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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자란 아이들이 읽을 책’ 하면 부모들이 먼저 떠올리는 것이 위인전이다. 해마다 여러 출판사에서 많은 위인전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그 ‘위인’의 구성은 거의 일치한다. 한국은 세종대왕, 이순신, 김정호, 장영실과 유관순 등이, 외국은 예수, 석가, 링컨, 나폴레옹, 헬렌 켈러, 에디슨 등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위인전 속에 진정한 '위인'은 있는가?

하지만 과연 ‘위인’이란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같은 기존 위인전의 인물 선정에 의구심이 생긴다. 과연 이 사람들은 ‘위인’일까?

우선 '위인'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대충 정의한다면 ‘남다른 뜻과 강한 의지를 갖고, 인류의 행복이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사람’,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이 정의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흔히 보는 위인전의 주요 멤버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자. 뜻밖에도 적합한 인물이 거의 없다. 어째서?

우선 위인전들이 습관처럼 끼워넣곤 하는 ‘성인’들, 즉 부처와 예수, 공자를 검토해 보자(예언자 무하마드를 넣는 위인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을 다른 위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은 엄연한 보통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인간들에게 이들은 그냥 ‘인간’이 아니다. 이들은 해당 종교 안에서는 신 또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이들을 ‘인간’이라기보다는 어떤 상징 내지 이미지, 또는 과거인의 집단 소망의 화신으로 볼 뿐이다. 간혹 이들을 인간으로서 복원하려는 시도도 있으나 번번이 실패할 뿐이다. 그들은 너무나 옛날 사람이고 그들에 관한 기록은 사실과 환상, 계시와 전설이 뒤죽박죽 섞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다룬 위인전은 모두 불경 또는 <신약 성서> 등 해당 종교 경전을 그대로 베낀 수준에 멈출 뿐이다. 위인전을 읽는 아이들이 여기에서 무엇이 전설이고 무엇이 사실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어른들도 구분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 그 속에 감추어진 심오한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들은 애당초 위인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이다.

전쟁 영웅은 위인전에서 그만 퇴장해야

다음으로 위인전의 단골 멤버인 이른바 ‘영웅’들이 있다.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징기스칸 등 ‘정복자’들이 단골 멤버다. 한국편에는 주로 ‘구국의 영웅’, 즉 이순신과 광개토대왕, 강감찬이 있다.

그런데 ‘정복자’들의 경우 그들이 벌인 전쟁과 파괴, 살인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인류 역사에 대한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설령 세계 문화 교류를 촉진했거나 민주주의 사상을 퍼트리는 데 공헌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학자들이 결과만 보고 내린 평가일 뿐이다. 그런 추상적인, 더구나 본의였는지 의심스러운 업적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평화로운 생활, 아름다운 문화를 빼앗고 파괴한 것을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전쟁 영웅을 다룬 위인전은 그 영웅에 대항한 세력을 무조건 ‘악’으로 묘사하는 위험한 이분법에 빠지기 쉽다. 알렉산더 대왕에 맞선 페르시아 인들이 악당일까? 그들의 평화로운 땅을 짓밟고 아름다운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해버린 알렉산더가 오히려 악당인 것은 아닐까? 아무리 자기 사신을 죽인 복수라 할지라도 적국 영주의 눈에 쇳물을 부어넣은 칭기즈칸의 행위를 인간이 할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엄격히 따지자면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광개토왕도 이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북방 이민족이 쳐들어 온 것은 침략이고, 광개토왕이 그들의 땅에 쳐들어간 것은 ‘위대한 정복’? 논리에도 안 맞고, 위험한 제국주의 사상까지 느껴진다(‘문명국’ 고구려 군은 ‘야만’ 이민족의 마을에서 약탈도 학살도 전혀 하지 않았을까?). 
  
이에 비해 나머지 한국 쪽 영웅들의 경우 ‘위인’이라 부를 만할 것 같다. 이들은 침략을 한 것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전쟁’을 한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이나 강감찬을 '위인'으로 떠받드는 것도 이제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구는 더 이상 전쟁으로 신음할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다.또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침략'과 '방어'의 경게도 모호해졌다. 이제는 전쟁이라면 어떤 이유로 벌이는 것이든 의심해야 하며, 무력 사용은 가능한 한도까지 억제해야 한다. 어린이들이 읽을 책에서도 더 이상 전쟁과 무기를 뭔가 멋진 것, 인류에게 필요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위인들의 감춰진 이면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예술가’형 위인들이다. 단골 출연자(?)로 베토벤과 반 고흐, 김홍도 등이 있다. 그러나 예술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격정과 광기는 선 또는 악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것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그저 미친 짓으로만 보이기 쉽다. 어린이들에게 이해시킬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반 고흐 같은 경우에는 분명히 정신병에 가까운 광기가 있었다. 어른들조차도 지금까지 갖가지 해석을 내놓는 귀 절단 사건을 아이들이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른바 ‘예술가 위인’은 ‘꼭’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역시 위인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형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형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위인전에 적합한 인물일까? 그러나 이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어떤 이들은 분명 한 부분에서는 위대하다고 할 수 있으나, 부정적인 이면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또다른 이들은 아예 ‘위대함’ 자체를 의심해야 할 경우다. 그 대부분은 미국, 서유럽 중심주의로 무장한 주류 역사가 ‘위인’이라는 금관을 씌워 줬던 사람들, 그러나 사실 인류 전체의 눈으로 보면 부정적인 면모가 더 두드러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위인전도 조선 왕 세종에 대해선 오직 그 찬란한 업적과 고상한 인격을 찬양할 뿐이었다. 그러나 흔히 그의 주요 업적으로 칭송하는 6진 개척의 이면까지  기록한 위인전은 보이지 않는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 땅을 메우기 위해 세종은 전라, 경상, 충청 지방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강행했다. 평생 살던 터전을 떠나 춥고 험한 북부로 가길 원하지 않았던 대다수 백성들은 자해를 하거나, 자식까지 죽이면서(구성원 수가 많은 가족을 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이주 대상에서 제외되려고 발버둥쳤다. 그것도 실패해 결국 북쪽으로 가야했던 사람들은 태반이 도망가 유민이 되거나 정착 실패로 굶어 죽어갔다. 물론 완전무결한 ‘성군’ 세종의 위인전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훌륭한 인도주의자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그녀가 역사와 인간에 대해선 철저히 무지한 대영제국의 충신이였을 뿐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녀를 ‘성녀’로 떠받든 것은 제국주의 약탈전에 불과한 크림 전쟁을 정당화하고, 라이벌 러시아를 악마화하고자 했던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주류 지배자들이었다. 이들의 의도는 인도주의도 기독교도 아닌 더러운 제국주의의 의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미화와 왜곡을 동원하더라도, 나이팅게일의 헌신적인 간호로 영국 병사 한 명이 더 살아난 것 때문에 러시아 병사 한 명이 더 죽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위인전은 ‘발명왕’ 에디슨이 사실은 다른 발명가나 부하 직원의 발명을 훔치거나 표절하는 데 명수였으며, 노동자들이 밤에 잠자고 쉬는 꼴조차 보기 싫어서 전구를 발명한 냉혹한 자본주의자라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카네기의 자선사업은 사실 그가 벌인 잔인한 노동탄압을 덮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도주의자’ 노벨의 의도가 역사가들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노벨상은 사실 그간 인류 정신의 고양에도 평화 정착에도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위인전은 외면한다. 조지 워싱턴과 ‘개척자’들이 내세운 ‘자유’라는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마음껏 죽이고 아프리카 인들을 노예로 부릴 ‘자유’라는 사실도 위인전들은 외면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전하자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위인전이라는 책 자체의 필요성까지 의문을 갖게 된다. 사실 위인전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을 선과 악의 단 두 부류로 나누어, ‘선한 사람’의 언행과 사상은 무조건 완전무결한 것으로만 그리려는 데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하고 위대하다는 사람조차도 때로는 보통 사람도 부끄러워 할 행동을 하기도 하고, 너무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반면에 구제불능이라는 악당조차도 어떨 때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히틀러조차도 어떨 때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위인전은 이런 인간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유치한 이분법을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해 버린다. ‘나쁜 놈은 정해져 있다. 그 놈들만 때려 부수면 세상은 아무 문제 없게 된다’라는 사고방식을 키워주는 것은 TV 만화 영화만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적’이라 여기는 위인전이야말로 이런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평범한 일반 위인전만이 아니라 명망있는 출판사의 나름 독창적이라는 위인전들도 상당수 이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문제는 또 있다. 과연 어린이들이 위인전을 읽고 나서, 아무리 가까워봤자 수십년은 더 전에 살았던 인물들의 행동에서 뭔가 강렬한 감동을 받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들의 인생에 깊이 공감하고, 그 공감을 통해 어떤 깨달음과 희망을 얻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오히려 어린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는 그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주눅만 들기 쉽다.

차라리 우리 주변의 평범하지만, 본받을 만한 미덕을 지닌 사람들, 어떤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가공하지 않은 솔직한 이야기가 아이들 교육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아이들이 글을 읽을 때가 되면 습관처럼 위인전을 사주는 것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위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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