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순경으로 경찰 입문
1979년 남민전사건 피의자 고문
1981년 전노련사건 피의자 고문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학씨 간첩조작사건 피의자 고문
1986년 반제동맹사건 피의자 고문
1988년 김근태 의원 고문
1988년 도주 및 잠적
1989년 전국에 지명수배
1999년 10월 자수
2000년 재판 거쳐 징역 7년 선고받고 복역
2006년 11월 출소
이 정도의 이력 소개만으로도 국민들의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을 선명하게 소환하는 사람이 있다. 5공 내내 아니, 그후로도 10년 동안 대한민국 곳곳에서 악명이 드높았던 이른바 '고문기술자' 이근안(70).
<중앙선데이>가 그를 지난 1일 인터뷰해 4일 오후 인터넷 뉴스사이트 <조인스>에 게재했다. 장중하고 비극적인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배경음악으로 동영상 인터뷰에 등장한 이씨는 비교적 담담한 어투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털어놓았다.
"그때는 그게(고문)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독재정권에) 이용당한 것이다. 10년 10개월 동안 집 천장 속에 숨어 지냈다. (정권이나 경찰 상층부에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감옥에서 독실한 신앙인이 됐고, 지난날 나의 모습을 반성한다"는 것이 이근안이 털어놓은 고백의 골자.
출옥 당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서 미안하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라고 말한 그는 현재 당뇨병과 고혈압, 신부전증 등을 앓고 있으며, 예순 아홉 늙은 아내가 건물을 청소하고 받아오는 월급 30만원과 자신이 받는 소액의 신앙간증 사례비로 생활하고 있다고.
이씨는 인터뷰에서 도피 당시의 상황과 수감생활을 비교적 상세히 이야기했다. 10년 10개월 동안 자신의 집 천장에서 살았다는 그는 감히 내려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도피한 이근안에게 정권 차원의 지원이 있었을 것'이란 세간의 의혹도 그렇지 않다고 일축했다.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들어가 4차례에 걸친 특진으로 경감에까지 오른 그는 간첩 잡는 게 애국인줄 알았다고 했으나, 감옥에선 심한 배신감과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간수는 물론, 같은 수형자들까지도 "저 사람이 고문기술자"라며 손가락질 했다는 것. 그 절망감을 잊기 위해 독방에서 성경만을 읽었고, 당연한 수순처럼 신앙인이 됐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그는 지난 2005년 자신이 고문했던 김근태 의원과의 어색했던 만남에 대해서는 "내가 그때 일에 대해 사과하자, 김 의원도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개인의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라는 말로 응대했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기사를 접한 일부 네티즌은 "죄값을 치른 만큼 참회하는 마음으로 새 삶을 살길 바란다"라는 위로 섞인 의견을 전하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수의 독자들이 "짐승만도 못한 저주받아 마땅할 저런 사람을 왜 인터뷰 한 것인가"라며 여전히 그를 향한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