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교미가 끝나면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사마귀.
 교미가 끝나면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사마귀.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요즘 탤런트들의 잇따른 이혼이 시중의 화제다. 1960년대 말,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였던 최무룡과 김지미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헤어졌다. 사랑하는데 왜 헤어지는 걸까. 이 두 사람의 이혼은 당시 십대 중반을 지나던 내게 도저히 풀 길 없는 철학적 숙제를 남겨 두었다.

이 엄청난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사유에다 난 1969년 한 해를 온전히 쏟아부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겨우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말 속에 괄호를 치고 이렇게 써 넣을 수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차마 상처를 줄 수 없어) 헤어진다."

또 엊그제 해어진 모 탤런트 부부는 "'자유롭기 위해' 헤어진다"는 말을 남겼다. 그들 역시 철학적 명제를 남기긴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난 목하 이이 생략한 목적어를 탐구중이다. 그런 일에 왜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왜냐하면 내게 철학적 사유는 너무나 소중하니까.

아직 체계가 완벽하게 잡힌 건 아니지만, 이제까지 쌓인 내 철학적 고력만 가지고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하자. 도대체 부부란 무엇인가를. 일단은 '촌수를 헤아릴 수 없는 관계'라고 풀이할 수 있다. 촌수가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먼 사이일 수도 간격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길 위의 풍경

내겐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길 위의 풍경이 하나 있다. 1970년대 말이었던가. 서울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아래를 지나다가 참으로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초라한 복색을 한 여자가 역시 초라한 복색을 한 남자를 교각에 바짝 붙여 세워놓고선 주먹으로 때리고 있었다. 여자는 레프트, 라이트, 어퍼컷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아마 지금처럼 여자 프로 복싱이 있는 때라면 세계 챔피언은 '떼놓은 당상'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남자는 그저 맞고만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 구경하는 내가 오히려 피가 끓을 지경이었다. 벼엉신, 저것도 남자라고!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다운 당하지 않는 걸 보면 맷집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던 남자가 갑자기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정말 육갑을 제곱으로 떠는구나.

조금 있으니, 이젠 때리던 여자까지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둘이서 부둥켜 안고 엉엉 서럽게 울었다.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결말이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리자, 사람들은 금세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북아현동 고개를 터덕터덕 걸어내려오면서 생각에 잠겼다. '저 두 사람은 대체 어떤 관계일까?', '왜 남자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야 했을까?', '그런데 나중에 부둥켜 안고 우는 건 또 무슨 까닭인가?'. 나름대로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이 희한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각색해 보았다.

아마도 저 여자와 남자는 부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가 노름을 했거나, 아니면  바람을 피웠을 것이다. 그래서 가산을 탕진하고 그 여파로 말미암아 둘은 서로 헤어져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구걸로 생계를 이어 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여기 굴레방 다리 아래서 극적으로 만났을 것이다.

남자를 보자, 여자는 원망하는 마음이 솟구쳤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마구 때린 것이다.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여자의 주먹을 견디면서 남자는 이렇게 쓰라린 회한에 젖엇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컥 울음이 터져나왔으리라. 주먹을 날리던 여자도 분이 어느 정도 풀리자 남자의 초라한 복색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 감정은 늘 시간이 흘러야 실감이 오지 않던가.

아이고, 저 허고 다니는 꼬락서니 좀 봐라! 얼마나 불쌍허냐. 둘의 감정적 응어리가 풀리는순간, 그제야 비로소 반가움과 서글픔에 겨워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한 것일 게다. 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상상력이 어느 정도나 사실에 접근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 광경은 꽤 오래 동안 내게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부부를 바라보는 두 개의 엇갈린 시선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이생진 시인의 시 '부부의 배'는 2001년도에 나온 <혼자 사는 어머니>( 책이있는마을)라는 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1톤 짜리 낚싯배
거기에 목숨을 걸었다
새벽부터 나온 목에 목도리 동동 감고
갯바람을 피하는 부부
시동이 산을 울리고
다시 골짜기 물로 내려온다

4대에 내려오는 돌담집
지붕만 갈았지 한 번도 문을 잠가본 적이 없는 집
이렇게 부부가 한배에 타는 것도 운명이다


- 이생진 시 '부부의 배' 전문

이생진의 시에 나오는 부부는 바닷가 아니면 섬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문도 없을 뿐더러 반쯤은 허물어졌을 게 틀림없는 돌담집에 산다. 그리고 1톤짜리 낚싯배를 타고 다니며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하기까진 하지 않더라도 넉넉지 않은 살림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자주 싸울까? 내 대답은 한 마디로 "아니 올시다"이다. 왜냐고? 이 두 사람은 힘을 합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무리 잉꼬부부가 되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도 잉꼬부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부부 싸움이 가진 메커니즘이다.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고려원,1995)라는 노혜경 시인의 처녀시집에 실린 시 '부부 관계'는 앞의 두 사람과는 영판 틀리다. 그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사람 살이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을까.

당신이 내게 빌려간 돈 십만 원 떼고 입금시켰어, 라고 월급날 남편이 전화를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잔잔한 미소를 띤다.
돈거래하는 남자와는 이미 튼 거라고, 남녀관계의 마지막이라고, 우리 여자들의 선배들은 충고했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다. 오로지 생존의 고리일 뿐.
나는 남편에게 항의했어야 했다. 그 돈은 시아버님 용돈 때문에 빌린 거라고, 당신도 더불어 부담할 의무가 있다고, 조리 분명하게 따졌어야 했다.
그러나 대신 나는 웃는다. 아직도 여자이고 싶은 내 욕망 때문? 아니다, 그가 내게 이십구만 원이 든 봉투를 가져다주었을 때도 나는 웃었고 늘어나는 적자 때문에 취직자리를 기웃거리던 그때도 나는 웃었다. 내가 배가 고플 땐 그도 고프고, 그가 먹을 땐 나도 먹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 둘의 더불은 생존이 따로따로의 사랑보다 소중함을 믿었기 때문에.

- 노혜경의 시 '부부관계' 전문

시인은 아마도 남편과 가끔 돈거래를 하는 모양이다. 그런 걸 보면 '부부일심동체'라는데 '부부이심이체'인 것이다. 이거 순 콩가루 집안 아냐? 더구나 "돈거래하는 남자와는 이미 (관계가) 튼 거"라는 걸 번연히 알면서까지 부부간에 돈거래를 하다니.

이들의 돈 거래는 맨 처음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가 내게 이십구만 원이 든 봉투를 가져다주었을 때도 나는 웃었"다, 라는 시인의 진술은 왜 돈 거래가 시작되었는지 감잡게 해준다. 모르긴 해도 남편의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꾸어주고 빌리면서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내용을 다 읽고 나면 이 연사는 "시인이 남편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어야 옳았다"라고 강력하게 외치고 싶어진다. 남편이 너무 쩨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 둘의 더불은 생존이 따로따로의 사랑보다 소중함을 믿었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고 만다. 시 읽기를 마치는 순간, "세월이 흐르면 아무리 뜨거웠던 부부 사이도 결국 '생존'만 남게 되는구나"라는 씁쓸함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세상에 평생 지속 가능한 사랑이란 없는 것인가.

노혜경 시인은 우리에게 '전투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노사모' 회장도 맡았으며, 안티조선 사이트인 '우리모두'에서도 활약한 시인이다. 그런데 의외로 부부 관계에서만은 마냥 "내게 강같은 평화"만을 지향하나 보다.

사랑은 다가올 때는 요란하지만

이생진 시인의 시 '부부의 배' 속에 나오는 부부와 노혜경 시인의 시 '부부관계'에 나오는 부부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를 생각한다.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것은 대부분 책임의 전가 때문이다. 자꾸만 책임을 전가하다 보면 나중엔 눈곱만큼의 연민조차 남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남만도 못한' 관계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최소한의 배려와 연민조차 남지 않은 관계는 사랑이 있었던 자리에 칼날같은 증오만 남긴다. 그 증오는 시도 때도 없이 상대에 대한 공격을 남발케 하고 싸움은 상처를 점점 악화시킨다. 사랑은 다가올 때는 요란하지만 갈 때는 발소리를 죽여 슬며시 가버린다. 그래서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가끔 1970년대 말, 서울 굴레방다리 근처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때 이후로 난 부부 관계의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구멍을 갖게 되었다. 타 존재를 염탐할 수 있는 나만의 근거를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후 두 사람의 생은 어떻게 끊어지고 이어졌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추측컨대, 그들은 이제 차가운 세상의 바깥을 버리고 세상의 따스한 안쪽으로 삼투되어 살고 있을 것이다. 상대를 향한 증오를 버리고 그 자리에 연민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어떤가, 내 추측이 그럴 듯하지 않은가?


태그:#부부, #관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