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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 위의 초소형 교회. 폐허가 된지 오래다. 오늘 귀신소동의 배경이 되는 장소.
사막 위의 초소형 교회. 폐허가 된지 오래다. 오늘 귀신소동의 배경이 되는 장소. ⓒ 문종성
"좋은 아침이에요, 갈렙."
"별로에요."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후후후. 실라, 내가 할 말이 없어요, 정말."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 있는 나에게 스스로 꿀밤이라고 주고 싶은 게 지금 심정.

이곳은 애리조나 주에서 네바다 주를 넘나드는 93번 도로 위 모하비(Mohave) 카운티의 작은 타운. 사막지역이라 마을 사람들은 100여 명도 채 안 되고 거의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들르면서 마을의 경제에 보탬이 되고 있는 형국이다.

나 역시 후버댐으로 가는 유일한 93번 도로를 타고 어제(9월12일) 저녁 중간 기착지인 이곳에 도착했다. 간밤엔 주인 없는 교회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마을에서 하나뿐인 레스토랑을 찾았다.

지난밤 이미 안면을 트고 저녁 식사 대접까지 받았기에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레스토랑 주인인 실라(Sheila)는 어제와 다른 지쳐있는 얼굴의 나를 보더니 뭔가 위로하고 싶은 모양이다.

"갈렙, 일단 아침부터 먹고 얘기나 듣죠."

손님들이 밀려드는 바쁜 블랙퍼스트 타임에도 실라는 나를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연속되는 실책으로 평정심을 잃은 투수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거리는 코치처럼. 잠시 후 그녀가 건네준 스크램블 에그와 토스트, 그리고 베이컨으로 맛난 아침 식사를 하면서 그나마 쓰린 속을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아침은 먹지 않았어야 옳았다. 먹을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야간주행 대신 선택한 새벽주행, 그러나...

 레스토랑 주인인 실라(왼쪽)와 그의 동료.
레스토랑 주인인 실라(왼쪽)와 그의 동료. ⓒ 문종성

"어? 뭐야? 자넨?"
"푸하하, 이런 세상에! 나에요. 반가워요."

"이게 어찌된 영문이야?"
"아, 일단은 나 지금 죽을 것 같아요. 안에서 좀 쉴게요."

110km에 이르는 93번 도로에는 유일하게 미국 경찰초소가 딱 한 곳이 있다. 그나마도 RV(캠핑카)와 천막으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임시초소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막에서 상주하며 열렬히 임무에 임하려는 경찰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답 듣기에도 이미 진이 빠진 나는 경찰이 쉬는 천막에 무턱대고 들어가 자리를 잡아버렸다. 하지만 이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경찰들과 나 사이에 감정적 연대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초소 앞에서 근무서고 있는 경찰. 나를 두 번 보고는 어안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초소 앞에서 근무서고 있는 경찰. 나를 두 번 보고는 어안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 문종성
"일단 물부터 마셔. 그리고 여기 천막은 덥기도 하고 경찰들이 수시로 드나드니 차라리 저기 RV안에서 쉬라구.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니까 더 괜찮을꺼야."

친절한 경찰들은 아직 영문도 모른 채 일단 기진맥진해 있는 나를 최대한 편하게 대해 주었다. 10만근짜리 몸을 움직여 RV에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사막의 심장으로부터 꺼내들어 영혼까지 맑게 하는 것만 같다.

자비의 나라 미국에서 다 죽어가는 형제를 어찌 가만 내버려 둘 수가 있겠는가. 교대 때마다 들어오는 경찰들은 병든 닭마냥 축 늘어진 나에게 에너지 회복을 위해 세심히 배려해 준다. 이런 원칙과 포용의 황금비율로 근무하는 경찰들은 당장 미 경찰청에 강력청원을 해 양질의 복지혜택을 줘야 한다는 입장이다(설마 사고치고 여기에 온 건 아니겠지?). 태양을 피해 먹고 쉬고, 시원한 바람 쐬며 먹고 자고, 원기 회복!

"아니, 그런데 대관절 어떻게 된거야?"
잠시 휴식을 위해 RV에 들어온 경찰들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경위를 물어본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제 오늘의 사건을 들려줘야 할 시간이다.

사실 애리조나부터 쭉 이어진 사막을 지나오며 나름대로 계책을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좋을 때와 좋지 아니할 때를 분별하여 각각의 상황에 대비하여 하거늘, 지금까지 오는 동안 원칙 중심의 여행을 고수하다 보니 급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부대낄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새벽주행. 야간주행은 활력 넘치는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해 최적화된 몸의 리듬을 거스르는 반자연적 발상이다. 또 피곤한 자동차 운전자들이 시야확보와 돌발상황에 대한 반응신경이 급격이 둔화되는 시점에서 그들과 같은 도로를 공유한다는 것은 악어가 득실대는 강에서 카약하겠다는 놀라운 무지함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해서 낮과 밤의 핸디캡을 절묘하게 상쇄시킬 방법은 역시 새벽주행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폐허교회에 몸을 눕히자 들려온 귀신(?)들의 대화

앞서 언급한대로 어젯밤 아주 작은 교회에서 잤더랬다. 2평도 채 안 되는 좁은 예배실. 오래 전 예배는 끊기고 이젠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져있는 폐허로 변한 그 성소에서 밤이슬을 피하자는 간 큰 배짱을 부려본 것이다. 실제가 없으면서도 을씨년스러운 공포를 느끼게 하는 우중충한 공간. 어차피 누울 자리도 없는 노마드에게 이정도면 감지덕지 아닌가. 피곤함이 두려움을 밀어낼거란 기대로 결국 짐을 풀었다.

 93번 도로 중간쯤에 위치한 제대로 된 거의 유일한 레스토랑.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허기를 달랜 뒤 다시 사막 속으로 들어간다.
93번 도로 중간쯤에 위치한 제대로 된 거의 유일한 레스토랑.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허기를 달랜 뒤 다시 사막 속으로 들어간다. ⓒ 문종성

20대 젊은 혈기의 남정네라도 혼자란 때론 두려운 고독의 랩소디. 의자 3개를 이어 잠을 청하는데 워낙 낯선 환경이라 쉬이 잠이 오질 않는다. 눈만 씀벅이다 이런저런 잡념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다 보니 어느 새 내 영혼은 안식을 향해 가고….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음성은 점점 또렷이 내 고막을 울리고 내 머리를 혼란시키며 내 가슴을 쿵쾅쿵쾅 떨리게 만들었다. 별안간 피곤은 확 달아나고 음성이 선명해질수록 의식 또한 그러해져 왔다.

'아, 구천을 떠도는 영혼인가. 그냥 적당히 텐트나 치고 잘 걸. 하필 혼자 있을 때…. 이런 얘기 누가 해 줘도 안 믿을 텐데. 어쩐지 폐허 교회에서 하룻밤 잔다는 게 영 꺼림칙하더라구.'

현실이 가정(if)을 끄집어내는 이면에는 후회의 감정이 숨어있다. 가위 눌린 상태는 아니었지만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옛날 이불 뒤집어쓰며 읽던 공포 이야기처럼 내가 천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마치 거짓말처럼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하는 잠시 잠깐의 두려움. 소리는 마치 재잘재잘 영혼들의 대화와도 같았다. 신기한 건 미국이라서 그런지 그네들도 영어 비슷하게 대화하는 듯 보인다는 것.

"저 친구가 자전거 타고 여기까지 온 녀석이군. 여기가 어딘 줄 알기나 하고 온 건지 참."
"그러게. 겁도 없이 어딜. 후후, 암튼 대단한 강심장이야. 우리가 있는 곳에 와서 자다니."
"우리 목소리 들리겠지? 그렇담 지금쯤 머리가 쭈뼛해 있을 텐데."
"얘기 듣고 있을껄? 저 봐, 동공이 열려 있어. 의식이 깬 것 같은데. 한 번 놀래켜 줄까나?"
"아서라, 내가 보기에도 별로 강해 보이진 않은 것 같은데 괜히 또 심장마비 걸릴라. 아직 장가도 못 간 청춘인 것 같은데 그냥 고이 보내주자."

마치 이런 대화를 하는 듯했고 자기네들끼리 껄껄거리며 웃는 소리까지 들린다. 몸은 송장처럼 굳어있고 누워만 있는데도 진이 다 빠지는 것 같다.

'내가 몸이 약해지긴 했구나. 환청이 다 들리고. 근데 귀신은… 있긴 있나 봐.'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고?'

 교회 내부. 의자 6개가 들어가면 공간이 꽉 찬다. 이곳에서 의자 3개를 붙여 하룻밤 이슬을 피했다.
교회 내부. 의자 6개가 들어가면 공간이 꽉 찬다. 이곳에서 의자 3개를 붙여 하룻밤 이슬을 피했다. ⓒ 문종성

꿈을 꾸면 항상 그랬다. 몇 차례의 귀신 꿈을 꿀 때마다 원칙 불변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성에서 탈출한 흡혈귀는 다른 사람이 아닌 꼭 내게로만 온다. 그리고 그를 만날 땐 애석하게도 꼭 내 손에 십자가가 없었다. 나는 늘 도망다녀야 했고, 급할 땐 젓가락을 이용해 십자가를 만들거나 양 팔을 벌려 스스로 십자가가 되어야 했다.

다행히 끔찍한 장면이 되기 전에 다음 컷으로 넘어가니 결말은 알 수 없지만 그 살기어린 붉은 광기는 자면서도 몸서리치는 극악공포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기분 째지는 하늘을 나는 꿈과 반대로 깊은 심연으로 추락하는 꿈, 그리고 흡혈귀 꿈이 단골 메뉴 3종 세트다.

강시의 경우 역시 부적도 없었거니와 내가 무술을 할 수 없기에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흡혈귀보단 덜 절박하다. 숨을 쉬지 않는 소극적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혜성처럼 나타나 위기에서 구해주는 영환도사를 언제나 빼꼼히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강시 영화의 대부 임정영의 영화에 골몰하던 어렸을 때 적잖게 꾸었던 꿈.

마지막으로 태어나 질풍노도의 시기에 단 두 번 꾸어본 구미호의 경우는 훨씬 지능적인 접근을 무기로 달려든다. 바로 논란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동급최강의 화려한 미모. 뻔히 귀신인 걸 아는데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매력. 어쩌면 나 스스로 모든 상황을 부정하고 벗어나기 싫은 건지도.

그녀는 마치 만개의 촛불을 켜 놓은 듯한 낭만적인 감성 터치로 내 앞에 등장한다. 그리고 백만 송이의 장미보다 더 진한 향기로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나도 모르게 품에 안기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일억 개의 별이 쏟아질 것만 같은 은은하고 맑은 그녀의 눈빛에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 새 내 양기는 다 빨려 들어가고 그만 마음까지 모두 줘 버리게 된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그녀에게 난 이미 거추장스러운 버림받은 몸일 뿐. 이 상황에선 비련의 남주인공이라도 사치스런 타이틀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사태(?)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또다른 순수 총각(!)을 찾아 떠난다. 아무 미련 없이. 마지막 내 자존심까지 처참히 짓밟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후론 지금까지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다. 귀신치고는 전혀 공포가 없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 아마도 사춘기 시절이니 가능했던 로맨스의 왜곡된 분출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꿈이 아닌 것이다. 분명 의식이 있는데도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있었다. 5분여의 시간이 참으로 길게도 느껴진다. 눈만 굴리면서 어떡할까 고민하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고?' 생각에 엿보다도 굳어진 몸을 겨우 비틀어 좌우상하를 살펴봤다. 역시나 별 일이 없다. 일단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귀신? 후훗~ 내 앞에 나타나 보지 그러셔?"

 새벽 4시에 하늘의 달과 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을 주행하며.
새벽 4시에 하늘의 달과 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을 주행하며. ⓒ 문종성

그렇다면 소리의 진원지는 어딜까? 미간을 찌푸린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좁은 공간이라서 그런지 얼마간은 소리의 정체와 진원지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문을 열어 희미하게 비치는 빛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서 10m 정도 떨어진 이동주택에서 누군가 TV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내 귀에 나풀거리던 가납사니의 정체는 바로 TV시트콤의 가십들이었던 것이다. 그 소리가 문틈 새로 들어와 그럴듯한 억측을 낳게 만든 것이다. 한편으론 어이없기도 하고, 괜한 망상으로 몸서리쳤던 스스로가 웃기기도 하고. 다 큰 어른이 창피하게.

"귀신? 후훗~ 내 앞에 나타나 보지 그러셔? 내가 말이야 니들이 무서워서 그런게 절대 아니라 내가 귀신한테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어요(이겨본 적도 없긴 하지만). 니들 내 앞에 나타났음 이미 끝났거든?"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어느 샌가 헐레벌떡 몸맨두리를 고치고 허겁지겁 짐을 꾸리는 내 모습. 자리도 자리지만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난 새벽 4시임에도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마쳤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다. 어쨌거나 새벽주행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니 말이다.

사막은 말이지, 그렇다. 꽃이 진다고 그녀를 잊은 적 없는 듯 아무것도 없다고 가슴에 남겨지는 것조차 없는 건 아닌 곳이다. 미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충만한 모험심, 그리고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아 태양이 아닌 누군가에게로 날아갈 수 있는 로맨스를 갖췄다면 사막은 최고의 여행지가 된다. 새벽녘에 달은 은근한 친구 같고 별은 지나간 사랑이 되어 가슴속으로 뭉글하게 뿌려 내린다. 이것이 사막이다. 이제 간밤의 촐싹무드는 떨쳐 내고 신선한 바람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도록 후버 댐을 향해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각에 달리는 사막 라이딩. 아마도 극히 소수만 누려봤을 환타지적인 이 경험을 도대체 어떻게 말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참으로 신기하다. 어둠 사이로 질주하는 전진은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 자리에 그대로인 것만 같다.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 그저 머리 위에 미동도 하지 않는 별들을 보며 내가 앞으로 가고 있기나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만큼 모든 건 어둠 그 뿐이다. 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전혀 구별이 되질 않는다(참고로 자전거 헤드라이트가 없다).

이때는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어 온 몸으로 초음파 에너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도로 위에 널려진 이물질 위를 밟고 지나가는 것도 다반사. 행여나 내리막길에 만난 장애물의 부피가 조금 크다 싶으면 자전거가 심하게 휘청 거린다. 덩달아 내 심장도 갈비뼈에 붙을 정도로 철썩 밀려갔다 밀려온다.

그런데 별들이 이제 하나 둘 불을 끄고 달님의 미소도 옅어질 때쯤 더욱 더 놀라운 풍경이 목도된다. 새벽 안개가 음울하게 걸쳐진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길은 마치 황천길을 달리는 양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진한 적갈색의 땅으로부터 눅진한 불쾌감이 스쳐간 자리에는 미처 완성되지 못한 진혼곡이 남아 들려오는 듯하다. 시각의 촉각화를 거쳐 청각화로 이르는 공감각적 심상이 온 몸을 휘감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사막이다.

후버 댐에 도착, 그런데 아뿔싸!

 아침이 밝은 후 사막 풍경. 새벽에 달릴 때는 황천길 가는 듯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아침이 밝은 후 사막 풍경. 새벽에 달릴 때는 황천길 가는 듯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 문종성

새벽 6시 경. 검문 중인 경찰과 마주쳤다. 눈웃음으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한 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후버 댐(Hoover Dam). 미국 프론티어의 상징이자 최근 영화 트랜스포머 촬영지로 또 한 번 이목을 집중시킨 후버댐의 기술응집의 토목건축역사를 바라보자니 인문학도의 머리에 쥐만 난다.

콜로라도강 하류의 홍수 방지를 위해 건설됐다고는 하지만 그보다 뉴욕 증시 폭락이 부른 대공황 타개를 위해 당시 총 공사비 1억 6500만달러와 연인원 5000여명을 투입해 5년 만에 완공했다는 다목적 댐인 후버댐. 댐의 두께만 해도 200m에 이르고 높이는 221.4m, 폭발로 부서진 바위는 900만톤으로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는 양이며, 댐에 사용된 콘크리트는 LA에서 플로리다 마이애미까지 왕복 2차선을 놓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짐작가질 않는다. 거기에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네온사인도 후버댐에서 비롯되는데 수치상으로 계산할 수 힘든 수력발전의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후버는 경제 성장과 위기타파에만 골몰한 나머지 도덕성 타락에 대해 눈가리는 정책을 허용했다. 이를테면 고된 노동으로 낙이 없는 인부들과 무료한 그 가족들이 즐기기 위한 도박과 매춘 등의 유흥시설을 만들었고, 결국 그것이 매춘을 합법화하는 법률로 정착되어 신랄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더라도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에 눈을 감아준 후버에 대해 지금까지도 비호감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니 노예제 찬성파를 비추어 보면 역사의식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또한 후버댐 건설로 인해 주변에 세계 최대 인공 호수인 레이크 미드가 탄생한 것과 더불어 라스베가스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전기를 공급하고, 홍수나 가뭄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극심한 환경파괴에 대해 한번쯤은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든다.

후버댐은 그 자체가 훌륭한 관광수입까지 겸하고 있으니 일단은 경제적 면에서는 성공작이라 평할 수 있지만 글쎄, 현재까지도 막대한 예산을 들여가며 보강 공사에 여념이 없는 요란한 현대기술의 보고에 대한 공명정대한 평가는 후대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모순과 결함이 어쩌면 상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분실한 안경에 남아 있는 새벽의 주책소동

 미국 근현대건축사의 한 획을 그은 후버댐.
미국 근현대건축사의 한 획을 그은 후버댐. ⓒ 문종성

이렇게 건축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있고 숱한 화제와 무성한 뒷말을 남긴 위대한 건축물 앞에서 넋이 나간 채로 감상하다가 문득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감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었다. 실존적인 뭔가가 분명 빠져있는 그런 느낌.

뭘까? 뭐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을 가둬놓은 후버댐을 바라보며 맹숭하게 서 있다가 별안간 스치는 불길한 예감. 으악! 내 안경! 어쩐지 세상을 아무 장애없이 시원하게 바라본다고 했더니 콧대에 걸치고 있어야 할 안경이 없는 것이다.

아차, 어제 바로 그 교회에 두고 온 모양이다. 귀신소동으로 급히 서둘렀기에 안경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에헤라디여, 자진 방아를 돌려라.' 자책하면 뭐하겠냐란 생각에 하릴 없이 그저 후버댐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머릿 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50km를 다시 돌아가 안경을 찾을 것인가, 귀찮은데 포기하고 다음 도시에서 새로 안경을 구입할 것인가. 하지만 지갑 사정을 보니 고민할 것도 없이 몸으로 때워야 할 팔자다.

 낮에 다시 돌아와 찾은 안경. 당시 정신없던 상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낮에 다시 돌아와 찾은 안경. 당시 정신없던 상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 문종성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가긴 그렇고 자전거와 함께 히치바이킹을 시도해 마을로 돌아왔다. 그 때가 오전 9시. 교회에 가 보니 어젯밤 의자 위에 올려놓은 안경이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손에 쥐는 순간 풋웃음이 난다. 분실한 안경에는 새벽 주책소동의 잔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나온 길에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자초지종을 듣던 실라는 내 처절한 얘기를 듣더니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음식 값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사막에서 꼭 필요한 귀한 물을 생수통에 가득 담아주었다. 그렇게 다시 길을 돌아왔던 것이다.

"저런, 그랬군, 갈렙. 그럼 후버댐에서 다시 온 거야?"
"아뇨, 그러니깐 새벽에 자전거로 후버댐에 들렀다가 다시 차를 타고 마을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이곳까지 자전거로 온 거죠. 그리고 또 가야죠. 후버댐으로.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생긋 웃으며 설명하는 나를 보던 경찰들은 지독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투를 빌어준다. 차를 잡아주겠다는 호의를 정중히 거절한 채 완만하게 해가 기울었을 때 다시 안장 위에 올랐다. 올 때는 차를 이용해 왔지만 갈 때는 똑같은 길을 다시 주행한 터였다. 새벽길과 낮길은 분명 차이가 있을 꺼란 생각에 말이다.

새벽의 로맨틱하고도 기묘한 사막길을 달리다가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하는 낮에 다시 같은 길을 반복해 가니 실은 죽을 맛이었다. 그림자 한 점 없는 땅에 내가 기댈만한 곳은 전혀 없었다. 헉헉대며 겨우 후버댐에 도착하자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오늘만 두 번째 도착한 후버댐. 그리고 또 멍하니 후버댐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도움'은 삶 그 자체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두 번째 방문한 후버댐에서 후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세 사람 모두 서로 안면이 없는 사이.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두 번째 방문한 후버댐에서 후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세 사람 모두 서로 안면이 없는 사이. ⓒ 문종성


순간 갑자기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이것저것 묻고서는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도 하나 둘 와서 함께 사진을 찍을 것을 제안해왔다. 다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포즈를 취했을 뿐인데…. 한 남자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도네이션을 하는 거였다. 고생이 많다는 이유로. 이것을 본 다른 관광객들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저마다 사명감에 사로잡혔는지 지갑을 꺼내든 것이다.

액수는 많지 않았지만 집단 도네이션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학교 교육을 어떻게 배웠길래, 부모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자랐기에 이렇게 너른 마음으로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까지 느끼면서 내린 결론은 그들에게 도움이라는 건 순간의 특별한 배려나 친절이 아닌 삶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일면 개인주의나 가족주의가 강해 보이지만 자신의 범주 안에 들어온 사람을 또다른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여유와 관용. 나만 잘 되면 되는 게 아니라 옆에 사람이 잘 되고 있는지도 궁금해 하며 풍요의 심리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들. 하여간 못말리는 미국인들이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라스베가스 쪽으로요."
"라스베가스! 그래요? 거기 정말 죽이죠. 음, 그래도 거긴 그냥 지나가세요. 오래 머물다간 아마 당신도 모르는 사이 여행이 끝날 지도 모르니깐요."
"전 도박 같은 건 모르는데요?"
"원래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빠져드는 법이죠. 혹시 잭팟 터트리면 잊지 말고 연락해요 꼭!"

귀신소동으로 안경을 잃어버리고 다시 찾으러 갔다 오는 길에 죽을 둥 살 둥 고생했지만 덕분에 여러 개의 특별한 감사를 찾을 수 있었던 후버댐 가는 길의 하루. 그렇게 그곳에서 관광객들의 유쾌한 조크를 뒤로한 채 천천히 네바다 주 경계를 지나 라스베가스로 넘어갔다. 도무지 확률없는 잭팟의 환상이 99%의 근거없는 확신으로 머릿 속을 가득메운 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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