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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시절의 나는 꽤 싹싹한 편이었나 보다. 작은 엄마들은 나더러 늘 그랬다.

 

"승숙이 쟈는 난중에 시집가마 시어른들 살살 녹일끼라. 저래 애교가 많으이 우째 어른들이 안 녹을꼬."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좀 애교스러운 편이었다. 내 위의 언니는 맏이라서 그런지 묵직한 편이었지만 나는 둘째 딸이라서 애교도 많이 부리고 살살거렸던 편이었다. 노상 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고 재잘재잘 말도 많았다. 그래서 작은 엄마들은 내가 나중에 시집가면 시어른들을 애교로 녹일 거라고 그러셨다.

 

애교스러웠던 나, 지금은 곰이 되었네

 

하지만 나는 시어른들을 애교로 녹이는 며느리가 되지 못했다. 나는 맏며느리 자리로 시집을 가게 되었고, 그래서 내게 요구되는 무언의 것들을 따라가야 했다. 나는 여러 형제들을 거느리는 맏형님으로서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아래 동서들은 시어른들께 애교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나는 맏이로서의 무게를 잡기 위해서 애교보다는 책임감을 더 무겁게 느껴야 했다.

 

그렇게 굳어진 것일까 요즘의 나는 애교가 없는 것 같다. 여우 같은 마누라가 아니라 곰 같은 마누라가 된 거 같다. 애들에게도 내 뜻을 따르라고 강요하고 지시만 하는 것 같다.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랑 종일 집에 같이 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나대로 지낼 때가 많다. 아버지는 같이 이야기 나누는 걸 참 좋아 하시는데 나는 그런 자리를 잘 만들어 주지 않는다. 밥 먹고 나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나는 차 한 잔 마시는 시간도 자주 만들지 않는다. 나는 무에 그리 바쁜 걸까. 무엇에 마음을 두어서 아버지랑 이야기 나누는 자리도 잘 만들지 않는 걸까.

 

 

나는 종일 컴퓨터를 끼고 산다. 그도 아니면 신문이나 책을 보며 혼자서 논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주신다. 딸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은 몰라도 뭔가 자기만의 일을 하는가 보다 그리 여겨주시며 아버지는 내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항상 자리를 피해 주신다.

 

나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중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여기 저기 기웃거리면서 노는 게 내 일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노느라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지 않는 거다.

 

어떤 때 나는 버릇없는 딸이 된다

 

나는 내 할 일들이 많다고 생각하며 아버지 말을 건성으로 들을 때도 있다.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저 말을 끊어야 되는데, 끊고 내 할 일을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언제 이야기를 끊을까 그 생각에 골몰할 때도 있다. 내가 필요하면 아버지한테 말을 붙여서 이것 저것 물어보고 내한테 필요 없으면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다.

 

나는 어떤 때는 버릇없는 딸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 밥 잡수세요,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하며 깍듯하게 모시기도 하지만 일부러 버릇없는 딸이 되기도 한다.

 

어떤 때 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누워계신 아버지를 옆으로 밀어내며 내가 아랫목에 누울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웃으시며 아랫목을 내게 양보해 주시고 웃목으로 올라가신다. 내가 그리 무대뽀로 행동하는 게 아버지는 좋으신 거 같다. 어릴 때, 아버지와 엄마가 주무시는 한가운데로 파고 들어가서 잠자던 그때처럼 나는 가끔씩 아버지 방 아랫목을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서 텔레비전을 본다.

 

딸이니까 아버지한테 막 대할 수 있는 거다. 아버지에게 막 대하지만 그건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밀어내며 따뜻한 아랫목을 독차지하는 버릇없는 나를 보며 남편은 핀잔을 준다. 하지만 나는 그리 한다. 버릇없어 보이는 내 행동이 아버지와 나와의 거리를 좁혀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때 아버지를 보호하고 챙기는 어른이 된 딸이 아니라 열세살 어린 시절의 막무가내 딸이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아버지 사이를 파고들어가서 잠자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버릇없는 딸을 아버지는 더 좋아해

 

오늘 아침에도 아버지는 방으로 자리를 피해 주셨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노는 딸을 위해서 방에 들어가신 거다. 딸은 아버지가 방에서 징역을 살든 말든 내 볼 일 보기에 바쁘다. 음악을 듣고 여기저기 들락거리면서 노닥거린다.

 

아침 드라마를 다 보고, 그리고 또 여러 프로그램들을 섭렵하신 아버지는 산책 갈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오신다. 선글라스에 모자에 장갑까지 끼고 나오셨다.

 

나는 싹싹하게 아버지한테 말을 붙인다.

 

"아부지요, 산책 가실라꼬요? 오늘은 날이 안 춥지요?"

 

아버지는 깍듯하게 말을 거는 딸한테 어정쩡하게 답을 한다.

 

"옹야, (산책을) 한 번 나가볼라꼬. 날이 안 추분 거 같네."

 

아랫목으로 파고드는 딸도 필요하고 깍듯이 챙기는 딸도 필요하다. 나는 그 두 역할을 적절하게 하면서 아버지와 편하게 지내고 있다.


태그:#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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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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