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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천 둑에 흐드러지게 핀 억새들.
강경천 둑에 흐드러지게 핀 억새들. ⓒ 안병기

내가 이 세상에 강경이란 곳이 있다는 걸 안 것은 중학교 때였다. 서울 고모네 집에 가려면 기차를 타는 게 가장 빨랐다. 그 때마다 비둘기호라는 완행열차를 탔다. 시간개념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무책임한 기차였다. 특급이 오면 비켜주고 우등이 오면 비켜주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연착을 안 하면 그게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었다.

집에 돌아올 적에도 예외없이 비둘기호를 탔다. 논산을 지나면 손가락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채운-강경-함열-이리-오산리-임피-대야-개정-군산. 아아, 이제 역이 8개밖에 안 남았구나. 그 시절, 간이역은 내게 낭만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산물 실은 배가 떼지어 몰리고 봇짐장수에 농민들까지 북새통

강경은 1914년 철도가 개통되기 전부터 이미 수륙 교통의 요지였다. 평양 시장, 대구 시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로 꼽힐 만큼 상업이 번창한 곳이었다.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도 나오듯이 장이 서면 금강 하류로부터 싱싱한 해물을 가득 실은 돛단배와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실은 배들이 떼지어 몰려들었으며 사방에서 모여든 봇짐장수와 어민들과 농민들로 포구 바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18세기에도 얼마나 번창했던지 이중환(1690~1756)은 그의 책 <택리지>에 강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런데 은진·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있어 금강 남쪽 들 가운데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惟恩津江景一村居忠全兩道陸海之間爲錦南野中一大都會)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물건을 내어 교역한다. 매양 봄여름 동안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을 때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두 갈래진 항구에 담처럼 늘어선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화물이 모여 쌓인다. -<택리지> 중 '복거총론' 생리(生利) 편"


지난 토요일(27일) 기차를 타고 충남 강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일제가 강경 땅에 떨어뜨리고 간 근대문화유산도 돌아보고 포구만이 가진 가을의 쓸쓸함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옛날 비둘기호 격인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여기저기 신문지를 깔고 앉은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서대전역에서 강경까지는 40여 분밖에는 걸리지 않는다. 내 눈은 행여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놓칠세라 잔뜩 긴장했다. 벌써 벼를 베어버린 논들이 매우 한가하다. 한가로운 것은 평화가 가진 속성 가운데 하나다. 기차를 타면 한가함이라는 평화의 속성 한 가지가 덤으로 주어진다. 지금 난 평화의 속성 두 가지를 한꺼번에 누리며 가는 셈이다.

어린 시절엔 저렇게 가을걷이가 끝난 논바닥에서 공을 차곤 했다. 세상을 의심하면서부터 점차 공놀이에서 멀어졌고, 평화도 멀어졌던가.

쓰임새는 잃어버렸지만, 미내다리는 여전히 아름답구나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0호 강경 미내다리. 매우 아름다운 조선시대 돌다리이다.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0호 강경 미내다리. 매우 아름다운 조선시대 돌다리이다. ⓒ 안병기

강경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어디부터 갈까. 잠시 멈칫거리다가 강경읍과 논산시 채운면의 경계에 있는 미내다리로 향한다. 조선시대 교역의 중요한 거점인 옛 강경 포구가 있던 곳이다. 강경천 둑으로 난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길옆으로 모듬살이 하는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인다.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으악새가 슬피 울어 가을이 아니지만 으악새가 울어 가을의 정취가  더해지는 것만은 틀림없다. 마구 감탄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 전라도 본색이 드러난다.

"워메, 여기가 정선 민둥산이다여? 장흥 천관산이다여?"

저 멀리 냇가에서 빈 병을 들고 서성이는 여인이 보인다. 무엇을 잡는 중일까. 벼도 다 베어버부렀는데 메뚜기를 잡는 건 아닐테고 말이여.

미내다리는 여전히 아름답다. 다리가 세워진 지 260여 년,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마차꾼·봇짐장수 등 숱한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돌다리는 쓰임새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몸은 온전히 남아있는데 쓰임을 잃어버린 사물이란 얼마나 안쓰럽고 쓸쓸한가.

누군가 다리 앞에다 멍석을 깔고 나락을 말리고 있다. 다리 위로 올라가 걸어본다. 홍예의 꼭대기 난간엔 옆으로 튀어나온 호랑이 머리 조각이 있다. 저 호랑이 머리에 감정이 있다면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기뻐하지 않으려나.

근대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시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강경의 근대 문화유산들. 좌로부터 강경상고 관사- 구 한일은행- 중앙초등학교 강당- 남일당한약방 순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강경의 근대 문화유산들. 좌로부터 강경상고 관사- 구 한일은행- 중앙초등학교 강당- 남일당한약방 순이다. ⓒ 안병기

다시 채운교를 건너서 강경읍내로 돌아온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구 강경공립상업학교인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가 있다. 1920년에 개교한 옛 강경상고는 한때 지방 명문고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학교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관사는 교문으로 들어가서 좌측 편에 있다. 

1931년에 지었다는 이 교장 관사는 군산 동국사 대웅전과 많이 닮았다. 동국사라는 일본식 절집은 고은 시인이 처음 출가했던 절이다. 그는 거기서 혜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중장학을 배웠다. 처음 지을 적엔 일본식 목조 건물이었는데 벽돌집으로 바꿨다. 이음 형태로 아래로 길게 늘인 지붕이 특징이다.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를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경 중앙초등학교를 찾아간다. 1937년에 지어진 강당은 붉은 벽돌을 쌓은 벽체에 목조 트러스를 얹은 건물이다. 단순함을 넘어 단아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붉은 벽돌색이 내가 어릴 적에 자주 보았던 광주 수창초등학교 본관 건물을 연상시킨다.

세 번째로 찾은 건물은 서창리 강경우체국 앞에 있는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이다. 척 보니  일제시대 때 지은 전형적인 은행 건물이다. 붉은 벽돌을 쌓아서 지은 것이나 형태가 군산에 있는 일제시대 건물인 제일은행 군산지점과 비슷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개조하는 중인지 내부를 모조리 뜯어 놓았다. 마구잡이식 관리로 건물의 가치를 잃어버린 제일은행 군산지점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닌지 적이 염려스럽다.

구 남일당 한약방을 찾아가려고 연만하신 분들을 붙들고 길을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생각다 못해 근처에 있는 한약방을 찾아갔다. 일흔이 넘은 한약방 주인은 자신이 남일당 한약방에서 배워서 한약방을 차린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제야 위치를 제대로 알겠구나!'싶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남일당한약방의 위치를 절대로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알고보니 그가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곳은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자리가 아니라 원래 남일당 한약방이 있던 자리였다.

그에 따르면 현재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은 본래 남일당 한약방이 아니라고 한다. 한약방의 위치와 관련해서 자신은 누구와도 인터뷰한 적이 없었는데도 신문엔 마치 자신이 위치를 지적해 준 것처럼 보도됐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위치를 정정하겠다고 나서면 동네 사람들 간에 싸움밖에 더 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가며 현재 지정된 장소를 알려준다.

약도를 갖고도 남일당 한약방이 있는 골목을 찾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20년대에 찍은 강경시장 전경 사진 속에 등장하는 건물 중에서 남일당 한약방 건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예전 군산 영화동에서 흔히 보았던 변형된 한옥 형태다.

남일당 한약방은 어디 있나요? 제발 가르쳐주세요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보성 아파트 뒤 테마공원 앞에 있는 구 강경노동조합 건물이다. 1925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원래는 2층 한옥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1층만 남아 있다. 한식 구조와 일식 구조가 절충된 건축형태인데 이미 외관을 많이 손댄 듯하다. 근대기 노동자 조합이 사용한 건물로 노동사와 지역사에 가치가 있는 건물이니 이대로나마 잘 보존했으면 싶다.

구 강경노동조합 근처는 옛적 강경에서 가장 번성한 상업지역이다. 얼마 전에 젓갈축제가 끝났는데도 가게마다 손님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강경 젓갈이 갑작스럽게 유명세를 탄 데는 매스컴의 영향도 없지 않지만 본래 물맛이 좋은 데 있는지도 모른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강경의 물맛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뒤로 큰 강이 흘러 조수와 통하였는데 물맛이 그리 짜지는 않다. 마을에 우물이 없어 온고을 집집마다 큰 독을 땅에 묻어 두고 강물을 길어 독에 부어둔다. 며칠이 지나면 탁한 찌꺼기는 밑에 가라앉는데 윗물은 맑고 시원하여 비록 여러 날이 지나도 물맛이 변하지 않는다.

오래 둘수록 더욱 차가워지며 수십 년 동안 장질을 앓던 자일지라도 일 년만 이 물을 마시면 병의 뿌리를 뽑는다 한다. 어떤 사람은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이는 곳에 반쯤 싱겁고 짠물이 토질을 고치는데 가장 좋은데 이 강물이 상등급이다"라고 말한다. - <택리지> 중 '팔도총론' 충청도편에서"

강경읍내 중앙리와 서창리에 집중된 근대 문화유산들은 흘러가지 않는 시간이 남긴 선물이다.

1970년대 중반, 제일은행 군산지점이 제멋대로 개조돼 나이트 클럽으로 쓰일 때 군산지역 문화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원형보존을 극구 주장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던 옛일이 떠오른다. 제아무리 치욕적인 일제의 잔재도 결국 우리가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는 문화유산이라는 합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세월이 요구됐던 셈이다.

고여있음과 정체가 없었더라면 강경의 근대 문화유산들은 벌써 다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새옹지마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무생물인 건물에게도 통용되는 말인가 보다.

마음의 갈피에 고이 간직하고 싶다

 등록문화재 제42호 북옥감리교회
등록문화재 제42호 북옥감리교회 ⓒ 안병기

강경의 근대 문화유산 가운데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은 북옥감리교회였다. 교회는 강경의 서쪽에 우뚝 솟은 옥녀봉 아래에 있었다.

북옥감리교회는 한식 목조구조양식으로 된 현존 유일한 개신교 한옥교회다.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다운 건물인가. 바라볼수록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온다. 이곳에 앉아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 것임이요"로 시작하는 마태복음 속 '산상수훈'을 듣는다면 그 울림이 얼마나 클까. 마음이 저절로 따스해지고 충만해질 것 같다.

이런 소박한 곳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짓는 대형교회에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은총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강경뿐 아니라 금강 연안지역의 기독교 선교역사의 상징 건축물이라니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산 하나가 강가에 우뚝 솟아 동쪽을 향하고 있고

 논산8경 중 제7경인 옥녀봉. 포구 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논산8경 중 제7경인 옥녀봉. 포구 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 안병기


 옥녀봉에서 바라본 풍경. 금강을 쭉 거슬러올라가면 백마강에 이른다.
옥녀봉에서 바라본 풍경. 금강을 쭉 거슬러올라가면 백마강에 이른다. ⓒ 안병기

강경은 은진 서쪽에 있다. 들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강가에 우뚝 솟아 동쪽을 향하고 있고, 두 줄기 큰 냇물을 좌우로 마주하였다. (江景在恩津西野中一小山臨江斗起向東逆受二大川於左右)-<택리지>중 '팔도총론' 충청도편에서

북옥감리교회에서 논산 8경 중 제7경이라는 옥녀봉은 지척이다. 높지 않은 산이다 보니 정상까지 금세 오른다. 정상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 새로 조성한 봉수대가 서 있다. 옥녀봉은 강경의 상징이다. 기차를 타고 갈 때도 보인다. 높이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전설과 기암으로 가득한 곳이다.

옥녀봉의 경치에 반한 옥황상제의 딸이 이 곳에 목욕하러 내려왔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넋이 나갔다. 하늘나라에서 그만 올라오라는 나팔소리를 듣고서야 허둥지둥 옷을 걸쳐입은 채 하늘로 올라갔다. 하필이면 그때 옥황상제가 아래를 내려다볼 게 뭐란 말인가.

딸의 허술한 옷매무새를 본 옥황상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오던  선녀를 땅에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늘로 돌아갈 길이 끊긴 선녀는 옥녀라 이름을 고치고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옥녀는 자나깨나 하늘로 돌아갈 날을 꿈꾸다가 이곳에서 죽고 말았다고 한다.

옥녀의 전설은 슬프다. 추락한 옥녀의 삶이 슬픈 게 아니다. 그 이야기 속에 내포한 우리나라 아버지들의 가부장적인 모습이 슬프다. 옛날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을까.

옥녀봉 곳곳엔 곰바위, 범바위, 부엉이 바위, 물범 바위로 명명된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정말 절경이라 할 만하다. 강 건너편 부여 세도면은 물론, 멀리 북서쪽으론 백마강이 보이고, 북쪽으론 논산 시내가 빤히 바라다보인다.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채운산이 옥녀봉과 맞바라기 하고 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곳에 서서 세도 쪽으로 지는 황혼을 바라본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강경엔 참 많기도 해라, 쓸쓸한 것들이

 동서로 길게 펼쳐진 포구의 억새숲. 멀리 보이는 다리가 부여 세도로 건너가는 황산교이다.
동서로 길게 펼쳐진 포구의 억새숲. 멀리 보이는 다리가 부여 세도로 건너가는 황산교이다. ⓒ 안병기

 낚시꾼은 빈 낚싯대 드리운 채 하염없이 세월만 낚고...。
낚시꾼은 빈 낚싯대 드리운 채 하염없이 세월만 낚고...。 ⓒ 안병기

옥녀봉을 내려와 금강 포구를 향해 간다. 포구엔 무성한 갈대숲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다. 이상한 일이다. 포구라면 응당 갈대가 많아야 할 텐데, 이곳엔 갈대는 거의 보이지 않고 온통 억새 일색이다. 강가로 다가가니 낚시꾼 두어 명이 앉아 있다.

"물고기가 좀 잡히느냐?"라고 물으니 "잘 잡히지 않는다"면서 땅바닥에 던져놓은 물고기를 가리킨다. 강 준치 한 마리가 숨을 파닥거리고 있다. 물고기 축에도 못 끼는 녀석이다. "봄이면 황복이 더러 잡히느냐"라고 물었더니 "전에는 좀 잡혔는데 군산 하굿둑을 막은 후로는 구경도 못했다"고 대답한다.

올해 예순여섯 살이라는 낚시꾼에게 "옛날 강경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고 했더니만 "적당히 비린내 나는 포구도 있고, 이런 억새숲도 있고, 눈물겨운 황혼도 있어 강경의 발전이 더딘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일체유심조라.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더니 그 말이 영락없구나.

강경은 모든 것을 삭혀내야 하는 곳이다. 젓갈을 삭혀내고, 포구는 갈대 소리를 삭혀내고, 강물은 자신의 등을 비추는 햇살을 삭혀 은물결을 빚어낸다. 그리고 나그네들은 강경이 보여주는 온갖 쓸쓸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 안에서 삭혀낸다.

흘러가지 않은 시간과 만나는 호젓한 즐거움

 배 모양으로 생긴 강경 젓갈전시관과 새로 짓고 있는 등대. 그 아래엔 유명한 복어요릿집인 황산옥이 있다.
배 모양으로 생긴 강경 젓갈전시관과 새로 짓고 있는 등대. 그 아래엔 유명한 복어요릿집인 황산옥이 있다. ⓒ 안병기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63호 임이정. 그 아래 지붕만 보이는 건물은 죽림서원 헌장당이다.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63호 임이정. 그 아래 지붕만 보이는 건물은 죽림서원 헌장당이다. ⓒ 안병기

배 모양으로 생긴 건물인 강경젓갈전시관 쪽을 향해 다가간다. 산꼭대기엔 등대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붕괴 위험 때문에 철거했던 예전 등대의 추억이 그리워서 새로이 짓나 보다.

불도저 소리가 시끄러운 공사장 옆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팔괘정이 있다. 이 정자는 우암 송시열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아담한 건물이다. 대숲에 둘러싸여 있어 강가를 전망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흠이지만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팔괘정에서 몇 걸음만 아래로 내려오니, 죽림서원이 나그네를 기다린다. 인조 4년(1626)에 지은 이 건물은 처음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만을 모신 서원이었다. 그 후로 사계 김장생과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의 위패 등 여섯 분을 더 모시게 되었다. 다른 서원과 달리 사람이 살고 있어서인지 건물이 쇠락하지 않고 깨끗한 편이다.

죽림서원에서 바라보면 오른쪽 언덕 위에 임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예학의 종장인 사계 김장생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친 곳이다.

임이정이란 이름은 <시경>에 나오는 '두려워 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 같이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戰戰兢兢 如臨深淵如履薄氷)'라는 구절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서쪽에 금강이 있어 경치가 아주 좋다. 바로 앞으로 도로가 지나는 게 흠이다. 처음 지었을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운치가 있었으리라.

'젓갈의 고장'이 아닌 '역사의 도시'

강경은 내가 젊은 날의 좌절된 꿈을 앓았던 전북 군산과 여러가지 점에서 닮았다. 금강 물줄기를 따라 조성된 항구라는 점이 그렇고, 일제의 수탈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도 그렇다. 강바닥에 점차 흙·모래가 쌓이면서 강의 깊이가 얕아져 큰 배들의 출입이 뜸해지는 과정까지도 닮았으며, 아직도 식민지 시대가 남긴 흉터처럼 일제시대 건축이 곳곳에 남아 있는 점까지도 비슷하다.

오늘 하루 이곳 강경에서 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을 했다. 때로는 조선시대를 거닐기도 했고, 때로는 일제시대를 포함한 근대를 거닐기도 했으며, 젓갈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대를 거닐기도 했다. 추악한 역사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하는 하루였다.  

많은 사람은 강경하면 먼저 젓갈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강경에 젓갈집은 고작 여남은 집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젓갈의 고장'이란 이미지는 근래에 생겨난 것이다.

강경은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금강 포구의 노을을 보지 못한 채 떠나야할 것 같다. 이제 하룻동안 도보로 돌아보았던 강경에 대한 시간여행을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다. 금강 포구 으악새들에겐 절대로 나의 떠남을 알리지 마라. 너무 슬피 울어 목이 쇨지도 모르느니.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입니다.



#강경 #근대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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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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