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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태어난 중앙리(옛 본정리)  일대(옥녀봉 중턱에서 촬영).
 시인이 태어난 중앙리(옛 본정리) 일대(옥녀봉 중턱에서 촬영).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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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시인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1975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시인 총서'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민음사에서 펴낸 <강아지풀>이라는 시집에서였다. 그 시집에 실린 많은 시편들 가운데 '별리'라는 짧은 시를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

노을 속에 손을 들고 있었다. 도라지빛.
_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손끝에 방울새는 울고 있었다. - 시 '별리' 전문

시인이 보았던 '도라지빛 노을'을 실제로 본 것은 3년 전이었다. 우연히 강경에 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저무는 금강 포구에 서서 부여 세도 쪽으로 물드는 저녁놀을 보았다. 처음엔 검붉었던 노을의 색깔이 시간이 흐르자 점차 도라지꽃 빛으로 변해갔다. 시인은 자줏빛 노을 속에서 시인은 누구와 작별했던 것일까.

지난 토요일 '눈물의 시인'이라 부르는 박용래 시인의 삶의 자취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의 삶의 자취는 주로 강경과 대전 지역에 집중돼 있다. 그의 탯자리인 강경에서부터 더듬어 올라오기로 했다.

누이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사춘기, 그리고 눈물

박용래 시인이 다녔던 강경상고 교정. 박시인의 후배인 김관식 시인의 '이 가을에는'이라는 시비가 서 있다.
 박용래 시인이 다녔던 강경상고 교정. 박시인의 후배인 김관식 시인의 '이 가을에는'이라는 시비가 서 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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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시인은 1925년 1월 14일(음력),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본정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중앙리에서다. 그의 아버지(박원태)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가산을 정리해 부여에서 강경으로 이사했다. 박용래 시인이 당시 전국에서도 손꼽히던 명문이었던 강경상고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교육열 덕분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박용래 시인의 모교인 강경상고였다. 강경정보상업고등학교로 교명을 개칭한 강경상고는 강경천변에 있었다. 시인이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9년이었다.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공부에서도 우등생이었을 뿐 아니라 미술에도 재질이 있어 미술반장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박용래 시인은 '눈물의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까딱하면 눈물을 흘리곤 했을까. 몹시 따랐던 홍래 누이가 세상을 등진 것은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때의 일이었다. 초산의 산고(産苦)로 이승을 뜨고만 것이다.

열여섯 살 때라면 한참 사춘기를 앓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갑작스런 누이의 죽음은 그에게 가눌 수 없는 슬픔과 정서적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생애 그가 흘렸던 그의 흔하디 흔한 눈물의 원천은 사춘기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본관 왼쪽 교사 앞에는 박용래 시인의 이 학교 후배인 김관식 시인의 '이 가을에는'이라는 시비가 서 있었다. 혹 박용래 시인의 시비도 어딘가에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내 곳곳을 뒤졌지만 박용래 시인의 시비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시비 존재 유무를 확인하려고 교무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마침 '놀토'라서인지 텅 빈 교무실이 나그네를 반겨줄 뿐이었다.

오동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쳐진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옆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 누이 생각도 난다.
오동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원뢰(遠雷).―'담장' 부분

중앙초등학교.
 중앙초등학교.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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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중앙초등학교였다. 그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우리 나이로 치면 열살 때였다. 왜 이렇게 늦은 나이에 입학한 것일까. 늦게 출생신고를 한 것도 아니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시집 <먼바다>에 기록된 연보를 보면 그는 태어난 당일에 곧장 출생 신고를 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엔 아기가 금방 죽을 것인지 아니면 그럭저럭 살 것인지를 가늠한 뒤에야 비로소 호적에 올리던 때였음을 감안하면 막내를 낳은 그의 아버지의 기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을까.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인가.

시인에겐 봉래와 학래라는 두 형과 홍래라는 누나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몇 살 터울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바로 위인 홍래 누나와는 한두 해라도 초등학교에 같이 다녔을까. "누나, 같이 가_". 남매가 함께 등교하는 다정한 모습을 떠올려본다.

"시인은 가고, 시러배들만 싸가지 읎이 뫼여든당께"

조금은 애잔한 상상을 지우며 찾아나선 곳은 서산집이란 술집이었다.

1943년, 강경상고를 졸업한 그는 조선은행 서울 본점에 취직함으로써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은행원 생활은 1945년, 징집영장을 받음으로써 짧게 마감하고 만다. 이후 그는 대전 보문중학교·철도학교·한밭중학교·당진 송악중학교·대전 북중학교 등을 두루 거치면서 교사 생활을 한다.

그러던 그가 다시 고향에 발걸음을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부터였다고 한다. 탁주를 좋아했던 시인은 강경에 내려오면 구 장터에 있는 '서산집'이란 대폿집을 애용했던 모양이다.

1970년대 말부터 시인이 자주 찾았던 구장터.
 1970년대 말부터 시인이 자주 찾았던 구장터.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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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시인이 자주 들렀던 '서산집'이라는 대포집이 있었던 자리.
 박용래 시인이 자주 들렀던 '서산집'이라는 대포집이 있었던 자리.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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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절친했던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 선생도 1982년 2월7일, 작가 강순식씨와 함께 박용래 시인에 대한 추모여행차 이 곳에 들른다.

박시인이 자주 다닌 곳은 가운데의 서산집. 영업허가증을 흘끔 보니 주모의 이름은 박종선. 논묏들 조선감자같이 우둥퉁한 몸매에 파뿌리를 인 여인, 욕쟁이는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자기 또래의 아낙네와 소주를 홀짝이다 말고 "워디서 투가리 같은 것만 두 것이나 온댜?" -<이문구의 문학동네사람들> 181쪽

그들이 "사람 좀 찾아보러 왔시다, 글 쓰는 사람…." 이라고 수작을 붙이자, 욕쟁이 주모는 "시끄러, 잡것아, 시인은 가고 시러배들만 싸가지 읎이 뫼여든당께"라고 일갈한다.

서산집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강경의 근대 문화유산인 남일당한약방의 위치를 물으러 들어간 한약방 주인에게서 확실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에 반주 한 잔을 걸치셨는지 두 볼이 발그레한 노인께선 서산집 위치를 가르쳐 주며 "서산집이라 하면 잘 모를 수도 있으니, '엉덩이집'이라고 물으라"라고까지 친절하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서산집 주모는 엉덩이가 무척 컸던가 보다.

운좋게 구 장터 가운데께에 있는 곡물 상회 주인인 김한수(81) 옹에게서 서산집에 대한 내력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서산집은 곡물상회 옆골목으로 들어가서 바로 뒷집이었는데 문을 닫은 지 꽤 오래됐다고 한다. 월남 파병에 다녀온 둘째 아들 덕택에 살림살이가 펴지자 그만 두었다고 한다.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굴렁쇠 아이들의 달.
자치기 아이들의 달.
땅뺏기 아이들의 달.
공깃돌 아이들의 달.
개똥벌레 아이들의 달.
갈래머리 아이들의 달.
달아, 달아
어느덧
반백(半白)이 된 달아.
수염이 까슬한 달아.
탁배기 속 달아.- 시 '탁배기 전문


옥녀봉 정상의 느티나무. 홍래 누이가 시집간 부여 세도면을 관망하기에 좋은 곳이다.
 옥녀봉 정상의 느티나무. 홍래 누이가 시집간 부여 세도면을 관망하기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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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집 주모는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죽음을 아무도 알지 못해 죽은 지 열 달이나 지나서야 시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열 달이 지났다면 거의 육탈이 되었을 것이다. 삶보다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존재의 망각이란 말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두 사람은 지금쯤 저승에서 다시 만나 주거니 받거니 막걸릿잔을 주고받을는지 모른다. 이젠 혹 박용래 시인이 주모가 되고, 주모가 시인이 되어 술잔을 주고받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이 오는 길목마다 눈물 비친 사랑아

구장터를 나와 이번엔 옥녀봉을 향해 올라간다. 이곳에 오르면 부여 세도가 이웃집처럼 잘 건너다 보인다.

부여 세도로 시집간 홍래 누이가 보고 싶을 때면 시인이 이 곳에 오지 않았을까. 자신을 아껴주고 또 자신이 따랐던 홍래 누이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뒤에는 더욱 자주 이곳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정 많은 소년 용래는 강 건너를 바라보며 눈물지었으리라.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시 '구절초' 전문


누이 홍래는 그렇게 그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지지않은 한 송이 구절초였다. 가을이 오는 길목 길목마다 나부끼던 사랑이었다.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은 사랑이었다.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 부르는 단가 '추억'이 떠오른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행하신고.

아아, 여기서 세도까진 너무 멀구나. 박용래 소년은 누이의 숨결을 좀더 절실하게 느끼고 싶어 세도가 좀 더 가까운 포구로 내려간다. 그 옛날 박용래 소년이 밟았음직한 길을 따라 나도 포구로 향한다.

억새밭이 길게 객차를 이어단 기차처럼 포구를 지나고 있다.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억새는 노래하고 사이 사이에 낀 갈잎은 장단을 맞춘다. 이 좋은 날, 누이는 대관절 어디로 갔느냐. 누이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용래 소년은 무성한 억새밭을 헤치고 강가로 나아간다. 물결이 파닥거리는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한가한 포구 풍경. 논산천의 물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곳이다.
 한가한 포구 풍경. 논산천의 물이 금강으로 흘러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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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몹시 따랐던 홍래 누이는 강 건너 부여 세도로 시집을 갔다. 사진은 세도로 건너가는 다리인 황산대교(1987년 6월23일 준공).
 그가 몹시 따랐던 홍래 누이는 강 건너 부여 세도로 시집을 갔다. 사진은 세도로 건너가는 다리인 황산대교(1987년 6월23일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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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세월은 시간의 강 너머로 흘러가고, 누이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도 삭아졌을 무렵인 1970년대 말, 이곳에 온 박용래 시인은 고향을 이렇게 노래한다.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갯벌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백강 하류(白江下流)
노을 밴 황산(黃山)메기
에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시 '황산메기' 전문

애꾸눈이 메기가 사는 오염도 강. 달개비·민들레·엉겅퀴·괭이풀·까마귀·동박새·반딧불·베짱이·소금쟁이·물방개·버들붕어·메기·쏘가리 등 작고 여린 것을 사랑하던 시인에게 '애꾸눈이 메기'는 산업시대 공해에 병든 고향의 상징이다. 한쪽 눈을 잃어버린 메기처럼 안타까운 고향이여.

기러기처럼 다시 이 세상으로 날아왔으면

오후 5시. 왠지 모를 아쉬움에 옥녀봉을 한 번 더 오르고 나서 서창리 쪽으로 하산한다. 이제 강경천을 건너 채운들을 가로질러 논산까지 걸어갈 것이다. 

겨울 농부의 가슴을 설레고 설레게 하는 논산산업사 정미소 안뜰의 산더미같은 왕겨여 김이 모락모락 피는 아침 왕겨여 지나는 나그네
보기만 해도 배 불러라-시 '논산을 지나며' 전문(월간문학 1977.2)

강경에서 논산까지는 8㎞ 남짓 되는 거리다. 들길을 걸으며 비록 겨울은 아닐지라도 시인처럼 "보기만 해도 배 불어" 오는 기쁨과 만족을 누려보리라.

여인 하나가 홀로 한 손에 빈 병을 든 채 강경천변을 걷고 있다. 메뚜기 잡을 때는 벌써 지났는데 심심파적 삼아 우렁이라도 잡는 것일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박용래 시인도 어릴 적 저렇게 들판을 쏘다니며 메뚜기를 잡고 우렁을 잡았으리라. 채운 들녘을 지나 은진에 이르자 땅거미가 주변 사물을 완전히 삼키고 있다.

빈 병을 든 채 강경천변을 서성이는 여인의 모습.
 빈 병을 든 채 강경천변을 서성이는 여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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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하관(下棺)
선상(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시 '하관' 전문

땅거미를 "햇무리의 하관"이라고 한 시인의 표현이 놀랍다. '하관'이란 단어의 선택은 무의식적으로 연상한 누아의 죽음 때문인가. 햇무리가 하관하고 나면 저 멀리 세도 쪽으로 노을이 진다. 하늘이 토하는 짙은 울음이다. 이제 곧 이곳으로 "첫 기러기떼"가 날아올 것이다.

큰기러기 홍(鴻)자에 올 래(來)자를 쓰는 홍래 누이. 아아, 누이도 그렇게 기러기처럼 다시 이 세상으로 날아왔으면 좋으련만…. 그리 쉽게 가럈거든 당초에 이 세상에 나오지나 말지(임방울 단가 '추억'의 한 구절). 홍래 누이는 그에게 가눌 수 없을 만큼 큰 슬픔을 주었지만, 그만큼 큰 시의 그릇도 돼준 셈이다. '누이'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한국말이 또 있을까.

왜 하고많은 시인 중에 박용래인가

6시 반. 논산역에서 서대전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오늘 하루 나는 세상 떠난 지 이미 27년이나 지난 한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했다.

"오늘의 여행은 만족스러웠던가""라고 나에게 묻자, "아니"라고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대답한다. 그런데 하고많은 시인 중에 왜 하필 박용래 시인을 택했는가. 시는 세상의 더러움을 씻기는 한 방울 눈물이고, 그는 언필칭 '눈물의 시인'이기 때문이었지.

박용래 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은 고 이문구 선생이 쓴 행장기를 빼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 "부족한 자료를 가지고 니만큼이라도 더듬었으니 그래도 다행 아닌가"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잦은 자기 위로는 자칫 기만으로 흐르기 쉽다는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일은 대전 사정공원의 시비와 그가 오랫 동안 살았던 오류동, 그리고 그가 잠든 삼괴동 공원묘지에 들러야겠다.

덧붙이는 글 | 후편이 이어집니다.



태그:#박용래 , #강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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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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