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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권영길을 ‘데모 대장’이라 부릅니다. 좋습니다. 데모 한번 제대로 해봅시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는 ‘데모’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전남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 마을 주민 10여 명은 마을 정자에 앉아 조용히 권 후보의 말을 들었다. 대부분 60을 넘긴 노인들이었다. 권 후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스팔트 농사 올해로 끝냅시다. 그러기 위해선 서울에서 걸판지게 한번 싸워야 합니다. 올해 큰판 하나 만들어 봅시다. 여기 주민 분들은 '그날' 많이 오실 거죠?"

 

서울에서 "걸판지게 한번 싸우"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노인들은 대답이 없었다. 분위기가 다소 어색했다. 대신 주민들은 "농민을 위해서 애쓰는 권 후보가 우리 마을까지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에 권 후보는 다시 힘을 내 "세상을 바꾸자!"고 외쳤다. 그러나 그를 따라하는 주민들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23일 오전 '권영길의 만인보 운동'의 한 풍경이다. 권 후보는 지난 18일부터 전남 순천, 광양, 해남, 장흥, 화순 등 남도 일대를 돌고 있다. 권 후보는 농민들을 만나면 함께 벼를 베고, 노동자를 만나면 함께 기계를 돌려본다. 들판에 가면 막걸리를 마시고, 우시장에 가면 소머리 국밥을 먹고, 공장에 가면 노동자들과 함께 구내식당을 이용한다. 철저한 '현장 모드' 자세다.

 

"사방은 조용한데, 머릿속은 복잡하다"

 

권 후보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강행군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정은 쉴 틈 없이 촘촘히 짜여 있다. 확실히 '인간 권영길'은 현장 체질인 것일까? 현장을 돌고 있는 권 후보의 얼굴은 밝다. 민주노동당의 한 관계자는 "과거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총파업을 성사시키고, 진보정당을 만든 현장 기질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권 후보의 속내는 어떨까. 다른 정당 대권 주자들이 높은 지지율을 지키거나,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때 권 후보는 왜 찬바람 부는 남도에 홀로 서 있는 것일까. 만인보 3일째였던 지난 20일, 해남 대흥사에서 작성한 그의 일기 한 토막을 보자.

 

"어제(19일)는 좌수영에 있었고, 오늘은 우수영까지 왔다. 올해의 대선 승리는 단순한 선거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IMF 이후 내몰리는 민중의 삶, 이 비정한 약육강식의 흐름을 바꾸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산사에서 밤들 보내며, 12척 배로 대군과 맞섰던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다. 이제 본격적인 대선인데, 출발선에 선 우리의 전력 상태는, 12척 배만 가졌던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100만 민중대회, 과연 100만을 모을 수 있을까. 산사의 밤, 사방은 조용한데 머릿속은 복잡하다."

 

일기에 나오듯 지금 권 후보의 마음은 편할 것 같지 않다. 점점 차가워지는 날씨처럼 권 후보를 둘러싼 환경은 싸늘하다. 우선 최근 그의 지지율은 내리막을 걸었다. 지난달 15일 민주노동당 후보로 당선됐을 때 권 후보의 지지율은 5%대였다.
 
한 달 조금 넘게 지난 지금 그의 지지율은 5%를 밑돌고 있다. 가장 낮게는 2%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백전노장' 진보정당 대권 삼수생인 권 후보의 체면이 서지 않는 성적이다.

 

물론 반등의 조짐도 보인다. 23일 발표된 <내일신문>과 여론조사 기관 한길리서치의 10월 정례조사에서 권 후보는 4.9%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정치 초년생 문국현 후보(6.7%)보다 낮은 성적이다(21~22일 조사.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민주노동당의 분위기도 침체돼 있다. 분위기를 바꿀 '필승 카드'도 잘 보이지 않는다. 권 후보는 11월 11일 서울에서 열리는 '100만 민중대회'를 돌파구로 보고 있다. 그래서 권 후보는 남도 현장을 다니면서 100만 민중대회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권 후보는 스스로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다"며 "100만 민중대회 조직위원장 겸 민주노동당 비정규직 차별철폐본부장 자격으로 왔다"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들에게 "100만 명 모여서 목소리를 내는 길이 서민들이 잘 사는 길이다, 서민들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강조하고 있다.

 

권 후보는 23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 앞에서 '진보진영 4인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11월 11일 민중대회 성사와 진보진영 대단결로 대선 승리를 이뤄내자"고 주장했다. 현장에는 문경식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정광훈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가 참석했다.

 

"대권 삼수생 권영길, 대안을 보여달라"

 

이렇게 권 후보는 '100만 민중대회'를 반전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노동당의 한 관계자는 "진보정당이 10년 정도 됐으면 무언가 희망의 대안을 줘야 한다, 이번 대선은 그런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며 "그런데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100만 명 모여서 데모하자는 건, 말 그대로 '데모'일 뿐이지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곡성 금호타이어 공장에서 권 후보와 악수를 나눈 노동자 김모(42)씨는 "장을 직접 찾아다니는 권 후보의 진정성은 높이 평가하지만 대안의 메시지를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며 "3번 대선 나왔으면 이제 데모의 필요성보다는 피부와 와 닿는 희망을 줘야 한다" 고 지적했다.

 

지방을 직접 도는 권 후보의 만인보는 100만 민중대회가 열리는 11일 전날까지 계속된다. 하루 하루가 소중한 대권 후보가 앞으로 보름 넘게 더 서울을 비워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우려는 높다. 그러나 권 후보의 '고집'은 더 높다.

 

권 후보 쪽의 박용진 대변인은 "몇몇 언론이 현재 민주노동당을 두고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정당이라고 하는데, 곧 판이 한번 크게 흔들리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내부에는 "이러다가 권 후보의 지위가 흔들리는 건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이 있다. 권 후보는 사방이 조용한 남도의 산사에서 머리가 복잡하다고 토로하고 있고, 서울의 적지 않은 동지들은 사방이 답답한 현실에 가슴을 치고 있다.

 

대선 판도가 흔들릴 지, 후보가 흔들릴 지는 권 후보 본인의 '고집'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달려 있다.


태그:#권영길,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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