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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도와 달라.”

 

한국 망명 생활 13년째인 조모아(35, Zaw Moe Aung)씨는 “버마는 부자나라였는데 지금은 가난하고 독재자 나라가 되어 서글프다”면서 “최근 버마민주화시위는 한국에서 1987년 일어난 6월민주항쟁과 같다. 버마도 곧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70, 80세의 승려들이 감옥에서 생활하고 있다. 1988년 미얀마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 때 승려들도 참여했지만 학생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최근 시위는 승려들이 주도하고 있는데, 승려들이 민주화 시위를 벌이기는 처음”이라며 “한국 민주화시위 때도 국제사회의 도움이 있었듯이, 한국사람들이 미얀마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고 많이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조모아씨는 30일 저녁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라는 주제로 마련한 인권대학에 강사로 초청되어 강연했다.

 

그는 미얀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버마민족민주동맹은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현재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끌고 있는 단체다.

 

1994년 8월 24일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망명해 온 그는 최근 버마사태가 벌어지면서 지하운동단체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듣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버마의 자연과 생활에 대해 먼저 소개.

 

그는 “버마에는 비취와 새우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이웃 나라로 밀수해 가고 있지만 군사독재정부는 이를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버마에는 향기가 날 정도로 좋은 쌀이 생산된다. 이전에는 잘 살았는데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못 사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버마사태를 5․18광주민중항쟁과 비교하면서 설명한 그는 “최근 영화 <화려한 휴가>가 나와 한국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는데, 한국에서는 시민들의 시위도 폭동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 미얀마 정부는 시민들이 모이기만 하면 무조건 폭동이라 한다”고 말했다.

 

조모아씨는 버마에서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고 소개. 1962~1963년 사이 학생운동이 일어났고, 1974년 6월 노동운동과 12월 학생운동으로 수백명이 사망하고 구속되기도 했다고 그는 밝혔다.

 

1988년 8월 8일 발생한 ‘8888 민주항쟁’ 때 수천명이 사망하거나 구속되었다는 것. 당시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은 한 찻집에서 소란에 휘말렸고 이는 더 큰 사건으로 번져나갔다. 특히 양곤대학 학생들이 행진을 벌이자 경찰과 군부는 무력으로 대처해 희생자가 발생했다.

아웅산 수지 여사를 소개한 그는 “우리는 어머니라 부른다”고 말했다.

 

“수지 여사가 영국인과 결혼했는데, 왜 외국인과 결혼했느냐고 물었더니 ‘네가 옆에 있었으면 결혼했을 것이다’고 하더라. 당시 영국에 있었으니까 영국인과 결혼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지 여사는 결혼식은 버마식으로 했다. 아들 둘을 두었다. 영국에 살았던 남편이 마지막으로 수지 여사가 보고 싶다고 비자 신청을 했는데 미얀마 군사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남편은 2000년 3월 27일 돌아가셨다.”

 

그는 2003년 5월 30일 발생한 ‘디페옌(Depayin) 대학살사건’을 설명하면서 아웅산 수지 여사와 관련한 일화를 소개.

 

“아웅산 수지 여사가 전국을 돌며 강연했으며, 군사정부는 버마 디폐옌 지역에서 민족민주동맹 지도부를 겨냥해 테러를 가했다. 당시 현장에서 70여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수지 여사가 차에서 내려 그 현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학생들이 ‘어머니 가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수지 여사는 ‘우리 민족이 죽고 있는데 가겠다’고 했다. 학생들이 수지 여사를 보호 했고, 나중에 수지 여사도 머리 등을 다치기도 했다. 이후 주요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지고, 수지 여사는 가택연금 되었다.”

 

조모아씨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난민 지위 인정에 대해 투쟁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2003년 3명, 2005년 4명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지금까지 60여명에 이르고, 지난해까지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신청해 놓은 사람은 3000여명이 넘는다고 그는 소개.

 

“2005년 법무부는 난민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며 5년 안에 출국하라고 하더라. 여권도 없는데 어떻게 가느냐고 했더니 법무부는 ‘알아서 가라’고 했다. 시민단체와 소송했는데, 행정법원과 1심, 2심 법원 모두 난민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법무부에 ‘왜 난민 지위를 인정해 주지 않느냐’고 물으면 말이 없다.”

 

조모아씨는 “현재 버마 감옥에는 수백명의 승려들이 구속되어 있는데 환자가 많다. 국제 의사단체들이 들어가서 치료를 해주겠다고 해도 군사정부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군사정부는 국민들이 내는 세금 60~70%를 군비에 쓴다. 국민들은 아파도 치료 받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버마 여성들이 군인과 경찰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특히 2005년 소수민족 600여명이 성폭행을 당했다. 피해 여성들은 나이가 13~45살 정도였다.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해도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군사정부는 여성들을 보호하지 않고 있다.”

 

최근 버마민주화시위에 대해 설명한 그는 “승려들이 평화적으로 가두시위를 벌일 때 학생과 가수, 배우, 작가, 시인들도 나섰다. 많은 승려들이 경찰과 군인한테 잡혔는데 피를 흘리며 다쳤다”면서 “다쳤어도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병원 앞에 총칼을 든 경찰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은 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는 30일부터 버마민주화운동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온라인 계좌, 529-22-0145031, 경남은행, 예금주 이철승)을 벌이고 있다.


태그:#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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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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