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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동네 배추농사꾼 노씨가 배추 값을 잘 받은 뒤 활짝 웃고 있다.
 우리동네 배추농사꾼 노씨가 배추 값을 잘 받은 뒤 활짝 웃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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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안흥산골 말무더미 마을은 산촌(散村)으로 내 집 이웃은 두 집밖에 없다. 옆집 작은 노씨는 이태 전 소를 먹이고자 큰 축사를 지어 조금 떨어진 외딴집으로 이사를 가고 대신 건축 일하는 이씨가 와 살고 있고, 앞집에는 토박이 큰 노씨(62·노진용)가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그도 결혼할 무렵에는 잠시 외지(인천)에도 살아봤지만 기름 냄새도 나고 목도 머리도 아파 도시는 살 곳이 못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농사꾼으로 산다고 했다. 워낙 사람이 없는 동네라 나는 눈만 뜨면 만나는 사이다.

우리 고장은 최근에는 안흥찐빵으로 유명하지만 예로부터 고랭지 채소와 한우생산단지로 이름난 고장이다. 노씨는 고랭지 배추농사만 40여 년 지어온 전문농사꾼이다. 한때는 고랭지 배추 시세가 좋아 농협직원이나 면서기도 부럽지 않았단다. 배추농사로 자식들 교육은 물론 결혼까지도 다 시키고 논밭도 두어 자락 장만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배추 값이 들쭉날쭉해서 농사가 아니라 '섰다판' 같은 투기장이 되었다고 한탄한 것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요즘은 고랭지 배추 농사기술이 전국적으로 보급된 데다가 중국산 배추가 수입되고,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를 들여놓은 뒤부터는 전보다 배추 소비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값이 없다는 푸념을 거의 날마다 들었다.

 지난해 여름 배추값이 폭락하자 배추가 밭에서 썩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 배추값이 폭락하자 배추가 밭에서 썩고 있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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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곁에서 지켜보니까 당신 푸념이 과장은 아니었다. 특히 배추 농사가 잘된 해는 배추를 팔지 못해 밭에서 그대로 썩히는 걸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농사꾼은 봄배추에 재미를 보지 못해도 행여 여름배추는 괜찮을까 싶어 밭을 갈고 다시 심고는 수확 때는 생산비도 못 건진 채 팔아버리고는 쓴 소주로 아픈 마음을 달래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올 여름과 가을은 정말 징그럽게도 비가 줄곧 내렸다. 노씨는 여름 배추를 심고는 모종이 물러 자지러지자 검은 얼굴이 더 숯 껌정이가 되고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40여 년 지은 전문 농사꾼 솜씨도 하늘이 돕지 않자 반은 자지러지고 남은 배추도 비실비실했다.

한창 포기가 굵고 배추 속이 꽉 차야 하는 수확기에도 배추 포기는 예년의 반도 안 될 정도요, 그나마 골에는 듬성듬성 반 정도밖에 자리지 못했다. 올 가을 배추농사는 우리 마을뿐 아니라 전국이 대흉작으로 배추 값이 마침내 뛰기 시작하여 배추 한 포기가 5천원 이상이나 가는 그래서 도시민들은 김치가 '금치'로 되었다고 아우성이다.

엊그제 노씨네 배추가 팔려 중간 도매업자들이 배추를 뽑아 가다듬은 뒤 트럭에 싣고 갔다. 배추 값이 워낙 비싼 탓으로 예년 같으면 밭에다가 죄다 버릴 자투리 배추마저도 보름 뒤에 다시 뽑아간다면서 업자들이 밭에다가 손도 대지 말라고 경고문까지 써 붙여두었다.

 우리동네는 고랭지 배추산지다.
 우리동네는 고랭지 배추산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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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5일) 아침, 우체국 가는 길에 배추밭을 지나는데 노씨가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보는 아주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배추 얼마에 파셨어요.”
“뭘요, 그냥 좀 받았어요.”

올 가을 배추농사는 흉작이지만 예년에 풍작인 해보다 배추 값을 훨씬 더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흉작에도 활짝 웃은 자신이 다소 겸연쩍은 양 한 마디 던졌다.

“내 것은 잘 되고 남의 것은 잘 못 되어야 값을 제대로 받게 되고, 그래야 웃음이 나오는 것은 옳은 마음이 아니지요. 사실 농사꾼이 풍작을 반갑잖아 하는 건 뭔가 크게 잘못된 겁니다.”

풍흉작을 떠나 해마다 농산물 수확 때면 농사꾼들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면 아마도 농촌이 이처럼 썰렁하지는 않을 것이다.


#배추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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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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