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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천안시의 한 식당에 몇 명의 '삼성맨'들이 모였다. 스스로를 '백전노장' 혹은 '역전의 용사'라 부르는 삼성SDI의 과장급 중간간부들이었다. 하지만 회사로부터는 '단물 빠진 껌'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근무경력 20∼30년을 자랑하는 이들을 회사 측은 명예퇴직 대상자에 올린 것이다. 당연히 분노가 섞인 울분이 쏟아졌다.

 

"경영성과를 책임져야 할 임원들 대신에 중간간부를 내보내는 것 아니냐?"

"청춘을 바친 내가 왜 명예퇴직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나갈려니 억울하다."

"불공정한 인사고과부터 시작해 회사의 불합리한 구조조정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후 '16인 모임'을 거쳐 지난 7월 '삼성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삼역모)이 공식 결성됐다. 현재 핵심 활동가만 40여명에 이르고, 삼역모 카페에서는 130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지난 10월 말에는 대표(1명)와 부대표(2명), 지역별 대표(11명)를 뽑는 등 조직 정비까지 마쳤다.

 

청춘을 삼성에 바친 중간간부들의 '반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노조를 생각할 필요 없을 정도로 혜택을 많이 받았다"

 

 '삼성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은 과장급 등 중간간부들이 주도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삼성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은 과장급 등 중간간부들이 주도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 삼역모 제공

그런데 삼역모의 지도부를 만나기는 참 어려웠다. 그들은 언론과 접촉하는 걸 극도로 조심스러워했다. 가까스로 인터뷰를 성사시킨 뒤에는 인터뷰 시작 2시간 전에야 인터뷰 장소를 통보해줬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는 '문제제기 집단'을 조직하는 삼성맨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었다. 이는 그만큼 '내부 조직화'에 대한 삼성의 감시(관리)가 철두철미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4일 오후 6시께 천안의 한 식당에서 만난 삼역모의 대표와 부대표(자신의 이름을 비공개로 해달라는 요청에 따라 이들을 '대표'와 '부대표'로 표기했음을 밝힌다)는 먼저 '삼성에서 좋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1976년 삼성SDI에 입사했다는 대표의 얘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삼성에 들어왔다. 삼성에 근무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졌다. 내가 과장으로 진급했을 때는 동네 잔치를 했을 정도다. 삼성의 간부라면 대외적으로 대단한 위치 아닌가. 그런 간부가 되는 꿈을 안고 삼성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일했다."

 

대표보다 6년 늦게 입사한 부대표(1984년 입사)는 "노조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혜택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학자금은 물론이고 명절이나 회사 창립일 때 선물도 많이 줬다. LG 다니는 친구는 고작해야 럭키금성에서 만드는 비누를 선물로 받았지만 우리는 세탁기나 텔레비전, 식기건조기 등을 받았다. '삼성은 주는 선물도 다르구나' 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심지어 IMF 이전에는 금니를 하거나 치아를 교정하는 것도 전액 지원받았을 정도로 혜택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시절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다. 회사는 최근 경영악화를 이유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삼성SDI 측은 "시장이 줄어들고 있는 브라운관 사업부문의 직원들을 재배치하고 있을 뿐 명예퇴직은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진실은 전혀 달랐다.

 

천안공장 명퇴자만 70여명..."우리가 없었다면 지금의 삼성도 없다"

 

삼역모가 파악한 바로는 천안공장의 명예퇴직자만 70여명에 이른다. 삼역모 측은 "차장·부장도 있지만 과장급이 가장 많다"고 밝혔다. 이들은 명예퇴직하기 전까지만 해도 '노측'이 아니라 '사측'에 서 있었다.

 

"회사에 오래 근무한 사람으로서 대우는 못해줄 망정 이렇게 대우하는 건 억울하다. 우리는 삼성SDI가 여기까지 오게 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토요일도 없이 일했다. 우리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지금의 삼성SDI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단물이 다 빠졌다고 해서 토사구팽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대표의 항변이다. 그는 "인사고과를 공정하게 했다면 억울하지 않을 것"이라며 "자기하고 생각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회사에 이의제기해서 눈에 거슬리면 인사고과는 A에서 D로 추락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대표도 한마디 거들었다.

 

"코드가 맞지 않고, 소신이 강하고, 위에서 지시한 대로 안 하고, 순종파가 아닌 사람은 좋은 인사고과를 받기 어렵다. 꼬봉(부하)처럼 꼬리를 흔들면 좋은 평가를 받는다. 점수가 높아야 진급도 할 수 있는데, 평범한 고과를 받으면 진급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대표는 "때가 되면 나가야 한다는 건 인정한다"며 "하지만 이렇게 비참하게 내보내는 것은 억울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에 회사 내부에 나만 살겠다는 이기주의·개인주의·기회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삼성에 근무한다는 것 자체가 자부심이었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애사심도 사라지고, 인사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불만도 커져가고 있다. 그런데 회사는 구조조정을 한다며 우리(중간 간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지난 10월 6일 삼역모의 산행모임. 삼역모는 지난 10월 말 대표와 부대표, 지역별 대표를 뽑는 등 조직정비까지 마쳤다.
지난 10월 6일 삼역모의 산행모임. 삼역모는 지난 10월 말 대표와 부대표, 지역별 대표를 뽑는 등 조직정비까지 마쳤다. ⓒ 삼역모 제공

"왜 경영 주도한 임원들은 책임을 지지 않나?"

 

이처럼 이들이 배신감을 토로하며 분노하고 있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영을 주도해온 임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은 채 중간간부들만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해외에 30개의 생산라인이 있는데 그중 15개는 접었다. 부산의 브라운관 사업부문도 곧 사라진다. 경영자는 선견지명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브라운관이 사양사업으로 갈 걸 알았다면 거기에 맞춰 준비를 했어야 하지 않나. 그렇지 못해 경영이 악화됐으면 그 결과에 대해 경영진도 책임을 져야 한다. 솔직히 초급 간부들은 위에서 세운 경영전략을 충실하게 따른 죄밖에 없지 않나?"

 

경영진이 시대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부대표의 지적이다. 한때 삼성SDI의 최대 성장동력이었던 브라운관사업은 PDP나 LCD에 밀려 사양산업이 됐다. 부대표는 "브라운관은 2001년부터 쇠퇴기에 들어갔다"며 "그런데도 2004년 1조원에 가까운 순이익을 낸 것은 (경쟁사였던) 도시바나 히타치가 (브라운관 사업을) 접어 우리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얼마 전 삼역모 카페에 올린 글에서 '전쟁의 비유'를 통해 책임지지 않는 임원진을 호되게 질타했다.

 

"전쟁에서 질 경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등병·상병·소위·중대장? 아니다. 전쟁의 총책임은 고위 지휘관한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의 경영악화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이미 답은 명확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엉뚱하게 그 책임을 말단 소대장이 지라고 하면서 내쫓으려고 온갖 비열하고 추잡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대표도 "경영이 어려워져서 구조조정을 한다고 하는데 왜 경영을 주도한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어 그는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며 우리더러 나가라고 하니까 (삼역모 결성 등)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며 삼성의 조직문화를 이렇게 꼬집었다.

 

"현대는 근로자가 신바람나는 조직문화이고 삼성은 경영 임원진이 신바람나는 조직문화라는 얘기가 있다. 삼성은 근로자를 머슴이나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실컷 부려먹고 더 이상 나올 게 없으면 갖다 버린다. 결국 삼성에도 노조가 필요한 분위기로 가고 있다."

 

"고액연봉 임원을 줄이면 학자금 삭감안해도 된다"

 

또한 이들을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회사 측이 '학자금의 축소'를 통해 이들의 명예퇴직을 압박한 점이다. 이에 대한 대표의 설명이다.

 

"이전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학자금을 100% 지원해주었다. 그런데 (구조조정을 실시한 이후) 학자금을 50% 삭감했다. 학자금을 삭감해봐야 (그 절감효과가) 수십억밖에 안된다. 경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학자금을 안 주면 집에 갈 거라고 판단해 야비한 수법을 쓴 것이다."

 

부대표도 "지난 5월 이후 (명예퇴직 대상자들이) 안 나가니까 인사부서장들이 워크숍을 열고 그 이유를 분석한 모양"이라며 "그 결과 연 1000만원에 이르는 학자금 때문에 퇴사를 안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후 노사협의회를 통해 학자금 50% 삭감을 합의했는데 회사 측은 원래 학자금 전액을 삭감하려고 했다"며 "내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 친구가 '어떻게 삼성이 벼룩의 간을 빼먹으려 하느냐'고 했다"고 씁쓸해했다.

 

"천안공장에서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둔 직원은 약 170명 정도 된다. 대학생 1명당 연 800만원, 고등학생은 연 150만원으로 잡으면 (학자금 지원으로 나가는 돈은) 20억원도 안된다. 그런데 경영진의 연봉은 대표이사 17억원, 부사장급 12억원, 전무 10억원, 상무 6억원이라고 한다. 임원진만 몇 명 줄이면 학자금을 삭감하지 않아도 된다. 임원이 70여명이다. 그 사람들이 다 필요한지 의문이다."

 

대표도 "무능하고 무책임한 임원들이야말로 경영악화의 주범"이라며 "삼성의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무능하고 무책임한 임원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 무노조 경영'에 도전장을 낸 삼역모는 지난 10월 26일부터 27일까지 건전한 노조 건설 등을 주제로 워크숍을 열었다.
'삼성 무노조 경영'에 도전장을 낸 삼역모는 지난 10월 26일부터 27일까지 건전한 노조 건설 등을 주제로 워크숍을 열었다. ⓒ 삼역모 제공

 

"노조 설립 필요성 인정하지만 속도조절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은 노조 설립에 대해선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노조 설립에 실패한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탓이기도 하지만, 삼성 내부의 '반노조 정서'를 적극 헤아렸기 때문이다. 대표의 설명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노조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회사 측은 '노조가 생기면 회사가 망한다' '노조가 있는 곳보다 잘 해주겠다'며 (무노조 경영을) 끌고 왔다. 그리고 삼성의 조직문화는 지시일변도다. 자유로운 토론이 없다. 공산주의나 마찬가지다. 무조건 따라야 하고 반발하면 잘린다."

 

부대표도 "지금은 노조 설립을 내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동안 회사측은 노조의 좋은 면은 빼고 나쁜 면만 주입해왔다. 예를 들면, 유럽의 철강노조가 강성이었는데 그 강성노조 때문에 유럽의 한 회사가 망했다고 교육하는 것이다. 내가 96년에 과장으로 승진해 한 호텔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시 회사 측에서 '당신들은 이제 사측에 속한다'고 했다. 우리도 그렇게 알았다. 그래서 수원공장 노사분규 때 사측에 서서 구사대 노릇까지 했다."

 

그런 구조적 한계로 인해 삼역모 내부에서도 '속도조절론'이 대세라고 한다. 다시 대표의 설명이다.

 

"현재의 억압 속에서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덜 느끼는 사람도 있다. 워낙 노조의 부정적인 면만 교육을 받아와서 노조설립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동료들이 있다. 물론 건전한 노조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무조건 노조를 설립하자고 하면 삼역모의 조직력이 떨어질 수 있다. 속도조절하면서 2010년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시점을 기다리고 있다."

 

인터뷰는 2시간이 넘도록 진행됐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건희 회장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삼성의 인간존중 문화가 왜 이렇게 변질됐는지 묻고 싶다. 삼성에 들어와 청춘을 바쳐서 일했는데 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 그룹총수로서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대표)

 

"우리는 돈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임금 올려달라는 게 아니다. 아이들 공부시키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된 정년이라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삼성의 조직문화를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부대표)

 

"삼성의 '삼역모 해체' 작업은 성공할 수 없다"

 

삼성이 노조를 비롯해 '내부조직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삼성은 삼역모의 주축세력이 과장급 등 중간간부이고, 이들에 대한 현장의 지지세가 확대되고 있는 점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삼역모 대표는 지난 1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삼역모를 해체하려는 회사측의 방해공작이 엄청나다"라며 "삼역모가 확대될 기미를 보이니까 그룹차원에서 잠재우기 위해 개인적으로 만나 '구조조정은 없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유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비리 의혹'을 폭로하고, 삼역모의 조직적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던 최근 명예퇴직을 위한 면담 등이 중단된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대표는 "우리는 20~30년간 근무한 역전의 용사들 아닌가"라며 "삼역모가 그렇게 중간 간부들 중심이다 보니까 회사에서도 함부로 못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부대표도 "과거에는 대리 이하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면 우리는 구사대도 했던 간부들"이라며 "회사의 움직임이나 수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삼역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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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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