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미지는 ‘모방을 좋아하고 강대국에 빌붙어 사는 나라’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일본관(觀)은 대개 원폭 투하 이후의 미일관계에 기초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전의 일본, 정확히 말하면 19세기 이전의 일본은 오늘날과 달랐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일본의 발전을 가로막은 최대 요인 중 하나는 바로 한민족이었다. 한민족은 일본과 중국의 직접 교류를 차단함으로써 그 속에서 이익을 창출하려 했다. 그리고 한민족은 여몽연합군의 공격 때처럼 어떻게든 일본을 견제하여 그 싹을 제거하고자 했다.
전성기의 고구려가 백제·신라와 대륙의 교류를 견제한 것처럼, 한민족 역시 중국과 일본의 교류를 어떻게든 견제하려고 했다. 이러한 한민족의 방해 때문에 일본은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체제에서 언제나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한민족이 조공무역체제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지위를 차지한 데에 비해, 일본은 늘 불안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러던 일본이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의 막바지인 16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의 막부가 통제력을 상실한 채 지역할거의 양상이 나타난 이 시기에, 지방 세력자인 다이묘들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경제·군사적 실력 양성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그런 실력 축적을 바탕으로 일본경제는 서서히 동아시아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민족이 중일교류를 견제하고 중국 역시 대일교류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 16세기 이후의 일본은 중국과의 조공무역에만 목을 매달기보다는 좀 더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렸다. 중국에만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그 같은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1560년 이후의 무역 다변화였다. 아시아의 동쪽 끝인 일본은 살아남기 위해 전 아시아를 향해 장사판을 벌이기로 하였다. 물론 그때까지도 일본은 여전히 중국을 ‘짝사랑’하고는 있었지만, 예전처럼 중국과의 조공무역에만 목을 매달지는 않았다.
이후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은과 구리를 수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유황·장뇌·철·검·칠·가구·술·차·쌀을 인도와 중동에까지 수출하였다. 피터 클라인의 연구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인 1604~1635년의 32년 동안 동남아로 공식 출항한 일본 선박은 모두 355척이라고 한다. 조선이 동아시아라는 틀에 갇혀 있을 때에 일본은 이처럼 전 아시아를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6~17세기에 일본은 중국과의 직접 교역이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마닐라나 호이안(베트남 항구)을 통해 우회적으로 중국산 비단을 구입하고 그 대가로 자국산 은을 지급하였다. 조선이 가로막으면 동남아를 통해서라도 중국과 교역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클리스토퍼 호웨의 연구에 의하면, 16~17세기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중에서 대외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10%에 달했다고 한다. 무역이 불리한 지리적 여건을 극복하고 대외무역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위와 같이 일본은 중국과의 무역이 방해를 받아 정상적으로는 생존을 모색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굳이 중국에 얽매이기보다는 동남아로 인도로 중동으로 자신의 활로를 적극 모색했다. 한편, 17세기 이후의 일본은 조선에게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라’고 요구하기보다는 동남아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대중국 무역의 길을 열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의 조선이 오로지 대중국 무역에만 ‘빌붙어’ 살고 있을 때에, 조선처럼 중국에 ‘빌붙어’ 살 기회조차 없었던 일본은 아예 모험의 길로 나선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의 무역에 ‘빌붙어’ 산 조선보다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일본이 결과적으로는 더 잘살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9세기말 사이에 벌어진 조선과 일본의 국력 역전은, 일본의 새로운 선택이 낳은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구 문제 역시 이 같은 시각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구는 기본적으로 일본과 중국의 공식무역이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시각에서는 왜구 혹은 해적이지만, 일본의 시각에서는 밀무역업자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무역상들은 밀무역을 하다가 들키면 해적으로 돌변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구의 활동으로 인해 일본은 결과적으로 조선에 비해 중국과 더 많이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이 공식적인 조공무역의 틀 속에 갇혀 있을 때에, 일본은 ‘자유롭게’ 바다의 해적이 되어 중국 연안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러므로 왜구의 활동은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질서를 와해시키는 데에 일조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안주하면서 비교적 ‘편안한 삶’을 영위한 조선. 그 대가로 중국에 사대하면서 팍스 시니카에 순종한 조선.
그에 비해 19세기 이전의 일본은 중국과의 조공무역이 제약을 받는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아예 동아시아의 틀을 벗어나 동남아·중앙아·중동으로 진출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어떤 삶의 형식이 더 이로운 것일까?
조선은 강대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았다. 그래서 한 순간은 편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온실’ 바깥의 잡초에게 경쟁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본은 15세기 이전만 해도 조선처럼 살고 싶었으나, 조선이 방해하고 중국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통에 조선처럼 중국에 의지하면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일찍부터 동아시아의 틀을 벗어났다. 그리고 19세기말에 가서는 조선과 중국 모두를 누르는 데에 성공하였다.
어떤 삶이 결과적으로 더 나은 것일까?
대한민국이 미국의 핵우산 밑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가는 이 순간에도, 온실 바깥에는 미국과 무관하게 독자적 삶을 개척하는 나라들이 있다. 지금 당장에는 대한민국의 삶이 편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온실 바깥의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할 날이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