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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그에 맞는 환상들을 누구나 가지게 된다. 그건 조금씩 어긋나기도 하고 비틀리기도 해서, 사람을 괴롭거나 슬프게 만든다. 그렇지만 무언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 건 소중한 기회임에 틀림없다. 그건 목표가 있다는 거고, 아직 동경하는 미지의 세계, 가야 할 곳이 남은 지도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그곳에, 설령 끝까지 다다르지 못할지라도.

지난 25일 KBS1 걸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는 <50년 후의 미래 - 도시>(독일 ZDF 제작)가 방영되었다. 정보화 시대, 3차원 영상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따라다니고, 도로에는 수억 개의 컴퓨터 칩이 깔려 있다. 자동항법장치로 무인자동차를 타고 편히 다닌다. 경찰과 소방서, 병원 등이 연결되어 도시는 마치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필요할 때에는 24시간 가동하는 온라인 슈퍼마켓을 이용한다.

무인자동차 인식 카드
 무인자동차 인식 카드
ⓒ Z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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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으로 잘 짜여진 플롯의 사이사이에, 이를 현실화할 현재의 실험들을 찾아가 담고 있다. 캘리포니아 연구팀을 찾아가 3차원 입체영상의 진척상황을 듣고, 무인자동차 경주대회에 찾아가 결승점을 통과한 5대의 자동차를 보여준다. 현재 런던의 시민들은 420만대 감시 카메라에 1명당 300번씩 노출되고 있다는 증언이 등장한다. 때문에 다큐 속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정말로 50년 후면 이루어질 거라는 즐거운 기대감 속에 화면을 좇게 된다.

미래 정보사회, 해킹 테러에서 살아남은 건 50년 전 구식 로봇

폴이라는 13살 소년이 3차원 입체영상 돌고래 장난감과 놀다가, 해킹 프로그램을 이용 돌고래를 집 밖으로 뛰쳐나가게 한다. 상어 바이러스로 변한 돌고래는 전 지역 시스템을 마비시킨다. 컴퓨터와 정보망에 의존하는 사회이니만큼 해킹은 일종의 테러다.

폴의 로봇토이 돌고래가 상어바이러스로 뛰쳐나가 전 지역 네트워크를 마비시킨다.
 폴의 로봇토이 돌고래가 상어바이러스로 뛰쳐나가 전 지역 네트워크를 마비시킨다.
ⓒ Z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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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맘 대세인 미래 사회. FBI 요원으로 일하는 아이의 엄마는 추적 끝에 바이러스의 근원지가 자신의 아버지, 즉 폴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전직 해커 출신인 할아버지는 꼬마가 고작 13살의 나이에 범죄자로 기록되는 걸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온 세상이 암흑에 잠겨버렸을 때, 타격을 입지 않는 사람 혹은 이로부터 탈출할 지혜를 내는 사람이 구시대의 생존방식에 익숙한 자들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한국을 찾은 아시모
 한국을 찾은 아시모
ⓒ 엠엔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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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기술의 발전과 현재 개발 중인 '아시모'라는 로봇. 이 로봇은 다큐멘터리의 플롯 속에 고물 로봇으로 등장한다. 이미 기술은 진보했고, 아시모는 희대의 고철 로봇이 되었지만, 이를 아끼는 할아버지의 마음씀씀이 때문에 폐기되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

"안녕 나랑 악수할래. 내 이름은 아시모야. 나 뛰기를 배웠어" 라고 말하는 구식 로봇. 2007년의 아시모는, 이제 겨우 직립보행을 터득하고 ‘테디베어’ 같은 단어를 열심히 배우는 중이다. “다른 것 보여주세요”라고 요청하는 아시모의 목소리가 2007년의 우리에게는 신기하지만, 2057년의 폴에게는 답답한 모양이다.

“바이러스에서 살아남은 게 고물로봇 아시모뿐이었다는 걸, 누가 믿겠어요.”

시대는 흐르고 우리는 그 속에 과거와 조우하고 느린 시대를 소중하게 돌아본다. 그것이 세대다.

13살 소년 폴
 13살 소년 폴
ⓒ Z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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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 매료되는 까닭

그야 물론 SF에도 디스토피아가 있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무시무시한 현실이 존재한다. 그러나 누가 알까. 이 마지막 남은 오아시스를 되도록이면 소중히 간직하고픈 마음을. 유전자 조작과 신종 범죄, 정보 수집을 통한 인권의 침해 우려가 있다 해도,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곳에 새로운 미래가 있다고 믿고 싶다.

<당신의 물고기는 안녕하십니까>라는 중국 다큐멘터리도 그렇다. 영화사에서 빈번히 퇴짜를 맞는 시나리오 작가는, 교과서에서만 읽었던 모허(중국 최북단의 땅)를 꿈꾼다. 자신 시나리오 속의 주인공을 좇아 중국 남쪽에서 베이징으로, 기차를 타고 마침내 모허에 이르면서 작가는 탈출을 꿈꾼다. 오로라를 보고 싶었던 그곳에서 얼음낚시를 하고, 작가가 돌아오는 곳은 결국 베이징이다.

모허라는 건 그런 거였다. 정작 그곳에 별것이 없을지라도 사람을 위로하는 어떤 오아시스 같은 것. 미래라는 것도 어쩌면 신기루 같은 건지도 모른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내가 가본 적 없는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 줄 거라는 기대. 그에 대한 상상이 마냥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미래 세계의 희미한 지도가 되어 줄 거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때문에 매번 현실로 돌아오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SF에 매료된다.

마치 크리스마스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산타는 없다!"라고 외치는 비관주의자(혹은 현실주의자)들을 피해 귀마개에 털모자를 눌러쓰고 SF의 숲을 뒤지는 어린애와도 같다. 무릎을 모으고 앉아 <50년 후의 미래 도시>를 지켜보는 행복. 이를 깨는 자는 설령 그것이 스탠리 큐브릭이라고 해도 용서치 않으리.


태그:#아시모, #50년 후의 미래 도시,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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