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오연호 기자가 연재중인 '오연호리포트-인물연구 노무현'을 읽고 나서 쓴 편지를 최근 <오마이뉴스>에 보내왔다. 이 편지는 '인물연구 노무현' 세번째 편인 "연정 제안하면 한나라 당황할 줄 알았다, 수류탄 던졌는데 우리 진영에서 터져버려"에서 거론한,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시도한 것은 패배주의와 성급한 성과주의"라는 해석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반론을 담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게재한다. [편집자말] |
오연호 기자,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나에 대한 기사를 잘 보고 있습니다. 글이 좋습니다. 능력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다만 항의가 될 지 반론이 될 지, 지적을 해두고 싶은 한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패배주의', '성급한 성과주의'라는 대목입니다.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민주당의 상황으로 보아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정국을 끌고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당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런 말을 근거로 패배주의를 추론한 것 같습니다.
총선 승리가 어렵다고 생각한 것, 정국을 끌고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사실을 패배주의의 근거로 보았다면 그것은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선거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본 것은 패배주의일 수도 있지만, 미래를 객관적으로 보는 냉정함일 수도 있고, 미래에 닥쳐올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준비를 해 두고자 하는 용의주도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객관적 예견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 아닐까요?
"대연정 제안, 국정운영 자신감 상실과 패배주의 아닙니다"정국을 끌고가기가 어렵다는 인식 역시 객관적 상황에 관한 인식일 뿐 이로 인하여 국정운영에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거나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볼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정국을 끌고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자주 강조한 것은 우리 정치제도와 문화가 이대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 내가 국정운영에 자신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대통령제, 지역구도 다당제, 여소야대의 일상화 등으로 인한 이원적 정통성의 문제, 책임정치가 불가능한 정치구조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고, 이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역구도 해소, 대연정 등의 타협주의 정치를 제안해 왔습니다. 내가 정국운영이 어렵다고 강조한 것은 크게는 이런 문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통스러웠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재신임을 물을 당시의 상황이었는데, 당시는 정국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스럽거나 위축돼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대선자금 수사와 나의 측근이 받은 정치자금 문제가 공개된 데 따른 것입니다. 당시 나는 이 문제로 부끄럽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정말 대통령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시기의 특수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아울러 대연정 제안과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일반적으로, 또는 대연정 제안 당시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패배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내가 인터뷰를 할 때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예측, 국정운영의 어려움, 특수한 시기의 고통과 위축 등의 이야기와 지역구도, 여소야대 등으로 인한 정치제도와 문화에 대한 문제점을 뒤섞어 이야기함으로써 오 기자로 하여금 혼선에 빠지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이야기들을 그냥 묶어서 패배주의로 규정한 것을 흔쾌히 수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의 나의 정치역정과 비교해 보면 너무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20년 정치 생애에서 여러 번 패배했지만, 한 번도 패배주의에 빠진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일일지는 모르나, 나는 항상 몇 해 앞의 상황을 미리 가정해 보고 대응책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까지 고려해 준다면, 다가올 선거의 결과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여러가지 대응책을 준비하는 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세심함이나 용의주도함, 또는 멀리 보는 안목의 근거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지역구도 해소는 나의 필생의 정치 목표입니다대연정 제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후보 시절부터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 헌정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만큼 오래된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당선 이후에 더욱 깊어져서 최근 청와대 참모들이 '한국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책으로 정리해 내놓을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역구도 해소는 나의 필생의 정치 목표입니다. 나는 여기에 내 모두를 걸었습니다. 결국은 그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으나, 정작 나는 아직도 이 목표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는 국민들이 어떤 평가를 하든,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큰 진전이 있기 전에는 스스로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보가 되고부터는 동거정부, 대연정 등의 대타협의 정치가 아니고는 우리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역구도 해소와 대타협의 정치를 위해서는 어떤 댓가라도 지불할 생각으로 정치를 해 왔습니다. 동거정부 구상, 대연정 제안, 개헌 주장 등 모두가 이 목표를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대통령의 권력을 거는 것은 결코 패배주의의 결과도 아니고 성급한 성과주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또한 나의 정치역정 전체를 꿰뚫고 분석해 보아야 이해가 될 수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반론으로서의 논리가 부족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떻든 사실은, 패배주의나 성급한 성과주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좀 야박하게 따지는 것 같은 글이 되었습니다. 시비조의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재주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기회가 되면 시비논쟁을 한 번 합시다. 내 생각은, 패배주의라는 해석은 오 기자가 생각을 고쳐주시고, 그리고 나의 다른 약점을 찾읍시다. 더러, 아니 많이 있을 것입니다. 패배주의, 한건주의는 내가 너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시고, 건투하시기 바랍니다.
20007년 10월 12일
대통령 노무현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다음은 '노무현 인물연구 3편' <연정 제안하면 한나라 당황할 줄 알았다, 수류탄 던졌는데 우리 진영서 터져버려> 에서 오연호 기자가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시도를 분석하면서 '패배주의'와 '성급한 성과주의'라고 해석한 부분.
이렇게 대통령이 "일찌감치 가지고 있었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구상"은 노무현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될 때부터 정국주도 측면에서 자신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지자들은 '화끈하게 한번 해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을 때, 그는 "도저히 당을 수습해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2004년 총선에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내 한 몸 바쳐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보자'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중략)
그런데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패배주의'를 지지자들이 거부해버렸다. 지지자들은 탄핵역풍을 만들어내면서 4·15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인 제1당으로 만들어버렸다.
(중략)
결국 준비 안된, 무모한 그 점프(대연정 시도)는 실패했다. 노 대통령의 "뼈아픈 실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의 대연정 시도는 패배주의와 승부사적 기질이 동전의 양면처럼 합쳐진 것 같았다. 서로 다른 두 이질적 요소의 결합이 만들어낸 대도박, 그래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찍었던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시도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략)
노 대통령은 너무 많은 것을 얻고자 했다. "역사의 한 매듭을 확실하게 짓고자"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 무엇에 동의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충분히 상의하지 않는, 성급한 패배주의'였다.
그래서 국민은, 지지자들은 역사에 남을 '큰 승부 한판'을 벌이겠다고 나선 대통령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않았다. 이해 못한 것이 아니라, 이해를 거부한 것이다. 큰 권력(시민사회)이 작은 권력(대통령)의 성급한 성과주의에 '정신 차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