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토요일(10일) 오전 친정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감상자가 도착했다. 보름 전에도 단감과 배, 밤이 들어 있는 상자와 고구마 한 상자, 이렇게 택배 두 상자가 왔었다.

 

“엄마, 감 잘 받았어요. 그런데 택배 기사가 3번이나 전화해 집을 물어 보더니 와서도 어떤 상자인지 몰라 절절 매는 거야. 그런데 내가 상자를 금방 찾아내니까 어떻게 다른 사람이 보낸 것까지 그렇게 쉽게 찾느냐면서 놀라는 거야. 그래서 뭐 자랑했지. 이게 우리 아버지 표 복숭아 상자예요, 하고 말이야.”


“그 사람이 택배 한 지 얼마 안 되었는갑다! 불광동이 항상 늦게 받아서 이번에 회사를 바꾸었더니 그러는구만.”
“응, 그런가봐. 그런데 오는 동안 2개가 딱 먹기 좋게 홍시가 되었네. 그리고 댓 개는 며칠 있으면 먹기 좋게 될 것 같고. 어쨌든 엄마, 아버지 덕분에 좋아하는 감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엄마, 그런데 이번에도 상자 7개를 마루에 주욱 놓고 담았겠네? 우리 칠남매 모두 골고루 챙겨 먹인다고.”

 

“아니, 니 큰언니는 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안 보냈고, 오빠하고 포항은 며칠 후에 온다 안 하나. 그래서 4개만 부쳤다.”

 

하지만 이번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 부모님은 우리 7남매를 위하여 상자 7개를 들마루에 나란히 놓고 골고루 담아 택배 상자를 포장하곤 하신다. 그러니까 내게 상자 2개가 왔다면 14개의 상자를 두 줄로 놓은 후 차례차례 담아 포장한 것이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도 이런 부모님 모습을 쉽게 떠올릴 만큼 1년에 몇 차례고 오는 친정 부모님의 택배 상자. 그중 내게 가장 특별한 것은 해마다 가을 이즈음에 받는 감이 든 상자다.

 

"올해도 눈앞이 흐려지는 감 한상자를 받았습니다"

 

 

지난 2005년 추석이 지난 3일째 이른 아침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전화를 받았다. 추석에 뵙고 온, 건강하신 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여 중풍의 시초라고 하였다. 눈앞이 캄캄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돼. 너무 억울하다. 평생 새벽 6시부터 밤늦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어나 일을 하신 분인데… 게다가 아버지는 담배도 끊은 지 삼십년이 넘었고 술도 잘 잡숫지 않지 않잖아. 몇 년 전부터는 고기도 별로 잡숫지 않고, 몸에 좋지 않다고 커피까지 멀리하시는데… 정말 너무 억울하지 않니?”

 

너무 답답하고 억울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됐다. 평생 고생만한 부모님께는 너무 억울한 병이라고 할까?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이 답답한 현실을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우리는 이렇게 하늘을 원망할 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에게 찾아 온 중풍이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께서 입원 전전날, 즉 추석 다음날에 막둥이네 아이 돌잔치를 하였다. 우리 7남매의 마지막, 어머니께서 사십이 넘어 낳은 동생의 첫아이 돌잔치였다. 다른 명절 같지 않게 명절 다음날에 있는 잔치를 위해 딸들까지 모두 명절날에 모인 그날 아버지는 아버지 옆에 앉은 내 손을 잡으시더니 몇 번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딸들이 시집가서 아이들 낳고 무난하게 살아서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동기들 간에 다투고 싸우는 것이 부모들에겐 가장 마음 아픈 거란다.”


“아들 딸 시집 장가가서 가정 이루고 딸이고 며느리고 아무도 아이 못 낳는 자식 없이 아이들 낳고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들에겐 가장 큰 행복이란다.”
“나이가 차도 결혼하지 못해 걱정인 집이 많은데 우리 자식들은 아무도 그런 걱정 안 시키고 제때 장가가고 시집가서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버지는 그날 30명에 가까운 대식구가 모여 왁자지껄한 가운데 기분이 무척 좋으셨다. 이런 아버지께 마비가 시작된 것은 막둥이네 가족을 배웅하고 돌아서면서부터였다.

 

‘막내까지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낳고 돌잔치까지 하는 것을 본 아버지는 이젠 부모로서 가장 중요한 책임은 거의 끝냈다는 안도감에 그만 긴장을 놓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없는 살림으로 우리 7남매를 어떻게든 키워내기 위해 평생 단단하게 쥐고 있던 삶의 긴장을 막내네 돌잔치에 그만 놓고 만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어깨가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었나보다.’

 

이렇게 짐작을 하면서도 우리 부모님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너무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래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필요한 치료를 하는 보름 동안 날마다 우울했다.

 

가을걷이와 과수원 때문에 집을 비울 수 없고 아버지 옆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어 2~3일 간격으로 병원을 오가며 집에서 주무시는 어머니는 밤마다 무섭다고 했다. 칠순이 지난 어머니께서, 우리의 든든한 바람막이였던 어머니께서 우리 자식들에게 처음으로 한 “무섭다”는 말이었다.

 

그랬다. 아버지의 입원으로 죽음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곱절로 고된 몸으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리라.

 

보름 후 아버지는 두툼한 약봉지와 함께 퇴원하셨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약과 병원을 너무 좋아한다며 한 번씩 아버지께 하던 타박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표현대로 약과 병원을 너무 좋아한 아버지가 새벽에 병원을 찾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온몸이 마비될 뻔했다는 말을 의사는 여러 차례 했다고 했다.

 

퇴원하시자마자 건강한 모습으로 가을걷이를 하여 아버지가 처음으로 보내주신 것이 감 한 상자였다. 상자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우리 칠남매를 생각하며 상자 7개를 순서대로 놓고 이름을 모두 적어 보았나보다.

 

이듬해 초여름까지 내 이름이 적힌 아버지의 감이 들었던 상자를 밖에 내놓지 못하고 한동안 아버지의 손길이 닿은 글씨를 더듬곤 하였다. 글씨 한자 못쓰고 영영 마비되었을지도 모를 아버지가 따서 굵은 매직으로 내 이름을 써서 보낸 그 상자를 말이다.

 

 

92년 가을, 감식초가 유행처럼 번질 그 무렵 막내가 대학에 다닐 때 부모님은 남의 감나무 밭을 3년 계약하여 지었다. 그 가을에는 어머니께서 감을 따다가 당시 감염 시 사망률이 70% 이상이던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일까지 있었고 보니 퇴원하시자마자 따서 보내주신 감 한 상자는 더더욱 우울하고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단단한 감이 말랑말랑한 홍시로 변한 것을 하나씩 꺼내 먹는 동안 늘 만감이 교차하던 2005년이었다.

 

올해도 변함없이 온 부모님의 감 한 상자는 지난해, 지지난해처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올해도 건강하게 살아주신 부모님이 고맙고 다행스럽다. 그래서 감이 익기 시작하면 눈이 자주 머물고 목이 메는 기억을 떠올리면서 부모님의 감 상자를 기다린다.

 

오는 동안 몇 개가 홍시가 되었다. 아마도 부모님은 받자마자 먹어보라고 금방 홍시가 될 것을 따로 구분한 다음 상자마다 골고루 나누어 담았을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감을 싫어하여 친정 부모님의 감은 언제나 거의 내 몫이다. 감을 좋아하는지라 이게 웬 횡재인가 싶다. 그런데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다.


태그:#부모님, #감상자, #감, #고향, #택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