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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민둥산 수요여행(11월 1일)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약간의 비소식이 있어 조금 불안했다. 지난해 민둥산 마지막 산행 때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민둥산 흙은 검은 찰흙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물기가 가해지거나 서리가 내리면 무척 미끄럽다.


그런데 그날 새벽 진눈깨비가 내렸다. 나는 괜찮았지만 산행을 처음 하는 모녀 팀 때문에 거의 한 시간동안이나 사투를 벌였다. 내가 올라갔다 오는 동안 꼼짝 않고 나무를 붙잡고 버티던 모녀는 나를 보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가워했다. 가져간 신문지를 깔고 한 발씩 떼다가 겨우 단단한 땅을 밟았을 때의 감격스러움. 그게 다 민둥산을 깔보고 구두를 신고 온 탓이었다. '민둥산' 하면 편평한 산일 거라 짐작한다. 사실은 정상에 나무가 없고 밋밋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오늘은 느닷없이 내장산을 간다는 손님이 나왔다. 작은 종이에 입금한 계좌번호까지 적어서 들고. 우리는 긴장했다. 모객이 20명이 안 될 경우 보통 2, 3일 전에 취소를 하는데, 손님이 못받았다면 이건 보통 실수가 아니다. 손님께 죄송하다고 말하고 이왕 나오신 거 민둥산이라도 다녀오시라고 했다. 내장산 입금은 돌려드리겠다고 하고.

 

아침마다 벌이는 건 자리전쟁이다. 오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1순위 자리는 제일 앞자리. 그중 내 자리(출입문 쪽)를 빼면 운전기사 뒷자리뿐인데,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보통 서너 팀이다.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손님(기사님 아내)이 있었다. 본래 자리 주인은 뒷자리로 적당히 주리라 마음먹고, 특별손님에게 그 자리를 배정했다.


앞자리 달라고 전화했었다는 손님은 바로 뒷자리로 정해드렸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말, '멀미가 심해지면 제 자리로 오세요. 제가 보조석으로 가면 되니까요.' 그러나 여태 그런 적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말 한 마디에 그분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고 자연스레 치유가 되어 옮길 필요가 없어진 것.


그런데 서울 잠실에서 올라온, 본래 앞자리 주인 대단하시다. 이분 올라오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 앞을 왔다갔다 한다. 자신은 앞자리에 앉지 않으면 토해서 도저히 못간다는 것. 워낙 강하게 말하니까, 특별 손님이 내 옆자리로 자동 이동, 본래 주인 그 자리를 제대로 차지한다. 뒷자리 손님, 그 분 제스처에 기가 찼는지 그들을 보면서 조소를 머금는다. '맞어 저렇게 강해야 하는 겨' 하는 표정이다.

 

치악 휴게소에서 쉬고 다시 출발하는데 아까 내장산 가려고 나왔다는 손님이 전화를 받고 있다. 약간의 언성과 긴 대화. 그리고 내게 전화가 왔다. 입금 된 게 전혀 없어서, 만일에 (그분 통장에서) 출금을 했다면 우리가 입금 금액을 돌려드리고, 그게 아니라면 손님이 오늘 민둥산 여행 대금을 입금하기로 했다고. 인터넷 입금이었다는데 아마도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


어찌 됐든 그 손님은 마음이 불편할 게 뻔하다. 나는 즉시 손님에게 가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죠?' 하고 묻는다. 그렇단다. 그래서 '그렇지만 이왕 오셨으니까, 그 사항은 뒤로 미루고 오늘은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부드럽게 제안한다. 그제야 그분 얼굴을 펴며 미소를 짓는다.


앞자리 손님들 내내 궁금하다. 얼마쯤 올라가야 억새가 있는지가.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한다. 억새는 꼭 정상에 올라가야 볼 수 있다. 14만평에. 14만평의 환상을 당장 보고 있는 듯 잠시 황홀한 표정들이지만 깔딱 고개 같은 가파른 길을 설명하자 모두 먹먹. 그래도 난 씩씩하게 앞장선다. 골목대장처럼 모두 나를 따르라(?) 무언의 한 마디를 외치면서.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아 미끄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쓸쓸했다. 태양이 가을볕치고는 퍽 강렬한 빛을 내려보내 주었지만, 쓸쓸한 산을 위로해주지는 못했다. 우선 인파가 팍 줄었다. 관광버스 두세 대가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경이 좀 쓰였다. 산행하는 사람들이 적으니까, 딴 길로 갈까 봐서. 길 중간중간에 서서 뒤에 오는 분들을 기다려주었다가 간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먹을 게 저절로 들어온다. 초콜릿, 과일, 곶감. 그걸 다 먹으면서 올라가기도 곤욕스럽다. 더러 배낭에 넣어 가기도 하지만 가다가 배낭을 내려 넣는 것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편하니 씩씩거리면서도 하나씩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걷는다.


극성스럽게 파헤치고 들어가 수세미를 만들어 놓았던 억새 숲이 이젠 잠잠하다. 꼭 머리 풀어헤친 미친 여자의 머리칼 같은데, 이젠 버림까지 받아 내팽개쳐진 느낌이다. 두 명이 사진을 찍으려고 억새 숲으로 들어간다. 정상에서 장사를 하던 분이 소리친다. '거기 들어가지 말아요! 거기 나와요!' 거듭거듭 나올 때까지 외친다. 장사가 안되니까 바야흐로 억새 숲이 보이는가.

 

나도 여유를 찾아 증산초교 쪽까지 내려가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미 쇠퇴해진 숲이다. 한 마디로 신명이 안 난다. 찍은들 뭐하나, 은빛도 아니요, 출렁거릴 줄도 모르는데. '으악새'도 울 때가 절정이었다. 이젠 울 기운도 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때를 놓칠까봐 그렇게 구슬피 울었나 보다.

 

그런데 구슬피 울 때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야호 외치는 구령소리에 묻혀 조금도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치 내 젊은 날의 한 때처럼... 어른들이 한참 때다, 말할 때 우린 실감나지 않았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그때가 절정이었다. 아마도 호시절은 누구나 다 식물까지도 그렇게 보내는가 보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찰칵, 기념사진 찍어주고 홀연히 하산. 풍성해서 요란했던 가을은 이렇게 가고 있다. 앞산의 단풍은 점점 색을 더해가고 있는데, 은빛마저 잃은 억새는 스스로 가라앉아가고 있다. 서걱서걱 비벼대던 찬란했던 기억을 뒤로 하고.

 


태그:#으악새, #민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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