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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숲

1.

아직 파리에 가보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 서울 회현동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한불문화재단)에서 두어 달 배웠던 프랑스어도 이젠 거의 다 잊어버렸다. 그래도 “Je t’aim(널 사랑해)” 만큼은 잊지 않은 걸 보면, 파리에 대한 내 짝사랑은 지금도 여전한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 파리에 갈 기회가 생긴다 할지라도 다시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그 무수한 격변화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말은 배우기는 어려워도 우리 귀에는 얼마나 우아하고 감미롭게 들리는가! 프랑스어가 일찍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외교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겠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어 발음이 너무 부드러워서 낯 간지럽고 어떤 경우에는 느끼하고 역겹기조차 하다고 말한다. 그래,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모든 것에는 동전처럼 양면이 있는 법이니까.

그걸 인정한다면, 당신도 이제 <파리에 가면 키스를 훔쳐라>라는 도발적인 제목과 자극적인 빨간색 표지가 시선을 확 끄는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이다. 그래야 예술과 외설, 관능과 퇴폐, 도취와 타락을 넘나드는 기이한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종횡무진 펼쳐보이고 있는 지은이의 현란한 수다에도 길을 잃지 않고 끝까지 읽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2.

"파리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전부 러브 스토리다. 보상받았거나 받지 못했거나, 다 알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거나, 영적이거나 지적이거나 세속적이거나 운명적이거나 한 사랑이야기들이다. 청중을 끌만한 요소다 싶으면 모조리 조금씩 가미하려고 하는 서툰 영화 각본처럼, 나를 파리로 데려온 사랑에는 그 모두가 조금씩 얽혀있다." (17쪽)

지은이 존 벡스터가 일찌감치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파리를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책의 시작은 러브 스토리다. 그렇다면 이거, 너무 흔해빠진 게 아닌가? 이어지는 글을 읽어보면, 제법 이름이 알려진 영화 저널리스트인 그가 안정된 삶이 보장된 미국 LA를 떠나 낯선 땅 파리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나오는데, 과연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극적이고 낭만적인 것이다.

그는 이혼 후에 우연히 한 심령술사의 도움으로, 10년 전 파리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연인 마리-도미니크와의 즐거운 한때를 최면상태에서 다시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연락한 것이 만남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따라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녀와 재회한 지 3주 만의 일이었고 그는 이미 쉰 살이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전격적으로(그러니 당연히 아무 준비도 없이) 파리 시민이 된 그가 약 1년 반 동안 낯선 문화 속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유머러스하게 기록한 ‘파리 정착기’가 담겨 있다. 동거, 임신, 이사, 휴가, 출산,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관찰한 파리의 독특한 음식 문화, 사교 문화, 주거 문화 등을 그는 경쾌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그 중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화장실 문화, 특히 공중화장실 안에 숨어 있다가 화장실 이용자에게 동전을 요구하는 ‘마담 피피’라고 불리는 노파에 관한 이야기였다. 화장실에서 전제군주처럼 군림하는 이 여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장실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팬티를 적실 수도 있다고 그는 충고한다.

하지만 정작 그가 가장 주목한 것은 파리의 성 문화였다. 섹스란 음식이나 정치 또는 날씨처럼 일상적이고 또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프랑스인들의 자유분방한 성 의식은 파리를 세계에서 성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도시로 만들었다. 오죽하면 프렌치 키스, 프렌치 레터(콘돔), 프렌치 포스트카드(야한 사진)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고급 음식의 보고로 여겨지는 ‘프랑스 요리’조차도 ‘오럴 섹스’와 같은 성적인 의미와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단언한다. 섹스와 고기는 프랑스인이 가장 관심을 갖는 대상이며, 파리라는 도시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바로 고기를 사고파는 장소라고.

그래서 그는 에펠 탑이나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이나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은밀하게 훔쳐보는 섹스 숍, 스트립쇼가 벌어지는 클럽, 에로틱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다양한 소재와 테마로 꾸며 놓은 유곽 등 파리의 홍등가로 우리를 이끈다. 이 책에서 그가 기획한 파리 여행의 테마는 ‘에로틱 파리 스케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은밀한 파리의 이면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화가, 작가, 사진작가, 영화감독 등 이른바 예술가들이다. 일찍부터 파리가 ‘예술의 도시’로 불리게 된 것은 파리에 몰려든 이런 예술가들 덕택이었는데, 잘 발달해 있던 고급스럽고 세련된 파리의 홍등가는 이들 예술가들이 쉽게 거부하기 힘든 강력한 매력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예컨대,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파리 사창가의 어느 방에서 훔쳐보면서 자신의 욕망을 달랬으며, 게이 시인 장 콕토는 연기 자욱한 아편굴에서 시적 몽상에 빠져들었고,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파리의 매음굴을 드나들면서 작품의 착상을 얻기도 했다. 이처럼 이방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짊어지고 온 고뇌의 납덩이를 황금으로 탈바꿈시키는 파리의 연금술은, 그 누구보다도 예술가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타인의 시선에 병적인 공포를 느껴 욕실에서만 관계를 가졌던 초현실주의 영화감독 루이 브뉘엘, 배신한 애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의 포르노그라피를 책으로 만들었던 사진작가 만 레이, 유명한 성애영화 <엠마뉘엘>의 실제 인물이었던 마리아트와 정신적 성애를 즐겼던 사진작가 피에르 몰리니에, 난교 파티에 열광했고 그것을 <카트린 M의 성생활>이라는 책으로 펴낸 미술평론가 카트린 밀레 등 수없이 많은 예술가들의 비밀스런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매음굴, 남색, 포르노그라피, 동성애 등 삼류 통속 연예 잡지에나 어울릴 것 같은 이러한 외설적인 이야기들이 조금도 추하지 않고 또한 난잡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지은이 존 벡스터의 글 솜씨 때문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영화 이야기를 적재적소에 섞어 가면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 주듯이 속도감 있는 묘사와 생동감 넘치는 대화로 펼쳐 보이고 있는 파리의 이면은 관능과 도취로 넘실대지만 결코 잔을 넘치지는 않는다.

‘프랑스적’이라는 것은 ‘성적인’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교양과 관련된 용어 대부분이 또한 프랑스어에 빚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그가 보여주는 파리의 현란한 에로티시즘도 풍부하고 깊이 있는 책 읽기에 힘입은 그의 교양에 의해서 잘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책 사냥꾼: 어느 책 중독자의 수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균형 감각이,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가 함께 드나들던 바와 카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초판을 발행해 주고 이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을 피하려는 사뮈엘 베케트에게 은신처가 되어 주기도 했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중세 파리의 해골들과 직접 마주칠 수 있는 지하 비밀묘지 카타콤 등 좀더 문화적이고 진지한 장소로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또한, 파리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성공한 예술가들이 환락의 축제를 즐기는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그 대열에 끼지 못한 낙오한 이들도 함께 득실거리기는 곳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도 한다.

"파리는 문화, 금융, 정치, 예술의 중심지이므로 프랑스 미술과 문학 그리고 영화에서 ‘정말 근사한 곳’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피상적으로나마 미국 영화나 책도 이런 평판을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삼십 년대 파리 체류 작가들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파리의 아메리카인> <화니 페이스> <키다리 아저씨> 그리고 <내가 마지막 본 파리>가 만들어낸 파리의 신화는 왠지 모호하다. 파리를 배경으로 삼은 미국 영화나 책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는 이런 이들이다.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술에 전 실패한 소설가, 나이 먹은 배우, 만년 학생 또는 자기 재능을 팔 수 있는 유효기간을 훨씬 넘겨버린 시인.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다. '파리에 가는 건 영혼을 살찌우는 것이지만, 그곳에 머물다간 영혼을 잠식당한다.'" (168∼169쪽)

3.

그렇다. 에로티시즘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있다. 어느 쪽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예술과 외설, 관능과 퇴폐, 도취와 타락으로 그 운명이 갈린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 <파리에 가면 키스를 훔쳐라>를 <파리에 가면 키스만 훔쳐라>로 고쳐 불러본다. 입술을 훔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가슴을 훔치고 더 욕심을 내서 허리띠 아래로까지 손이 내려간다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기에.

그런 절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파리 여행길에 이 책을 들고 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다. 여느 여행 안내책자에서는 보기 어려운 파리의 진풍경을, 장밋빛으로 물든 에로틱한 파리의 속살을, 이 책은 너무 가깝지도 않고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매력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파리에 가면 키스를 훔쳐라 : 에로틱 파리 스케치> (We’ll Always Have Paris) / 존 벡스터 (John Baxter) 지음 / 이강룡 옮김 / ㈜도서출판 푸른숲 펴냄 / 2007년 7월 31일 첫판 1쇄 / 값 12000원



파리에 가면 키스를 훔쳐라 - 에로틱 파리 스케치

존 백스터 지음, 이강룡 옮김, 푸른숲(2007)


#파리에 가면 키스를 훔쳐라#존 벡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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