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된다."삼성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남긴 유언이다. 그동안 삼성은 선대 회장의 유언을 충실하게 따르며 '무노조 경영'을 유지해왔다. 1997∼2004년까지 삼성SDI와 삼성전자 등에서 노조 설립 시도가 있었지만 회사측의 '효과적인 제압'에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최근 삼성에 노조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어 또다시 삼성을 긴장케 하고 있다. 특히 생산직 노동자들이 노조 설립의 주축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과장급 간부(중간관리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노동계에서 이들의 움직임에 더욱 주목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다음' 카페에서 활동... "말단 소대장이 경영악화 책임을 져야 하나?"지난 4월 수원과 천안에서는 '삼성의 잘못된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의 모임'(삼역모), 부산에서는 '삼성 과장 연합'(스카이)이 결성됐다. 이들은 지난 6일 금오산(경북 구미시 소재)에서 등산모임 형식으로 조우했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와 삼성SDI의 희망퇴직 대상자 40명(삼역모 26명, 부산스카이 14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역모와 스카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40∼50대 과장급이다. 삼성에서 15년 이상 잔뼈가 굵은 이들이다. 삼역모의 한 회원은 "40대 후반 과장급이 가장 많다"며 "삼역모에서만 1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이 노조 설립까지 염두에 둔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들이 이렇게 집단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삼역모의 카페(다음)에 올라온 회원들의 글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카페에는 하루 200여명이 방문하고 있다.
중간관리자인 이들은 경영진에 대한 불만을 가장 많이 털어놓았다. 경영진이 경영악화의 책임을 중간관리자에게 떠넘기며 이들에게 희망퇴직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면받을 수 없는 사형수"라 부르고 있다.
회원 A씨는 "만약에 전쟁에 졌을 경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등병, 상병, 소위, 중대장? 아니다. 전쟁의 총책임은 고위 지휘관한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의 경영악화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이미 답은 명확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엉뚱하게 그 책임을 말단 소대장이 지라고 하면서 내쫓으려고 온갖 비열하고 추잡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그는 "우리 과장들이 C, D학점이라면 오늘의 우리 회사 고위 경영진들은 F학점이거나 아예 학점 미달로 퇴학 조치 대상자들"이라며 "인적 구조조정을 하려는 것은 자기들의 실책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또다른 회원 B씨도 "경영 임원들의 무책임한 행태가 심하다"며 "경영악화시 만만한 (중간) 간부와 사원들만 집으로 쫓아내는 작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삼성과 현대의 조직문화를 이렇게 대비하며 현재 회사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삼성은 근로자는 비참하고 경영 임원들은 신바람나는 조직문화. 현대는 경영임원들이 희생정신을 발휘해 근로자들이 신바람나는 조직문화."회원 C씨는 "경영임원의 고액연봉, 과다한 경영임원수 등이 경영악화의 주범"이라며 "무능한 경영임원에게 책임을 묻고 이들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 멤버들을 해외로 출장보내 회유하고 있어"또한 이들은 모임이 결성된 이후 회사측에서 취하고 있는 해외출장·부서이동·업무배제 등의 조치에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이들은 이러한 조치들을 '방해공작'으로 간주했다.
회원 D씨는 "경영 임원들이 삼역모 활동을 방해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며 "해외에서 귀국 못하게 방해와 유혹이 있었고 귀국 비행기 타는 순간까지 007를 방불케 할 정도로 긴박하게 움직여 방해공작을 따돌렸다"고 주장했다.
회원 E씨도 "업무를 다시 주고 그 업무를 핑계삼아 주 멤버들을 해외로 출장보내 회유하고 있다"며 "정식 업무가 아닌 별도 업무를 주면서 회사는 우리를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회사측이 직원을 시켜 참석자를 체크하고 어제는 사진까지 들이대고 찍었다"며 "꼬투리를 잡으려고 준비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회원 F씨는 아예 '방해공작 유형 리스트'를 만들어 카페에 올린 뒤 "온갖 유혹과 방해공작을 잘 이겨 내자"고 호소했다. 그가 작성한 리스트에 따르면 '방해공작'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업무를 빼앗았다가 다시 주는 척 / 전에는 모른 척하다가 지금은 친한 척 / 부서원들 앞에서 욕하고 / 모임 방해를 위해 강제 출장 보내고 / 부서를 의논도 없이 옮기고 / 조직 개편한다고 하면서 업무에서 배제시키고 / 부서원을 헤쳐모여식으로 왕따시키고 / 함께 커피 마시거나 이야기 못하게 지시하고 / 업무협조를 방해하고 등등'회원 G씨는 "우리도 옛날에 구사대의 일원이었다"며 "그 (집단행동을 방해하는) 수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그 얕은 수에 넘어갈 우리가 아니다"라고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근태(지각, 무단외출), 음주, 폭행 등 매사에 조심해서 행동해야 한다"며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틈새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원 H씨도 "조심의 실수가 조직에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다"며 "술자리와 말 한마디를 조심해야 하고 친한 친구라도 삼역모에 관련된 속마음을 절대 보여주면 안된다"고 주문했다.
"노조가 있는 현대를 보라"...노조 설립에 강한 의지 보여
이들은 현재 ▲무능한 경영임원 사퇴 ▲고임금 경영임원수 감축 및 연봉 삭감 ▲근로자 복리후생 감축 중단 ▲인사·구조조정 정책의 투명한 진행 ▲타사와 동등한 정년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일단 이들은 일방적 구조조정의 부당성을 알리고 그것을 중단시키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들의 최종 목표는 노조 설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회원 I씨는 "노조가 있는 현대는 협상으로 순조롭게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며 "아직도 골방경영을 하는 삼성을 만천하에 알리자"고 노조의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나타냈다.
회원 J씨는 "지금은 삼역모의 내공을 키울 때"라며 "근로기준법도 읽어보고 노동관련 서적도 읽으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회원 K씨는 "지금까지 삼성생활에 익숙해 마음 돌리기 어렵고 결단하기 어렵지만 변해야 한다"고 주체들의 변화를 강조했다.
또 한 해고자는 카페를 방문해 "여러분의 모습이 삼성 민주노조 건설의 희망으로 삼성 노동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며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해고자들도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연대를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