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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사는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강천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마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신라 진성여왕 원년(887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 후 고려 충숙왕 3년(1316년) 덕현선사가 사찰을 중창하며 5층 석탑도 세웠다. 사찰이 번창했을 당시엔 12개의 암자와 1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석탑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선조 37년(1604년)에 소요대사가 재건했으나 다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9년 원상 복원하였다 한다.

 

아기자기한 산세와 계곡, 그리고 단아한 모습의 단풍이 잘 어우러진 곳이 강천산이다. 계곡은 깊지 않고 물이 맑아 고기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여 행락객의 가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단풍은 나무들이 작아 귀여운 아기들의 손을 잡고 함께 산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난 11일 그곳을 찾았다.

 

 

강천사 군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9시30분경인데, 이미 승용차 전용 주차장이 만차되어 내 차를 끝으로 승용차 진입이 금지되었다. 벌써 등산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비집느라 걷기조차 어려운 보행 길인데, 어찌 된 일인지 경내엔 구경꾼조차 보이지 않는다. 규모가 작다 보니 구경거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산악회원들의 단체 등반길이다 보니 시간이 촉박해서일까. 기념촬영을 하는 몇몇 젊은이들을 제외하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날쌘 걸음으로 등산로를 따라 산 정상을 향해 직행이다.

 

홀로 강천사 법당 뜰에 서니, 하늘도 땅도 물도 나무도 초췌하고 쓸쓸하다. 계곡을 따라 흘러온 바람이 떠나기 싫어 망설이는 가을의 손목을 낚아채며 발길을 재촉한다. 아쉬워 뒤돌아보는 그를 다그칠 때마다 단풍잎은 유성이 되어 고요한 법당 뜰을 오색 빛으로 수놓는다.

 

 

심우당뿐만 아니라 세심당에도 곶감을 만들기 위해 깎아 놓은 감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마치 염주를 연상하게 하는데, 단청과 감 그리고 단풍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인다. 이곳에 머무는 스님은 비구와 비구니를 합해 단 5명이란다. 아무래도 이 감은 단 한 분의 비구니께서 곶감이 되면 부처님께 봉양하려고 걸어 놓은 것 같다.

 

 

이 사찰의 얼굴인 대웅전 편액은 최승호씨가 썼고, 강천문은 김기욱씨가 썼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보를 알고 싶어 순창군청에 인적을 의뢰하고 개인적으로도 알아보았지만 전혀 알 길이 없다. 사찰에서도 알 수 없다는 대답이다.

 

지금은 지자체에도 문화재를 관리하는 부서가 따로 있고 지방마다 관에서 지원하는 문화원도 많이 있던데, 사찰이나 지자체에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 꼼꼼하게 관리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마도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이 고장 출신이거나 아니면, 이 고장에서 작가활동을 한 지방작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현판 글씨에 대해서 여쭈어 보니 스님 한 분께서 말씀하신다.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들지만 사찰에 돈이 없어 바꾸지 못하는 게 현실이란다.

 

그동안 많은 사찰을 돌아보며 느낀 점은 사찰에 추사 글씨가 많다는 것이었다. 추사글씨가 좋다는 것에 대한민국 서예계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찰에 계신 스님들의 욕심도 한몫 한 것 같다.


스님들 중에는 오랫동안 붓글씨를 연마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분들은 남의 글씨도 볼 줄 안다. 그렇다 보니 어지간한 글씨는 스님들 눈에는 성이 차지 않기 때문이라고 내 나름대로 상상해 봐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그것이 유명한 사람의 글씨를 사찰에 걸고 싶게 하는 주 요인이 아닐까 싶다.

 

가난하여 한없이 작고 초라해진 천년고찰 강천사. 한 때는 12개의 암자와 1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내 귓가엔 전설처럼 들릴 뿐, 지금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일까, 가을의 끝자락에 남겨 진 강천사를 등지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태그:#강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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