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세기를 배경으로 한 SF영화 '스타트렉'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심지어 외계 생물체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언어 장벽은 찾아 볼 수 없다. 21세기에 벌써 인류는 통역 기계를 통해 언어 장벽을 완전히 걷어 낸 것으로 나온다. 영어 밖에 모르는 북미 백인이든, 아프리카 방언을 쓰는 흑인이든, 전통 언어를 고집하는 아시안이든 모든 인류는 통역기의 도움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통역기는 한국어로 얘기하는 사람의 말이 상대방에게는 영어로 들리게 한다. 또 스페인어로 얘기하는 사람의 말이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어로 들리게 해 준다. 이런 방법으로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어떤 인종이나 외계 생물체와도 자유롭게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나온다. 1964년 미국 TV시리즈로 시작된 영화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그 상상력은 점점 현실이 돼 가고 있다. 정보통신 공학, 데이터베이스(DB) 기술, 통계학, 인공지능학, 음향학, 뇌신경학 등 자연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물론, 언어학, 심리학 등 인문학과의 활발한 학제적 교류는 언어 장벽의 높이를 매일 낮추고 있다.
통역기 개발을 누구보다도 더 반기는 사람들은 이 곳 재미 한인들. 영어의 문에 막혀 언제나 '2등 국민' 취급 받는 설움이 가실 날이 멀잖아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600~700만명에 달하는 다른 재외 한인들에게도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언어가 권력이나 장벽이 되지 않는 시대,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그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
통역기 연구의 선두주자, 카네기멜론대 2005년 10월 27일 피츠버그시 카네기멜론 대학(CMU). 이 대학 연구진을 포함한 미국의 여러 학자들과 독일 칼스루허 대학 관계자들이 영상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는 CMU 알렉스 웨이벨 교수팀의 통역기 연구가 최초로 공개되는 자리.
대만 유학생 스탠 조우씨가 입 주위와 목에 11개의 전극을 붙이고 등장했다. 조우씨는 모국어인 만다린어로 중국어를 모르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조우씨의 몸에 붙은 전극들은 입 동작을 파악해 조우씨의 중국어 정보를 컴퓨터로 보냈다. 1~2초 뒤에 조우씨의 말은 영어로 바뀐 채 스피커를 통해 회의 참석자들에게 들렸다.
"Let me introduce our new prototype. You can speak in Mandarine and it translates into English or Spanish."(제가 우리의 새 통역기 모델을 소개해 볼게요. 여러분들은 만다린어를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와 스페인어로도 통역될 수 있고요).
이날 회의는 중국어 통역만 된 게 아니었다.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는 웨이벨 교수의 말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 학자들에게는 독일어로 들리고 있었다.
회의를 지켜본 남가주대 케빈 나이트 교수는 "이전 연구는 여행이면 여행, 의학이면 의학 등 한 분야 (limited domain)에 한정된 채 통역이 이루어졌는데 웨이벨 교수의 연구는 어떤 상황 (open domain)에서도 통역을 할 수 있을 만큼 연구가 진행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며 "이는 (통역기 개발 연구에) 놀라운 진보"라고 평가했다.
CMU 컴퓨터 공학과 란달 브라이언트 학과장은 "15년 전에 이미 시작된 인공 지능과 통계적인 방법을 통한 통역기 개발이 결실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구를 주도한 웨이벨 교수는 "아직 많이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서도 "전극 이식 등을 통한 음성 인식 기술이 좀 더 발달할 10년 내에 통역기 상용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벌써 이라크전 시범... EU·일본·중국 사활을 건 각국 연구 개발 통역기 개발 연구는 이미 50년대에 시작됐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구소련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서방 세계가 러시아어 실시간 번역 기술 개발을 시도했다. 음성이 아닌 문장 번역 수준이라는 한계로 곧 열기가 시들긴 했지만 이 연구는 음성인식, 언어번역, 음성합성 등 통역기 개발의 세 가지 주요 과제 중 언어번역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오늘날 구글의 웹페이지 번역이나 20개 공용어를 가진 유럽연합(EU)의 공식 문서 번역에 이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본격적인 음성 통역기 개발은 60년대부터 시작됐다. 미국은 CMU 같은 민간 대학 연구와 별도로, 국방첨단기술연구소(DARPA)의 지원을 받는 국책 연구가 활발하다. 주로 군사 목적의 통역기 개발은 IBM의 '게일(GALE) 프로젝트'가 유명하다. 40여년 간의 연구 결실로 현재 이라크전에서 영어, 아랍어 통역에 90%의 성공률을 보이며 시범 운용되고 있다.
다민족, 다언어로 구성된 EU도 통역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EU 결성 이전부터 독일은 매년 5000만 달러의 예산을 통역기 개발에 투자해 왔다. 그 결과물로 95년에 '버브모빌(Verbmobil)'이라는 휴대용 통역기의 데모 버전을 출시하기도 했다. EU 결성 후에는 노키아, 지멘스 등 유럽의 대형 기업을 중심으로 'TC-STAR'라는 통역기 개발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아시아의 경제 대국답게 일본도 통역기 개발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60년대부터 통역기 개발을 위한 기초 연구를 시작했다. 80년대 언어 장벽 극복에 대한 여론의 열기로 대규모 펀드가 조성되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86년에 ATR 자동번역전화연구소가 설립되고 이후 ATR음성번역통신연구소, NICT 등으로 조직을 확대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일본 최대 통신회사인 NTT-도코모는 조만간 통역전화 서비스를 선보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본 컴퓨터∙통신기기 제조업체 NEC는 2005년 휴대폰, PDA 등에 일본어∙영어 동시통역 시스템을 내장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중국도 최근 통역기 개발에 가세했다. 통역기를 이용한 실시간 동시통역으로 언어 문제 없이 진정 인류가 하나가 되는 올림픽을 열겠다는 포부를 비치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대규모 연구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며, 중국학술원의 주도로 CMU 등과의 공동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50억 시장 통째로 삼킬 기술, 인터넷 혁명 뛰어넘는 정보 혁명 각국이 통역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인류의 언어 장벽 해소라는 대의적인 이유 못 지 않게 현실적인 이유가 크다. 이미 지구촌화에 접어든 오늘날, 언어 장벽 해소는 50억 인류의 공통된 소원. 따라서 누가 통역기 개발의 주도권을 잡고, 기술 개발의 표준을 세우느냐는 것은 50억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통째로 집어 삼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쟁에 낙오하면 전세계 시장을 한꺼번에 잃을 뿐 아니라, 모국어 통역을 다른 나라 기술에 맡겨야 하는 자존심의 문제로까지 연결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20개 공영어로의 통∙번역을 위해 EU가 매년 지출하는 13억 달러(1조2000억원)나 전세계적으로 외국어 학습에 들어가는 수백억 달러의 교육 비용이 절감될 수 있다.
또한 통역기 개발에 필수 요소인 음성 인식 기술은 20세기 말 인터넷 혁명에 버금가는 정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필수인 키보드를 통한 정보 입력이 음성에 의한 정보 입력으로 훨씬 수월해 질 수 있다. 한국어로 컴퓨터 앞에서 얘기만 하면 영어로 활자화 돼 컴퓨터에 저장되고 전세계인이 동시에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수의 강의는 자동 입력되고, 대화형 자판기와 로봇, 음성으로 운전하는 자동차 등이 등장할 수 있다.
막 출발선 넘은 한국, 갈길이 멀다
세계는 결승점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는데 한국은 이제 막 출발선을 넘었다. 한국에서의 통역기 연구는 90년대 들어서야 시작됐다. 90년대 초반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위한 미래복합형 기술개발' 과제에 통역기 연구가 포함됐다. 이후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를 중심으로 미국 CMU, 일본 도쿄대 등과 연계해 연구가 진행됐다.
하지만 당시 연구를 주도했던 초기 연구자들 중 일부가 연구소를 떠나면서 현재까지 뚜렷한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계의 연구는 거의 전무한 형편. 삼성종합기술원이 음성DB를 구축하고 있는 정도가 대기업 참여 정도다.
㈜타임스페이스시스템이라는 벤처기업이 지난해 3월 한국어, 영어 등 4개 국어 휴대용 동시 통역기라며 '월드메이트'라는 제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관광객들을 위해 공항, 교통, 숙박 등 간단한 문장을 녹음된 원어민 발음으로 들려 주는 수준이었다. 통역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음성 인식 기능이 없어 진정한 의미의 통역기라고 할 수 없는 제품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통역기 개발에 힘을 쏟지 않는 이유는 기초 연구 부족으로 인해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통역기 개발에는 자연과학 뿐 아니라 언어학, 심리학 등 인문학의 발달과 협조가 필수적인데 이런 학제간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남녀노소, 건강 상태, 배경 잡음 등에 따라 달라지는 음성 특성을 간파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 구축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따라서 여론을 불러 일으키고 대규모 연구 개발비를 책정 받는데 필요한 단기 성과를 내기가 요원하다.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통역기와 직접 연결된 성과로 인정 받아 특허 등으로 관련 기술이 보호받기 어렵다는 이유도 작용한다.
통역기 개발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일관된 과학기술 정책이 필요한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뀌는 정책의 비일관성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비록 한국의 기술이 아니어도, 한∙영, 한∙일 통역기 등의 개발은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 한국 경제의 규모를 경시하지 않고 있는 미국과 EU, 일본의 기술이 한국어 통역기에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영어의 경제학'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어학 관련 시장은 연간 15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통역기 개발로 한국은 이런 돈을 절약할 수 있겠지만 외국의 통역 기술을 이용한다면 자칫 그만한 기술 로열티를 고스란히 뺏길 수도 있다. 20세기에 한국은 영어 때문에 아이들에게 혀 수술까지 시켰다. 21세기에는 외국에서 만든 한∙영 통역기를 사기 위해 거액의 외화를 쏟아 부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