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순사건 59주기 합동위령제/보성 보성에서 59년만에 처음으로 여순사건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보성농민회원들이 상여를 메고 읍내를 행진하고 있다.
여순사건 59주기 합동위령제/보성보성에서 59년만에 처음으로 여순사건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보성농민회원들이 상여를 메고 읍내를 행진하고 있다. ⓒ 최경필

19일 오후 2시부터 전남 보성보건소 앞 광장에서 보성지역에서는 59년 만에 처음으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도 500여명의 유족 및 관계자,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2004년 구례행사 이후 중단된 상여 행진으로 시작을 알렸다.

보성농민회원들이 상여를 메고 유족들이 소복을 입은 채 보성읍내를 한시간에 걸쳐 행사장을 출발, 역전광장에서 노제를 지내고 보성읍내를 1시간 30분에 걸쳐 돌며 주민들과 함께 그날의 아픔을 추모했다. 당시 수의와 관도 없이 총살당한 그대로 묻혀야 했던 원혼들의 한을 달래고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한 것.

위령제는 보성향교의 전통의례를 시작으로 불교, 원불교, 기독교 순으로 종교의례를 진행했고 추모식과 추모공연, 씻김굿으로 이어졌다. 행사장에는 여수민예총 여순항쟁미술창작단의 미술작가들이 <역사적 재조명전>이라는 주제로 ‘그날의 아픔’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그림과 시화가 전시되어 행사장을 찾은 유족들과 참석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여순사건 59주기 집중토론회 시민단체 및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순사건 향후 추진사업에 대한 집중적인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여순사건 59주기 집중토론회시민단체 및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순사건 향후 추진사업에 대한 집중적인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 최경필

앞서 지난 17일에는 순천메디팜병원에서 ‘여순사건의 현재적 문제의식과 운동방향’이라는 주제로 시민단체 및 유족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순사건 59주기 쟁점토론회가 열렸다. 내년 60주기를 앞두고 그동안 추진돼온 추모사업에 대한 반성과 민간인학살피해자 접수결과에 따른 여순사건의 재정립을 위한 고민들이 쏟아졌다.

이날 발제자로 참석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 이영일 조사기획관(전 여수지역사회연구소장)은 지난해 11월 마감된 여순사건 피해자 접수사항을 분석한 결과 “여순사건은 전남동부 6개 시군으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남북, 경남 함안까지 21개 지역으로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접수된 1만여 건은 여순사건피해자를 비롯하여 보도연맹사건 피해자, 당시 재소자 피해자까지 포함되는데, 그 중 여순사건만 11%에 해당되는 1100여 건이나 차지한다는 것.

여순사건 피해지역으로 전남 18곳, 전북 2곳, 경남 1곳으로 나타났는데, 이 결과는 여순사건을 재분석해야 할 정도로 의외의 충격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영암 구림학살사건의 경우 월출산으로 숨어든 반군의 활동으로 진압군 1개분대의 병력에 의해 한마을주민 200여명이 학살되었다.

이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14연대 반군 병사들이 출신지역 등 연고지를 중심으로 이동하였거나, 전략적으로 전진 배치시킨 것은 아닌지 학계의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매년 반복되는 추모행사 내용에, 내년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사업과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쟁점토론회와 합동위령제 행사장에서도 이어졌다. 이제 여순사건에 대한 일률적인 추모행사 위주보다는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고 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여순사건 당시 시대적 배경에 따른 사건의 분명한 메시지와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지역에서만 머무는 사업에서 벗어나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항쟁처럼 전 국민이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순사건의 실질적인 피해지역인 전남 동부 6개 시군 주민들에게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이해시켜 동참을 이끌어내야 한다. 아직도 많은 피해자 유족들이 피해접수조차 못하고 숨기고 있는 것은 여순사건이 아직도 ‘반란사건’이라는 70년대 의식에 머물고 있고 금기시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순사건 합동위령제 보성합동위령제 현장. 보성향교에서 전통의례로 원혼들의 넋을 달랬다.
여순사건 합동위령제보성합동위령제 현장. 보성향교에서 전통의례로 원혼들의 넋을 달랬다. ⓒ 최경필

임상열 여순사건 보성유족회장 태어난 지 34일만에 아버지가 반군에 식량을 주었다고(사실은 빼앗긴) 지서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임상열 여순사건 보성유족회장태어난 지 34일만에 아버지가 반군에 식량을 주었다고(사실은 빼앗긴) 지서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 최경필
임상열(60) 여순사건 보성유족회장은 59년 전 세상에 태어난 지 34일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당연히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빛바랜 사진만으로 기억할 뿐이다. 첫 아이였으니, 형제, 자매도 없이 한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음력 12월 4일이 아버지의 제삿날이다. 양력으로는 1949년 1월 4일이다. 10월 19일 새벽 폭동을 일으킨 여수주둔 14연대 봉기군은 21일 오후 4시 무렵에 보성경찰서를 점령했고, 3일 만인 24일 정오 무렵에 진압군이 다시 탈환했다.

겉으로는 3일천하로 끝났지만, 봉기군 잔당들은 인근 산으로 숨어들어 야음을 틈타 경찰관서를 공격하거나, 마을에 내려와 식량 등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군경토벌대가 들어와 봉기군에 식량을 내준 주민들을 색출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식량을 내준 주민들은 인근 지서로 끌려가 봉기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즉결처분 대상감이 되었다.

10월 22일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진압군경에게는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것이다. 1949년 1월 8일 호남지구 헌병사령관이 비작전지구에서 즉결처분을 금지하는 담화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재판절차 없이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진압과정에서도 많이 희생되었지만, 진압이후 봉기군 및 협조자 색출과정에서 죄없는 양민들이 무참히 희생된 것이다. 봉기군 주력부대는 지리산으로 숨어들었지만, 잔당들은 여기저기 산악지대로 숨어 군경토벌대의 소탕작전은 1949년 후반기까지 계속되었다.

임상열 회장은 아버지가 그렇게 죽자, 어머니마저 재혼해버렸고 조부모의 손에 길러졌다. 어린 자식을 두고 재혼해버린 어머니의 원망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깊은 상처로 남았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 마을 어른들과 할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왜 죽었는가. 당시 좌익활동을 했는가.
"아니었다. 시골에서 그냥 농사짓고 평범하게 살았다. (당시 잔당들이 야간에 민가로 들어와) 곡식을 빼앗아 가거나, 음식을 요구했는데, 경찰은 (그런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조건 (봉기군 잔당들에게) 협조한 것으로 상부에 보고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같은 마을주민들 8명이 꽁꽁 묶여 득량지서(파출소)로 끌려갔고 집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총살당한 장소는 알고 있는가.
"득량지서 앞 200m지점에 배나무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 과수원 옆 도로에 줄지어 세워놓고 총살시킨 것으로 들었다."

-사체는 어떻게 수습했는가.
"당시 추운 겨울이라서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총살당한 현장을 찾아가보니 시신이 동태처럼 꽁꽁 얼어붙어 옷도 갈아입히지 못하고 그대로 부근에 묻었다. 내가 살림(결혼)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하기 위해 무덤을 파보니 옷에서 총알이 나왔다. 다시 옷을 갈아 입혀서 다른 곳에 이장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유족들도 이제 많이 돌아가셨거나, 허연 백발이 되었고 한 많은 세월을 숨죽이며 살았다."

-보성에서 59년만에 합동위령제가 열리는데.....
"59년의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과 당시 희생되신 분들의) 영혼들을 달래고 (그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뜻 깊은 위령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유족들에게 마음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가에서도 하루 속히 서로 (이념대립 없이) 화해해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끝으로 보성지역 유족회 활동은 어떠한가.
"여순사건과 보도연맹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여순사건유족회는 12명이고 보도연맹 희생자유족회가 15명가량 된다. 현재 가입하지 않은 유족들이 40~50여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가입해서 나서지 못하고 있는 점이 좀 안타깝다."

덧붙이는 글 | 뉴스라이프에도 송고했습니다.



#여순사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지방에서 어용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다 세월호사건 후 큰 충격을 받아 사표를 내고 향토사 발굴 및 책쓰기를 하고 있으며,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자서전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