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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에는 한기가 느껴진다. 가을이 깊숙이 들어왔나 보다. 아침저녁으로 느끼는 싸늘한 기운에서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상강(24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찬 서리가 내릴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아침 식탁, 아내가 간밤에 끓인 시래기 된장국이 주인공이다. 국물을 한입 떠먹어보는데 속이 시원하다. 어제 술을 한잔 한지라 그 맛이 더욱 좋다. 밥 한 공기를 국에 말아 후루룩 먹었다. 시세말로 죽여준다는 맛이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뜨끈한 국 한 그릇으로 이렇게 맛있는 식사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달게 먹는 나를 아내가 빤히 쳐다본다.

 

"여보, 된장국에 들깨를 갈아 넣으니까 맛이 더 있지?"
"그래 걸쭉해서 좋네! 시래깃국에 이런 맛이 있었나?"

 

배추시래기에 된장을 풀고, 들깨를 갈아 넣어 만든 된장국이 색다르다. 이마에서 땀이 다 난다. 속이 든든하니 머리까지 맑아지는 것 같다.

 

맛나게 먹은 것은 나인데 자기 배가 부른 것처럼 아내 얼굴이 밝다. 음식을 만든 사람은 그것을 맛있게 먹어줄 때 신이 나는 모양이다. 아내 표정에서 그런 것을 읽을 수 있다.

 

사실, 볼품없는 배추가 이렇게 맛있는 된장국으로 변신할 줄이야! 버려도 아깝지 않을 시래기를 삶아 된장국을 끓이니 훌륭한 음식이 되었다. 뭐든 하찮은 것이라도 임자를 만나면 소중한 것으로 변화되는 이치가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올 김장 배추는 왜 이러지?

 

요즘 우리 채마밭을 둘러보면 무척 속이 상한다. 올 김장농사는 예년에 비해 형편없다. 무는 어느 정도 자라 제 구실을 할 것 같은데 배추가 심상찮다. 정성이 부족해서일까? 뿌리가 썩는지 비실비실 말라죽는데 속수무책이다.

 

말라 죽은 곳에는 이빨이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 있다. 살아남은 것도 벌레들이 잔치를 하여 구멍을 숭숭 뚫어놓아 말이 아니다. 이제 속이 들어찰 때가 되었는데도 별로이다.

 

사람 마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 작물이 예쁘게 자랄 땐 뻔질나게 밭에 들락거린다. 적당히 솎아도 주고, 풀도 뽑아준다. 또 벌레가 끼지 않도록 온갖 정성을 다한다. 그런데 볼품없이 자랄 때는 발길이 뜸해진다. 그러다 보니 풀이 주인 노릇을 하고, 벌레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칠 수밖에. 지금 채마밭이 딱 그런 형국이다.

 

어제는 며칠만에 아내와 함께 채마밭에 나왔다.

 

"올 김장은 배추를 사다 담가야 할 것 같아."
"그러게 말이에요. 뭐가 잘 못 되었을까?"
"우리뿐이 아냐! 옆집도 그러던데."
"그래요? 장에 나가보면 배추값이 금값이던데 이유가 있네요."

 

올 김장 채소 작황이 예년만 못한 것은 내나 없는 것 같다. 상추를 비롯한 채소값이 치솟고 있다고 한다. 잦은 비에다 흐린 날이 많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올핸 무름병 같은 병까지 돌고 있어 품질도 떨어졌다.

 

아내가 볼품없이 축 처진 배추 몇 포기를 뽑아냈다.

 

"당신, 그걸 뽑아서 뭐하게?"
"뭐하기는 요. 삶아 시래깃국 끓이죠."
"겉절이는 안 되겠지?"
"다듬어 놓으면 뭐가 남겠어요."

 

아내는 시래기로 쓰면 좋겠다며 버리는 것 없이 삶았다. 겉절이 감은 되지 못해도 시래기로 이용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지혜가 담긴 소중한 먹을거리, 시래기

 

사실, 시래기가 하찮아 보이지만 예전 먹을거리가 귀할 때는 시래기도 얼마나 소중했던가?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김장하고 허드레로 남은 시래기를 짚으로 줄줄이 엮어 겨우내 요긴한 반찬거리로 썼다.

 

아내가 시래기를 삶다가 예전 일이 생각났는지 내게 물었다.

 

"당신, 시래기밥 먹어봤어요?"
"그럼, 시래기로 죽도 쑤고, 밥도 해먹었지."

 

지금이야 먹을 게 남아돌아 음식 귀한 것 모른다. 정말 어려웠던 시절에는 곡식에 시래기를 넣어 죽도 쑤고, 밥도 해먹었다. 한 톨의 쌀을 아끼기 위해 시래기도 귀한 식량으로 여겼다.

 

요즘 아이들한테 예전 시래기죽을 먹었던 얘기를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맛있는 것이 많은데 왜 그런 것을 먹었을까 의아해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

 

식량을 아끼기 위해 시래기도 소중했지만, 사실 시래기는 겨울철에 야채를 저장해 먹는 측면에서 귀한 먹을거리였다. 나물로 무쳐먹어도 좋고, 된장국을 끓여도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예전 시래기를 이용한 음식 가운데 잊히지 않는 게 있다. 시래기를 넣어 붕어를 지져 먹었던 맛이다. 초겨울 살얼음 살짝 얼 무렵, 시래기를 냄비 바닥에 깔고, 자잘한 붕어를 넣어 양념장을 하여 졸여 먹었다. 물을 잘박하게 부어 매콤하게 끓이면 붕어 맛도 맛이지만 시래기 맛이 더 좋았다.

 

시래기는 겨울철 비타민과 철분을 섭취할 수 있는 지혜가 담긴 소중한 먹을거리임에 틀림없다.

 

시래기 된장국이 들깨와 만나면

 

아내는 나물을 무칠 때나 탕을 끓일 때 들깨를 갈아 넣는다. 마른 나물을 불려 무칠 때, 들깨를 갈아 잘박하게 무친다. 영양덩어리인 들깨를 섭취하고,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서다. 시래기 된장국에도 들깨를 갈아 넣는다. 예전 친정어머니한테 배운 실력이란다.

 

아내가 능숙한 솜씨를 발휘한다.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들인다.

 

잘근잘근 시래기를 써는 것부터 일을 시작한다. 시래기에 풋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된장과 함께 무쳐낸다. 들깨는 믹서로 간 뒤, 체로 걸러서 준비한다. 쌀뜨물을 자박하게 부어 잔멸치를 넣고 양념한 시래기를 끓인다. 그런 뒤 국물이 끓어오르면 들깨 간 것을 넣어 한소끔 끊여낸다.

 

국은 맛도 맛이지만 끓는 냄새로 식욕을 돋우기도 한다. 된장국의 구수한 냄새가 주방 가득하다. 들깨를 갈아 넣어 고소한 맛까지 더해진다. 시래기 된장국이지만 이보다 좋은 식탁이 있을까?

 

아내의 마음이 담긴 소박한 국 한 그릇으로 예전 어머니 손맛을 다시 맛본 느낌이다. 아침까지 남아 있던 숙취도 확 달아난 것 같다.

 


태그:#시래기 된장국, #시래기, #시래기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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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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