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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크게 세 가지 문제를 3부로 나누어 다루고자 한다. 10월초 평양에서 열린 노무현-김정일 제2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평가와 전망, 한미 동맹의 현주소와 앞으로 전개될 이정표(road map), 그리고 지난 2·13 베이징 합의 이후의 6자 회담 진전 상황의 점검, 특히 5개 실무 협의기구의 하나인 동북아 평화 기구의 진로가 그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이제 2개월 남짓 남아 있고, 미국도 벌써부터 2008년 대통령 선거 열기가 뜨거운 상황에서 우리 외교의 새로운 좌표와 청사진을 짚어보는 것은 한미 정권 말기에 흔히 반복되는 전략 부재나 혼미, 정책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필자가 최근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방미 기간 중의 활동을 현장에서 실제로 목격한 것을 내 나름대로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바로 한국외교의 새 좌표와 지평을 열고 넓히는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고 필자는 믿기 때문에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다.
 
따라서 1, 2, 3부를 각각 시간·변화, 공간·통합, 사람·비전이라는 순서로 남북관계, 한미동맹, 그리고 동북아 평화 공동체 구상을 엮어 보고자 한다. <필자 주>
 
 

 

한마디로 좋은 정치는 방향성과 통합성이다. 거꾸로, 나쁜 정치는 지도자가 나라라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할지도 모른 채 허둥대고, 국민의 분열과 분란만을 부추기는 혼란상황이다. 국민에게 비전 있는 지도자는 행운이지만, 비전 없는 지도자는 재앙이다.

 

필자는 지난 달 12박 13일(9월 17일-9월 29일)로 김대중(DJ) 전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방미, 대통령 재직 시에 못지않은 DJ의 활동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솔직히 좋은 의미에서 필자를 놀라게 한 사실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DJ가 만난 분들이나 행사 참여 활동 상황은 단편적으로나마 이미 보도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몇 가지 에피소드만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DJ의 불요불굴의 의지와 집념이다. 그는 건강하시지만 거의 하루 걸러 투석을 하는 시간적, 신체적 제약조건에 있으면서도 왕성한 장년이 부끄러울 정도로 빽빽한 일정을 거뜬히 소화하는 것이 놀라웠다. 

 

그의 세계평화와 조국 통일에 대한 종교적 신념, 매사에 대한 긍정적 사고와 낙관적 전망,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열린 사회에 대한 투철한 인식, 한반도를 뛰어 넘어 동북아, 나아가서는 전 지구적 인류 공존, 공영에 대한 비전을 필자의 머리와 가슴속에 다시 한번 각인하는 좋은 기회였다.

 

"역사적 인물", "역사의 승자", "당신은 나의 영웅", "아시아의 만델라" 등 방미 기간 중 DJ에게 쏟아진 수많은 찬사나 경의의 표시보다는 필자의 머리 속에는 다음 몇 마디 이야기들이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 "DJ는 국민속에서 권력 쟁취한 지도자" 

 

첫째는 뉴욕 코리아 소사이어티 DJ 오찬 연설 소개자로 나온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 인사말 한 구절이다. 2차 대전 뒤 아시아에서 반세기를 산 그가 아시아의 정치가로 중국의 덩시아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한국의 김대중 세 사람을 꼽았다. 그러나 덩과 리는 권력 속에서 이룩한 지도자지만, 김대중은 권력 밖에서 국민 속에 들어가서 권력을 쟁취한 민주 지도자라는 것이다.

 

권력이 총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국민 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으나 한편 훨씬 값지다는 얘기다. 그레그의 평가는 민주정치 투사로, 조국 평화통일의 선구자적 기수로서의 DJ의 반세기에 걸친 파란만장한 각고의 인생—-영욕과 명암-—을 함축하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비슷한 평가를 미 상원원내 총무였고 주일본 미 대사를 12년간 지낸 고(故) 마이크 맨스필드로 부터도 그의 생전에 필자가 직접들은 일이 있어서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남북철도 연결 운행, 일본과 한반도의 해저 철도 구상, 부산과 목포에서 시베리아, 우랄산맥을 거쳐 파리, 런던까지 동아시아의 물류와 경제적, 인적 문화적 교류의 새 시대를 잇고 여는 이른 바 DJ의 ‘철의 실크로드’ 비전을 상원 중진의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역설하는 것을 듣고, 워싱턴에 살 때 가까운 이웃이었던 다이안 파인슈타인 상원의원이 귓속말로 필자에게 "저런 지구적 비전의 지도자를 둔 당신과 한국 국민은 행복하다"고 말한 것도 생생하다.

 

과거 협상 행태와 2·13합의는 다르다

 

파월 전 국무장관 면담에서 북한과 미국이 이제 대화와 협상을 시작했는데 만약 북한이 실질적인 진전이나 북 핵 불능화 등 예상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고 또다시 머뭇거린다면 어떨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DJ는 북한은 진정으로 북미관계 정상화를 바라고 있고, 특히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아들 김정일의 의미를 되씹어 볼 필요가 있으며, 더구나 2.13 합의로 이제는 '행동대 행동'이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북한의 핵 불능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한 북에 대한 안전보장, 대북 경제제제 해제, 국교 정상화 등이 맞물려 움직이기 때문에 크게 염려할 것 없다는 것이 DJ의 해답이었다.

 

 

키신저도 북한의 과거 협상전략이 조금씩 양보하는 척하며 시간을 끄는데, 지나고 보면 시간만 끌었지 실질적 진전은 거의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 2.13합의 협상도 그와 같은 과거협상 행태와 크게 다를 게 없지 않느냐는 회의적인 질문을 던졌다.

 

DJ는 과거 협상과 현재 진행중인 협상이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르다고 답했다. 이제는 행동대 행동 원칙에 따라 북한이 조금 내놓으면, 상대방도 조금 내놓고, 북이 많이 실천하면, 상대방도 많이 실천하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거와는 달리 북한의 불이행에 대한 제제조치가 비단 미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북한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고 동북아 핵 경쟁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중국과 러시아도 이제는 제제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다. 그 구체적 증거로 2006년 10월 9일 북한 지하 핵실험으로 유엔 안보리가 '대북 경제제제 결의안(UNSCR 1718)'을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 만장일치로 통과한 사례를 들 수도 있지 않는가.

 

중국의 국내문제가 더 심각 할 수도

 

DJ와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의 중국에 대한 논의도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국은 앞으로 국내문제의 슬기로운 타개가 경제적, 군사적 급부상으로 인한 주변국이나 미국을 포함한 열강들에게 주는 대외적 안보차원의 우려나 위협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관료 등 지배층 부정부패나 날로 증가하는 사회적 갈등현상을 극복하는 해결책을 둘러싼 현 중국 공산당 지도체제 내에서의 논쟁이다. 즉 과거 공산당 체제로 되돌아가 통제를 다시 강화해야 한다는 복고주의적 신좌파와 오히려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개혁에 박차를 더 가해야 한다는 신우파와의 상반된 정책의 최종 향방도 관심을 끌었다. 15일 개막한 중국 공산당 17기 전국대회의 결과와 연결되는 대목이다.

 

또 독일과 일본의 근본적인 차이는 독일은 나치 정권 만행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전후 세대 국민교육이 실시되어온 반면, 일본은 아직도 군국주의 일제 만행을 은폐, 두둔, 심지어 정당화, 합리화하는 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깊은 우려도 거론됐다. 일본도 자국의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 교육부터 실시하는 것이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한국과 미국은 이제 명실공히 민주주의, 시장 경제, 동북아 평화안보에 대한 공동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국 통일의 평화적, 단계적 추진, 중국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민주화와 경제 협력에 동참하는 것이 한미 양국의 국익에 일치한다고 보았다.

 

미국의 현 경제위기는 누가?

 

한국이 IMF 금융위기가 닥쳤을 당시 클린턴 정부 재무장관인 현 시티그룹 로버트 루빈 회장과 데이비드 립튼 당시 재무차관과의 접견자리에서, DJ는 미국의 도움에 감사하고, 루빈 장관은 DJ의 지도력에 대한 깊은 경의를 표했다. 이 자리에서 루빈이 던진 한 마디가 필자에겐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한국은 미국이나 IMF같은 국제 금융기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었기에 천만다행이었지만, 미국이 현재 겪고 있는 제반 경제 어려움을 타개해 나가는 데는 원군(援軍)도 그런 국제 금융기구도 없는 것이 미국의 딜레마라는 그의 우려 섞인 한마디가 무언가 심각하고 심상치 않구나 하는 무거운 느낌을 안겨주었다. 이른바 서브프라임 사태의 심각성에 관한 그의 우려인지, 이라크 전쟁, 아프간 전쟁 등으로 인한 현 부시 정부의 막대한 군사비 증가, 누적된 만성 재정적자, 무역적자, 심각한 달러화 약세 등을 염두에 둔 독백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이스라엘 시리아 폭격설 깜짝 소동

 

 

둘째로 방미 기간 중 DJ의 눈길을 직간접적으로 끄는 두 개의 뉴스가 있었다. 하나는 같은 달 9월 6일 중동 시리아 북동부의 북한과 연루된 핵무기 시설을 이스라엘의 공군기가 폭파했다는 보도가 9월 20자 <워싱턴 포스트> 사설로 시작, 팍스 방송 등 미 매체의 헤드라인 뉴스가 되는 깜작 소동이 있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烏飛梨落)는 우리 속담처럼, 꼭 우연만은 아닌 것 같은 이 뉴스는 미국 정부가 공식 코멘트를 유보했고, 북한 김계관 6자회담 대표는 "미친 소리"라고 까지 북한 연류를 부인했다. 마델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접견 때나 다른 공개회의, 비공개 고위 인사와의 만남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됐다. 

 

이른바 네오 콘의 작품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우리나라 일부 언론의 소행같이, 미국의 일부 매체들이 남북 제2차 정상회담을 2주 정도 앞두고, 1차 정상회담의 남측 당사자가 워싱턴에 체류 중인 가운데 나온 해프닝이라 적어도 필자에겐 어딘가 찜찜했다. 

 

미얀마 민-군 유혈 충돌

 

또 하나는 방미 기간 중 미얀마(버마)에서 불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1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반군사 독재 대모를 하고, 이를 유혈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분데빅 전 노르웨이 수상 접견 때를 포함, 이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았다. 

 

DJ는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는 공산 전체주의 국가와 미얀마 같은 권위주의 군사 독재 정권의 인권회복, 자유, 민주정권 쟁취는 접근과 전략이 크게 달라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과거 구소련과 동구권이 유럽 안보협력회의를 통해 1975년 헬싱키 협약(Helsinki Final Act)를 국가 간에 맺어 기본 인권, 교류, 자유여행 등 회복에 힘을 쏟은 것처럼, 북한의 경우는 CSCE 같은 국가간 다국적 협약에 의한 해결이 효과적이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는 과거 군사정권하에서의 한국민처럼 민중의 힘으로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인간적인 아름답고 따듯한 모습

 

 

끝으로, 개인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긴 나날을 보내며 모실 수 있었던 소중하고 귀중한 시간이었다. DJ를 접할 때마다 항상 느끼지만, 그는 망원경처럼 멀리 넓게 세계를, 아시아를,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보시지만, 거꾸로 현미경처럼 세심하고, 섬세하고 주도 면밀한 보기 드문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방미 기간에 클린턴 전 대통령, 3명의 전직 미 국무장관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송민순 외교부장관 등 많은 고위 인사와 안팎의 주요 현안을 놓고 한시도 쉴 새 없이 문자 그대로 고담준론을 나누는 와중에도 그와 함께 어려운 미국 망명시절에 온갖 고초를 겪었던 민주동지들이 로스앤젤스 등 서부에서 까지 각지에서 찾아와 정담을 나누는 정경도 아름다웠다. 

 

그와 함께 비서관으로, 통역관으로 일했던 미국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직원들, 일가친척 들이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찾아와, 그 바쁘신 와중에도 들락날락하며 틈틈이 정담을 나누는 또 다른 두 분의 따뜻한 면모를 보기도 했다. 항상 하느님께 머리 숙여 기도하시고, 식탁에 놓인 냅킨을 언제나 반으로 접어 쓰시는 몸에 밴 절약의 습관도….

덧붙이는 글 | 양성철 기자는 전 주미한국대사를 지냈습니다. 


태그:#김대중, #양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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