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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 앞에 설치된 설치미술, 뒤에 보이는 건물이 브란덴부르그 문 .
 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 앞에 설치된 설치미술, 뒤에 보이는 건물이 브란덴부르그 문 .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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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가 함께 촬영한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 설치미술가 이은숙씨.
 사진작가가 함께 촬영한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 설치미술가 이은숙씨.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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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이었던 막내 아이가 엄마 등에 업힌 채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며 빙긋 웃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94세 아버지가 북한에 살아있을지 모르는 자식을 만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한국·독일 등에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 이은숙(52)씨가 주변으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베를린장벽을 콘셉트로 한 작품 '사라진 베를린장벽(vanished Berlin Wall)'을 계획한 이유는 단순했지만 그 만큼 애절한 것이었다.

부드러운 플라스틱 섬유와 산뜻한 느낌을 주는 형광색의 네온 빛이 감도는 장벽을 구경하고 만져보며 사람들은 신기해 하며 다시 생긴 베를린장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렇지만 장벽, 한 켠에 있는 짧은 설명을 천천히 읽은 후에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장벽을 다시 둘러봤다.

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앞에 설치된 설치미술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앞에 설치된 설치미술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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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친 년'? 아버지의 '천사' 되리라는 믿음 있어요"

이산가족 아버지를 둔 미술가 딸이 아버지가 북에 있는 자식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소망하며 작품을 구상했지만, 정작 아버지는 과년한 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며 어서 정상적 삶으로 돌아올 것을 재촉하신다. 

다행히 독일을 비롯한 세계언론매체가 작품에 관심을 보이며 이은숙씨에게 힘을 실어줘, 아버지의 꿈을 이뤄드리는 좋은 딸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언론매체를 통해 작품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 여인에 의해 다시 쌓인 '베를린장벽'은 현지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켜 11월의 쌀쌀한 저녁 날씨에도 20명 남짓한 프로·취미 사진작가들이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아버지가 북에 있는 자식을 만나게 되면 당신은 '미친 년'에서 아버지의 '천사'가 되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한 외국기자로부터 들었어요. 쉽지 않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고요. 어디에서 그런 확신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재정적 지원은 둘째 치고 무너진 베를린장벽을 다시 세우는 작품을 계획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우려(냉소)를 극복하고 세상에 선보인 이번 작품이 아버지와 이북의 다른 형제와의 상봉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며 이은숙씨는 11월의 쌀쌀한 베를린 밤을 지키고 있다. 

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 앞에 지난 1일부터 전시된 이은숙씨의 작품은 9일까지 전시되며 통일 당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11월 9일, 장벽을 허무는 퍼포먼스가 이씨에 의해 진행될 예정이다.

다음은 설치미술가 이은숙 씨와 인터뷰.

- 왜 이번 작품을 베를린에서 계획하셨는지? 분단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곳은 한국인데.

"우리처럼 나뉘어 있던 동서독은 17년 전 통일되었고 브란덴부르그 문은 통일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와 같은 분단을 경험한 독일인들에게 분단은 당연히 가슴에 와 닿는 주제다. 이러한 기억을 갖고 있는 이곳에서 세계를 향해 우리의 분단 현실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었다. BBC·로이터·러시아 등 많은 언론매체가 이번 작품을 취재하며 관심을 보였다. 전세계에 한국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전시를 기획했더라면…. 설치미술이라는 것이 주위 환경이 매우 중요해 어디에서 하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이유였다."

- 분단의 상징인 장벽을 콘셉트로 하셨는데….
"차갑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콘크리트 장벽과 달리 이번 작품의 콘셉트가 된 장벽은 투명하다. 장벽이지만 투명해서 반대편에 있는 상대를 볼 수 있다. 또한 딱딱하지 않고 아주 부드럽다. 그렇게 서로 통할 수 있고 부드럽게 만질 수 있고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 독일통일 당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11월 9일, 이번에 설치한 장벽의 한 쪽을 허문 후 반대편으로 나가는 퍼포먼스를 직접 할 예정이다."

"장벽이지만 서로를 볼 수 있다, 손을 내밀 수 있다"

작업 중 화상을 입은 이은숙 작가의 손.
 작업 중 화상을 입은 이은숙 작가의 손.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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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에 사용된 네온 소재가 매우 독특하게 느껴진다. 장벽의 무거운 분위기보다 화려한 분위기가 조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데 네온을 소재로 사용하게 된 동기는?

"1986년, 작업 중 오른손을 비롯한 신체에 40%의 중화상을 입었던 경험이 있다. 당시, 의사는 화상을 입은 오른손은 더 이상 못쓸 거라고 했다. 3년 동안 8번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삶·내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후 '내세'라는 주제를 갖고 작업을 하면서 내세를 상징하는 빛으로 UV라이트를 활용했다. 그렇게 네온을 소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나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 1996년, 개인전을 가졌는데 반응이 안 좋았다. 그 전시회를 방문했던 독일(프랑크푸르트)의 한 박물관 큐레이터가 1997년, 나를 독일로 초대해 독일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 작품이 설치된 브란덴부르그 문 주변에 네온이 별로없어 작품을 설치하기에 적합했다. 네온이 현란한 광고제작에 많이 사용되는 한국에 이번 작품이 설치된다면 아무래도 의미가 달라진다. 같은 작품이라도 독일에서 느끼는 것과 한국에서 느끼는 것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 길이 22m, 높이 3m 가량의 거대한 작품을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이 드셨을 것 같은데….
"재정 후원을 받지 못해 고생을 많이 했다. 예술활동을 지원해 주는 한국의 관련 기관에서는 독일에서 나의 계획에 대한 허가가 안 날 거라는 반응을 보였고 막상 허가가 났음에도 여전히 외면했다. 충분한 광고 효과 있음에도 불구, 대기업 등에서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신정아 같은 사람은 후원을 잘 받는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너무 없는 것 같다.

가족(남동생)의 후원을 통해 이번 작품을 마칠 수 있었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전시 후 이번 작품을 팔 계획이다. 작품을 취재했던 한 현지언론에서 작품 판매를 지원해 주고 있는데 전체가 아닌 작품의 일부를 그것도 헐값에 팔아야 하는 상황이라 마음이 아프다. 전체를 인수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 이번 행사를 통해 기대하는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북한대사관에 작품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이산가족이신 아버지에 대한 편지를 보냈다. 자식 넷을 북한에 두고오신 아버지는 자식들이 더 이상 생존해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봉의 희망을 거의 접고 있다. 그렇지만 손자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을 한편으로 갖고 계신다.

북한대사관에 아버지의 사연을 설명하며 자식을 찾아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전시가 시작되는 날 있었던 기자회견에 누군가 참석해 주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북한대사관에 알렸지만 연락이 없었다. 세계 여러 매체들의 기자들이 이번 작품에 관심을 보이며 나에게 희망을 갖자는 말을 하고 있고 나도 희망을 갖고 있다. 네 명 자식 가운데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어떤 외국신문 기자가 통일이 되어서 아버지가 자식을 만나기를 원하냐고 물었는데 그것은 너무 먼 일이다. 94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가 자식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작품에 북한이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식을 만났다는 소식이 다시 세계에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품었던 생각이다." 

"94세인 내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북녘 자식들 만나시길"

투명한 설치미술품 장벽을 통해 보이는 브란덴부르그 문.
 투명한 설치미술품 장벽을 통해 보이는 브란덴부르그 문.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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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께서 가족을 북에 둔 이산가족이라고 하셨는데 아버님 이야기를 조금 자세히….

"올해 94세이신 아버지는 1951년, 북에서 함경남도 신상면에 사셨고 그 곳에서 신상철공소를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남한에서 자수성가 하신 편인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차가 많아서 아버지가 북에 가족을 갖고 계실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정확한 것은 몰랐다. 아버지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저 마음에만 묻고 사셨던 것 같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3년 전, 그러니까 2005년이다. 북한을 떠날 때 큰 아이가 열 , 막내 가 한살이었다고 한다. 자식들의 이름은 동원·정숙·동현·동이이다. 엄마 등에 업혀있던 막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처다 보며 빙긋 웃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굉장히 많이 울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는 내내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 생각을 하며 많이 울었다.

어머니도 함경도 출신이다. 전쟁이 나면서 잠시 머물다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월남했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셨다."

- 아버님께서 고령자이신데 이산가족상봉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으셨는지….
"오래 전, 외국을 통해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직접 알아보시려고 많이 노력하셨는데 돈만 날리고 아무도 못 찾으신 후 결국 포기하셨다. 그 후 적십자를 통한 신청도 하지 않으셨고. 자식이 살아있어서 상봉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셨겠는가. 그렇지만 희망이 안 보이니까 그냥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포기하신 것 같다. 

어머니는 적십자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2000년 평양에 가셔서 남동생을 만나고 오셨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다고 했다. 분단이 길어지고 이산가족이 고령화되면서 형제간 상봉의 가능성보다 부모자식간의 상봉이 가능성이 그나마 더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경우처럼 부모와 자식이 상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 아버님 세대와는 다른 시대를 사셨던 선생께서 북한관련 사안에서 아버님과 생각 차이 등으로 갈등은 없었는지.
 
"전쟁을 경험하셨던 부모님은 당연히 북한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아주 안 좋게 보셨고 북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비슷해서 너희는 전쟁이 무엇인지 상상도 못한다고 늘 말씀하신다. 부모님과 다른 세대이기는 하지만 그런 걸로 갈등이 있었던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 선생님께서 아버님의 이북 가족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고 계시는지.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아버지를 항상 옆에 두고 살았고 지금도 여전히 울타리가 되어주시는데 이북의 가족은 아버지 없이 지금까지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북의 가족들을 만난다면 도움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 없이 자란 형제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남한의 가족들이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아버님께서 이번 작품에 대해서 어떤 평가, 의견을 갖고 계실지 궁금하다. 직접 이곳에 오셨는지….
"아버지는 항상 나를 '미친 년'이라고 한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정상적 삶으로 돌아오라고 하시고. 물론 아버지께서는 이곳에 오지 않으셨다. 이번 작품에 대해서도 아버지께 설명자료를 보내드렸지만 여전히 이해 받지 못하고 있다.

한 외국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번 작품을 통해 아버지가 북에 있는 자식을 만나게 되면 당신은 '미친 년'에서 아버지의 '천사'가 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쉽지 않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어디에서 그런 확신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믿음이 있다."

"내가 죽어도, 내 작품이 꿈 이루어주리라"

장벽을 살펴보고 있는 이은숙씨. 장벽에는 남북이산가족 5천명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
 장벽을 살펴보고 있는 이은숙씨. 장벽에는 남북이산가족 5천명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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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활동에 남북 문제 등의 사회 문제를 주제로 많이 다루시는지….

"독일에서 활동하면서 분단 문제를 주제로 작품을 하기 시작했다. 2005년 베를린의 한 갤러리에서 전세계에서 UV라이트를 사용하는 작가들의 전시회가 있었다. 그 갤러리는 과거 베를린 경계가 있던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갤러리 안에 있는 분단의 흔적을 보며 남과 북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것을 콘셉트로 '같이 살자'라는 주제의 작품을 만들었다. 10m 크기의 집을 지었는데 그 때 작업하면서 아버지를 많이 생각했다.

작년에는 2차 대전 후 포츠담회담이 열렸던 기간에 맞춰 회담장에서 내려 보이는 강에 남북을 상징하는 작품(두 척의 배)을 띄워 2주간 물 위에서 생활을 했다. 그 때 이번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항상 내가 있는 곳에서 작품을 위한 주제·영감을 얻는다. 다른 나라에 있으면 그곳의 상황에 맞는 주제를 갖고 활동했을 것이다."

-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당분간은 독일에서 활동할 계획이고 그 후 어느 곳이던 가장 좋은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에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할 것이다. 좋은 작품을 통해 예술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작가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다. 살아서 이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의 작품이 언젠가 나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그:#이산가족, #브란덴부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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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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