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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암을 나와 400m를 거슬러 올라와 다시 능선을 탄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입석대가 거대하다. 풍수지리적으로 말한다면 속리산은 한창 활동중인 화산(火山)에 속한다. 과학적으로 각색해서 말한다면 중생대 백악기 말 지각 변동의 산물이다. 저 입석대는 땅이 90도 회전하다 정지한 순간의 것일까.
 
비로봉을 내려서니 상고석문이 기다리고 있다. 자연적인 문이 마음에다 섬세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의 무늬를 아로새긴다. 석문을 지나는 순간, 여태까지의 내가 알던 세계와는 단절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제 천황봉이 0.6km밖에 남지 않았았다고, 조금만 더 서두르라고 말하는 이정표씨. 그러나 난 천황봉으로 가는 길 대신 상고암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고 만다. 흐린 날씨 탓에 길이 사뭇 어둡기 때문이다.

 

 대관령에 눈이 내리면 이곳에도...

 

 

상고암은 신라 성덕왕 17년(720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탈골암이나 중사자암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진 모양이다. 상고암(上庫庵)이라 부른 것은 법주사를 지을 적에 천황봉에서 벤 소나무를 이곳에다 저장해두었기 때문이다. 위 상자, 창고 고자를 써서 상고암이라 한 것이다.
 
처음은 그렇게 창고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상고암은 무척 단정한 절이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음이 마치 솜이불을 덮은 듯이 아늑하고 따사롭게 느껴진다.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1625~1707)이 이곳에 온 것은 서기 1686년 10월 18일이었다. 아마도 양력으로 11월 말쯤 되었던가 보다.


흐리고 추웠다. 저녁에 눈이 내렸다.


아침식사 후에 지팡이를 짚고 뒷산 봉우리에 올라가 상고암에 이르니, 새로 지은 건물로 금년 여름에 단청을 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휘황찬란하였다. 성준과 계호라는 두 승려가 있었는데 눈이 매우 어두웠다. 성준과 함께 북학에 올라가니 시야가 툭 트였다. 덕유산, 대둔산, 계룡산 등이 마치 발밑에 있는 듯 하였다. 아득히 바라보니, 산들이 마치 큰 바다에 물결이 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중간 생략)


산세가 감싸고 있어서 비록 시원스럽게 트이지는 않았으나 깊숙하고 한적하여 거처하기에 적합하였다.

 

 - 정시한 <산중일기> 1686년 10월 18일치

 

대관령에 눈이 내리면 이곳에도 어김없이 눈이 내리다는 말이 있다. 눈이 내렸음에도 환갑이 지난 노인이 그냥 "추웠다"고만 간단히 쓰고 있는 걸 보면 상고암이 얼마나 아늑한 곳인  줄 알겠다.

 

 


 상고암의 주 불전은 극락전이다. 1975년, 완전 폐허로 변해버린 상고암 터에 세운 것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휘황찬란"했던 곳이 어떻게 해서 폐허가 돼버린 것일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고 나자, 살림살이가  곤궁해질 대로 곤궁해진 백성은 발길을 뚝 끊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스님들도 덩달아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이 암자를 버리고 산 아래로 내려간 게 아닐까.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극락전은 아담하다. 극락전 현판의 글씨는 건물을 지은 이듬해인 1976년 화가 권옥연이 쓴 것이다.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모셨다. 이 아미타불의 수인은 석가모니불처럼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불상이 바라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허공에 걸려 있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

 

극락전 뒤 조금 높은 자리에는 영산전과 산신각이 있다. 영산전을 들여다 본 다음, 멀리 산 아래를 조망한다. 정시한이 말한 그대로 "덕유산, 대둔산, 계룡산 등이 마치 발밑에 있는 듯"하고 " 산들이 마치 큰 바다에 물결이 이는 듯한 모습"이다. 내 마음 속에도 숱한 감정들이 저렇게 크고 작은 산을 이루고, 골을 이루고, 그 사이를 파도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말이 쉽지 마음을 다스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겠다.

 

산신각에서 조금 더 가면 속리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전망대가 있다. 문장대로부터 비로봉에 이르기까지 멀고 가까운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손에 잡힐 듯하고 금방이라도 내 눈 안으로 들어올 듯하다. 속리산을 전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전망처가 또 있을까.

 

좋은 경치를 앞에 두니, 옛사람이 쓴 시 한 수가 떠오른다. 고려말의 고승 혜근 스님이 쓴 '현봉(懸峰)'이라는 한시다. 현봉이란 '(허공에) 걸린 봉우리'란 뜻이다.
 
掛在虛空任往還(괘재허공임왕환) 허공에 매달려 멋대로 왔다갔다
巍巍秀出揷靑天(외외수출삽청천) 우뚝하게 솟아올라 푸른 하늘에 꽂혀있네
東西南北無依倚(동서남북무의의) 동서남북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어
高鎭層尖獨超然(고진층첨독초연) 층층이 뾰족한 곳을 높이 누르며 홀로 초연하여라

 

- 혜근 스님의 한시 '현봉(懸峰)
 
시의 한 구절처럼 문장대, 관음봉, 문수봉, 비로봉 등 속리산 봉우리들이 허공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저렇게 우람한 봉우리들을 매달고 있는 허공은 얼마나 무거울까. 허공은 낑낑거리는데 난 여기 초연히 바라보고 섰다. '초연'과 '중립'이란 타자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초연한 내가 싫어져서 그만 발길을 돌린다.

 


요사 토방에 놓인 함지박엔 마가목의 열매가 가득 담겨 있다. 장미과에 속하는 마가목은 봄에 새순이 돋는 모양이 마치 말의 이빨과 같이 힘차게 돋아난다. 그래서 마아목(馬牙木)이라 했던 게 마가목으로 음운변천한 것이다. 마가목 열매로 담근 술은 기침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절 마당 가에선 스님과 보살이 나란히 서서 마가목 가지를 다듬고 있다. "무엇에 쓸 거냐? "고 물었더니만 "마가목은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라고 스님이 대답한다. 마가목 가지는 중풍, 고혈압, 위장병, 기침 등에 좋다고 하니 아마도 효소를 담그려는가 보다. 
 
한 그루 나무에 지나지 않지만, 마가목의 한 생애는 거룩하다. 제 온몸을 아낌없이 주어 버린다. 만약 무생물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현미경이 있어 마가목의 빨간 열매를 들여다 본다면 자비심으로 촘촘히 뭉쳐진 세포를 발견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모든 종교가 마가목 같은 약초가 되었으면 좋겠다. 섭취하는 그대로 정신의 자양분이 되는·.
 

 산은 그 자체가 '약사전'이다

 

상고암 마당 오른쪽에는 거북바위와 용바위라는 두 개의 바위가 있고, 그 오른쪽 평평한 바위엔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이 있다. 보탑을 든 광목천왕, 칼을 든 동방지국천왕 등 사천왕들과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상고암을 나선다. 조금 걷다 보니 '굴법당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마음속 호기심이 한 번 찾아가 보라고 나를 부추긴다. '약사전'이라 음각된 굴법당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문 옆에는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라 쓰인 두 개의 화강암 비가 지켜 서 있을 뿐.

 

누군가 산을 일컬어 "천연의 사원"이라 했다지만, 난 "산은 전체가 약사전"이라고 일컫고 싶다. 내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삶에서 생긴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구하고 싶어서이다. 오늘도 난 속리산이란 약사전에서 한동안 쓸 수 있을 만큼의 약을 구했다. 시절 인연이 닿으면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 혹시 아는가. 불법당 주인에게서 몇 년 동안 쓸 마음의 약을 얻어가게 될는지.

덧붙이는 글 | 상고암에는 지난 10월 3일 다녀왔습니다.


태그:#속리산 , #상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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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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