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다른 직장에 다닐 때다. 부근에 한 음식점이 있었는데 맛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손님들이 줄어들었다. 몇 달 지나니 '○○ 숯불갈비'로 간판이 바뀌었다. 새 식당 들어섰다고 동료들과 함께 점심 시간에 갔더니 이전 주인 그대로였다. 간판을 바꿨으면 주방장이라도 바꿀 것이지 맛은 여전히 맹탕이었다. 역시 가는 사람이 별로 없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는 '○○ 수산'이라는 간판이 걸렸다. "야! 새 식당이 들어섰나?" 하고 가봤더니 이전 식당 주인 아저씨가 그대로 손님을 맞는다. 간판만 바꾼 것이다. 역시 음식 맛이 없었다. 몇 달 안돼 '신장개업' 플래카드가 나부끼더니 "○○ 장어구이"라는 식당이 들어섰다. "설마 이번에는…" 하고 갔더니 주인장은 여전히 그대로다. 연이은 '신장 개업쇼'에 식당 주인도 무안했던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았다. 나는 일단 식당 안에 들어섰으니 5000원짜리라도 사먹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식당 문 들어서다 그 아저씨를 보자마자 "끄응~" 신음 소리를 내며 그냥 돌아서 나가버렸다. 그 식당 아저씨는 인간성 자체는 착한 사람이었다. 40대 후반이었는데 처자식 먹여살리려고 간판을 몇 번씩이나 바꿔달면서 끈질기게 버티는 모습이 너무 처량해서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식당의 가장 기본인 음식 맛이 없는데 어쩌랴? 똑같은 주인이 간판을 바꿨으면 돈이 더 들더라도 솜씨 좋은 주방장이라도 고용할 것이지 이를 안한 것은 기본적인 태도가 잘못된 것이다. 결국 그 자리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입주해서 새 식당을 차렸다. 음식 맛이 괜찮았고 장사가 잘 됐다. 신장개업쇼 잘 통하지 않는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신장 개업과 이 식당의 간판 바꿔달기가 뭐가 다른가? 정동영 후보가 지난 6일 비정규직법 철폐를 주장하며 장기간 농성 중인 이랜드 노조원들을 찾았다. 그는 농성현장에서 수십여 명의 노조원들과 즉석 토론을 했다.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칭찬할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씁쓸했다. 아마 대선이 임박한 게 아니었다면, 특히 그가 이명박과 이회창이라는 보수 후보들에게 한참 밀리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랜드 농성장을 찾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동영씨는 후보가 된 뒤 자이툰 부대 파병 연장에 반대, 차별없는 성장 강조 등 부쩍 진보 색채를 내고 있다. 이것 역시 후보가 되기 전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정동영 후보여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손학규씨나 이해찬씨가 대통령 후보가 됐더라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른바 범여권의 신당 쪽 사람들이 항상 이런 식이라는 데 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선거 운동은 우파적으로 하고 집권 뒤 정책은 좌파적으로 폈다는데 이들은 선거 운동은 좌파적으로 하고 정책 집행은 우파적으로 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좌측 깜박이 켜고 우회전 하는 것은 법규 위반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애초 공약과 달라졌으면 조금이라도 미안해야 할텐데 "우리가 하는 것은 항상 옳다"는 억지로 일관했던 게 노무현 정부와 범여권 신당이다. 간판 바꿔 달기 신장 개업쇼에 국민들이 진절머리가 났는데 여기에 선거 때면 늘 보던 '진보 앵벌이'로 표를 모으겠다고 나섰으니 이명박 1위, 이회창 2위, 그보다 한참 뒤떨어져 정동영 3위다. '반 부패 연대'가 등장하는데 뜬금 없어 보인다. 정윤재 전 청와대 비서관이나 국세청장이 상납 받은 사건, 신정아-변양균 사건 등 신당 쪽도 반 부패를 당당하게 내놓을 처지는 아니다(노 대통령은 대통합민주신당 당원이 아니라거나 이전 정권 시절에 비하면 10분의 1 식의 말 장난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현 집권 세력이 성과 가운데 하나로 자랑하고 싶은 게 정치 자금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다는 것일 텐데 현실은 차떼기 몸통인 이회창씨가 당당하게 컴백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반성이 가능한가? 반 부패 연대의 한 계기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일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경제 방향은 사실상 삼성경제연구소가 만들고 있다는 비아냥이 나왔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그동안 국민들은 범여권에게 많은 기회를 줬는데 계속 기대를 배신해왔다. 그에 대한 분노가 현재 보수 후보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 범여권은 무능하다는 인식을 받는 것도 고통인데 여기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인식까지 겹쳐 설상가상이다. 현재 단계에서 범 여권 단일화가 이뤄진다면 현재 지지율로 볼 때는 정동영 후보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 상황에서 만약 그가 로또 당첨된 것처럼 기적적으로 대통령이 됐다고 하자. 그럴 경우 현재 범 여권은 "정말 죽을 뻔 했다, 천신만고의 기회를 준 국민들에게 감사하고 거만하지 않게 진짜 개혁을 하겠다"며 새 출발의 각오를 다질까? 아니면 "봐라 그래도 결국 국민들은 '미워도 다시 한번'이다, 중간에 좀 정치 엉망으로 해도 막판에 뒤집으면 된다"고 속으로 생각할까? 이제까지 범 여권의 행태로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실 열린우리당은 아무리 늦어도 올 초 일부 이탈 세력이 생겼을 때 이미 사라졌어야 할 정당이다. 부채비율이 수천 %에 이른 기업처럼 청산됐어야 할 정당이 '대통합 민주신당'이라는 이름으로 '추억의 마케팅'을 시도했고 대통령 후보를 정할 때도 친노 대 반노의 싸움이라는 엉뚱한 경선을 벌였다. 삼성의 문제가 자기가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하는 줄 안다는데 있다. 삼성은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대표 선수라고 착각한다. 신당 쪽 사람들도 비슷한 착각을 하는 게 문제다. 정동영 후보 쪽이 이런 착각에서 깨어나야 신장 개업쇼와 간판 바꿔달기, 그리고 '진보 앵벌이'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범 개혁 진영 연합이든 범 여권 단일화든 제대로 이뤄질 것이다. 신당 쪽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판단하기 힘들지만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로 대선 이슈가 경제 일방에서 정치도 추가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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