에 있는 암대에 올라가 도량을 둘러보니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라는 정시한의 말은 아마도 이 중사자암도 임진왜란 등의 전화를 입었다는 뜻일 게다. 왕실의 원찰이었던 중사자암이 그러할진대 상사자암을 바라볼 때 어찌 공허하지 않았겠는가. 전란에 몽땅 타버려 아무런 전각도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내가 잠시 머물러본 중사자암은 아주 아늑한 곳이다. 정시한처럼 금방 떠나고 싶은 마음은커녕 내 발길을 정지 모드로 놓은 채 오래도록 머물다 가고 싶은 곳이다. 더구나 이곳은 문수보살이 항상 머무르고 있다는 문수도량으로 알려졌다. 사찰의 이름이 중사자암인 것도 암자가 앉은 자리가 문수봉 아래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다니기 때문이다.

저 나무 의자에 앉아 저 멀리 바라다보이는 묘봉과 가끔 눈싸움도 하면서 철없이 살다 보면 우연히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행운이 찾아올는지 모른다. 누가 아는가. 그렇게 몇십 년만 살 수 있다면 나보다 저 산봉우리가 먼저 눈을 깜박거리는 날이 올는지.

스님에게 작별을 고하고난 뒤 중사자암을 떠난다. 잘 있어라, 문수봉 아래 지륜 스님과 살아가는 모든 우렁각시들아.

덧붙이는 글 | 10월 3일 다녀왔습니다.



태그:#속리산 , #중사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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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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