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저녁 8시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대덕어린이집. 어린이들의 통원을 돕던 노랑색 봉고차량이 어둠을 뚫고 들어오더니 이주여성 8명이 내렸다. 젖먹이 아이를 보듬고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모두가 어린이집에 딸린 한글학교의 수강생들이다. 한글학교의 강사는 김재두(55)·박육례(52)씨 부부. 김씨는 봉고차를 타고 마을을 돌며 이주여성들을 태우고 와서 한글을 가르친다. 부인 박씨는 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치면서 간식을 챙겨준다. 벌써 3년째다.
“요즘 농번기여서 농사일이 늦게 끝나거든요. 이 시간이면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나오는 겁니다. 미처 식사를 못하고 나오는 이들도 있어요. 한편으로는 안쓰러우면서도 저희가 한글교실을 운영하는 보람이죠.”
한글강사를 맡고 있는 김씨의 얘기다.
“처음엔 상상할 수 없었죠. ‘밤마다 마실에 나간다고 생각했는지’ 시부모나 남편들의 반대가 심했어요.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저희들의 노력하는 모습과 며느리들의 생활이 활달해지는 걸 보면서 바뀌었어요.”
풍물강사 박씨의 얘기다. 심지어 저녁식사를 끝내고 시어머니한테 설거지를 맡기고 나오는 며느리들도 있다고 귀띔한다.
한글교육은 일주일에 두 번씩, 매주 화·목요일 밤에 1시간 30분가량 진행된다. 초등학교 3∼4학년들이 보는 교재를 이용, 한글을 익히고 풍물도 배운다. 필리핀에서 시집 와 9살과 7살, 5살 세 자녀를 두고 있는 에듀비제스 아키노 오고투(43)씨는 “한국말은 귀에 익숙하긴 한데 읽고 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발음이 어렵고 비슷한 낱말도 많다는 것. 특히 ‘ㅔ’와 ‘ㅐ’, ‘ㅓ’와 ‘ㅗ’의 구별이 어렵다고 했다. 그녀는 이날도 받아쓰기를 하면서 ‘메아리’를 ‘매아리’로 썼다. 그러면서도 “재밌다”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한글 못지않게 그녀가 요즘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는 ‘진도아리랑’ 배우기. 오는 12월에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재롱잔치가 있는데 그때 멋지게 불러 보일 것이라고 했다.
자넷 디가보이(30·필리핀)씨는 “(한글교실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와 언니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이 가장 즐겁다”면서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다 없어진다”고 했다. 그녀의 특기는 김치 담그기. 배추김치와 물김치 등 엔간한 김치는 집에서 다 담가 먹는다. 제사상도 직접 준비한다고. 앞으로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어엿한 직업을 갖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여섯 번 떨어지고 일곱 번째에 합격했다는 마르빅 판디안(29)씨 역시 “언니들, 친구들, 동생들을 만나면 즐겁다”면서 “한글교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고 했다.
대덕어린이집이 이주여성들의 한글교실을 연 것은 지난 2005년 8월. 윤덕현 어린이집 원장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농촌에 다문화가정이 늘면서 어린이집에도 이주여성 자모들이 20%를 웃돌자 이들의 한국생활 적응을 돕고 자녀교육에도 보탬을 주자는 취지였다. 이주여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가 의사소통이라는 사실을 안 그가 적극 나서 만든 사설 무료학교인 셈이다. 학습공간과 함께 필요한 교재와 문구도 전부 어린이집에서 제공한다. 이렇게 한글교육을 한 것이 지금까지 모두 200여 차례. 한글수업뿐 아니다. 수업이 끝나면 과일이나 과자를 내놓고 함께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것도 일상이다. 추석이나 설 등 명절 때면 한국음식을 같이 만들고 이주여성 가족들을 초대해 시식을 했다.
가까운 곳에서 사물놀이, 국악연주회 등이 있으면 같이 가서 보고 즐겼다. 강진청자문화제 관람, 찜질방 체험, 계곡물놀이도 함께 갔다. 가끔은 집들이, 외식, 생일잔치도 하면서 한 가족처럼 지냈다.
“이들에게 친정이 되어 주자고 했죠. 친정아버지, 친정오빠, 친정언니…. 여자들한테 친정처럼 편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다음에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취업을 알선하고,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죠.” 김씨의 얘기다. 그는 또 “외국인 며느리들이 한글을 배우면서 생활에서 자신감을 갖고 표정까지 밝아지고 있다”면서 “(이들의) 의사소통 능력을 길러주고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부인 박씨는 “이들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데다 언어·문화적인 격차 때문에 적극적으로 자녀교육에 끼어들 수도 없어 늘 가슴 아파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이 엄마들이 아이들의 숙제를 봐줄 수 있을 정도가 되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말을 배우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입을 모으는 이주여성들의 눈망울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 하나. 이들의 한국문화 적응교육과 2세들의 교육문제를 우리가 나서서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분명 위기의 우리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귀한 존재이기에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