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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로미오앤줄리엣'의 한 장면
뮤지컬 '로미오앤줄리엣'의 한 장면 ⓒ 이룸이엔티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 이 이야기는 세익스피어의 비극적인 희극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수없이 영화로 제작됐으며, 뮤지컬로 공연되기도 했다. 68혁명이 일어났던 1968년에 제작된 영화 <로미와와 줄리엣>은 줄리엣 역의 올리비아 핫세를 만인의 연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로미오의 줄리엣의 비극적으로 아름다운 사랑에 감동받는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동경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들에게 아주 비밀스럽게 물어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분개한다.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에 감히 전제조건이 있다고 주장하는 나를 세파에 찌든 속물로 취급한다. 진정한 사랑에 조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존재가 사랑에 우선한다

맞는 말이다. 솔로로 독수공방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에 목말라 환장하고 있는 나는, 사랑의 가치를 부정할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말 그대로 눈이 뒤집혀 사랑에 환장하고 있다. 사랑은 환상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낭만적으로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조건이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로미오란 사람과 줄리엣이란 사람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구체적인 사람으로 존재해야 한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1년 365일 먹지도 않고 사랑만 할 수는 없다. 1년 365일 한번도 싸지 않고 사랑만 할 수는 없다. 자는 시간도 아깝다고 1년 365일 잠 한 숨 안자고 사랑만 할 수는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구체적인 사람으로 먹고, 자고, 싸면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영위하며 존재해야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의 구체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살아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부모님에 기생해서 먹고 살 수도 있다. 부모님의 돈으로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할 수도 있다. 물론 독립해서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의 노동으로 먹고 살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살아야 한다. 밥을 지어야 하고 빨래도 하며 청소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든지 자신이 하든지 해야 한다. 그렇게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사랑할 수 있다.

욕망이 발생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먹고, 자고, 싸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무조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로미오는 남성이고 줄리엣은 여성이다. 남성인 로미오와 여성인 줄리엣이 영화에서처럼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둘 다 동성애자여서는 안 된다. 둘 중의 한 명이라도 성적 취향이 동성애자라면 소위 말하는 남녀 간의 사랑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성애자이거나 최소한 양성애자여야 로미오란 남성과 줄리엣이란 여성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보면서 발기해야 한다. 줄리엣은 로미오를 보면서 촉촉하게 젖어들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은 하지만 성적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무성애자라면 또 다른 방식의 사랑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성애자가 아닌 이상 사랑하려면 서로에게 육체적으로도 반응해야 한다. 매일 밤 성욕을 이기기 위해 송곳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생각하며 자위도 해야 한다. 서로를 향한 욕망이 넘쳐나야 한다. 그래야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가능하다.

역사에도 조건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에만 전제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도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가능하려면 로미오란 사람과 줄리엣이란 사람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듯이, 인류의 역사란 것이 존재하려면 필연적으로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

역사가 존재하려면 인간이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자고, 싸면서 구체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먹고, 자고, 싸면서 구체적인 의, 식, 주를 해결해야 한다. 구체적인 의, 식, 주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노동해야 인간의 역사는 가능하다. 이것이 역사의 첫 번째 전제조건이다.

한번만 먹고, 자고, 싸서는 인간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먹고, 자고, 싸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 근거해서 새로운 욕망을 창조해야만 역사는 가능하다. 오늘은 라면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면, 내일은 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조건에 근거해서 그 욕망을 충족시켜야한다. 그렇게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역사의 두 번째 전제조건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섹스도 해야 한다. 섹스를 해서 자녀도 낳아야 한다. 이를 통해 인간 자체를 확대 재생산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세대를 이어가야 인간의 역사가 가능하다. 인간 자신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역사의 세 번째 전제조건이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확대 재생산하게 되면 가족이 등장하게 된다. 그 가족이 일부일처제이든지, 일부다처제이든, 다부일처제이든 혹은 다부다처제이든지 상관없다. 어떤 형식으로라도 가족이 등장하게 된다. 가족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고립된 개인을 상정하는 것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먹고, 자고, 싸며 자신의 삶을 영위해 왔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섹스도 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해 왔다. 고립된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고,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의 역사는 가능하다. 이것이 역사의 네 번째 전제조건이다.

삶의 방식과 문화의 관계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 산다. 먹고 사는 방식에 따라 문화를 만들어 간다.

목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목축을 위해서는 풀을 찾아 이곳 저곳을 이동하며 살아야 한다. 목축을 중심으로 먹고 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개였다. 양이나 소를 몰고 여기 저기 이동할 때 개는 꼭 필요했다. 양이나 소는 식용으로 길렀지만, 개는 단순한 동물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개는 친구를 넘어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목축문화에 맞는 식생활 문화가 만들어졌다. 개를 친구로 대하며, 양이나 소를 식용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농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농사를 지으려면 정착이 필수적이다. 농업을 중심으로 먹고 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소였다. 밭이나 논을 갈 때 소는 꼭 필요했다. 개는 식용으로 길렀지만, 소는 단순한 동물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소는 친구를 넘어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농경문화에 맞는 식생활 문화가 만들어졌다. 소를 친구로 대하며, 개를 식용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방식에 의해 문화가 만들어졌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관습이 만들어졌다. 법이 만들어지고 예술이 꽃피게 되었다. 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관습과 법과 예술이 그냥 꽃 피게 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먹고 사는 생활방식에 의해 문화는 만들어졌다. 관습과 법과 예술이 만들어졌다. 먹고 사는 방식의 변화에 따라 문화는 변했다. 관습과 법과 예술은 변해왔다.

우리의 의식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가 먹고, 자고, 싸면서 만들어온 우리 역사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나의 존재가 나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덧붙이는 글 | * 본 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대안정책 사이트 이스트플랫폼(http://www.epl.or.kr)에 공동 게재됩니다.

** 2008년 초에 민연사에서 출판할 예정인 책의 내용을 연재 기사로 묶어 올립니다.



#철학#로미오와 줄리엣#존재#역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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