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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산 거리
 카오산 거리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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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카오산에 있다. 흐르는 자유, 범람하는 열정, 침전하는 열락. 나는 카오산을 이 세 단어로 압축하고 싶다.

카오산은 방콕의 방람푸 지역에 있다. 널리 알려진 세상의 이름들이 그렇듯 카오산도 처음엔 하나의 거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에 특정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들은 여행객(Traveler)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렸다.

그런데 일단의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르레가 달린 단단한 가방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들은 자기 등에 짐을 꾸렸다. 지갑이 무거운 사람들은 호텔에 남고 등이 무거운 사람들은 카오산으로 모여들었다. 이름하여 배낭족(Backpacker)들이다. 이때부터 카오산은 배낭족의 메카, 배낭족의 베이스캠프라는 보통명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왜 그들이 카오산에 몰려들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몇 가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교통이 좋아서, 값이 싸서, 강이 가까워, 정보를 얻기 쉬워서 등등. 그 어느 것도 딱히 '이거다' 할 만큼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이 모두를 합친 것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카오산이 인구에 회자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있었으니, 그곳엔 강호의 등짐(배낭) 고수들이 숱하게 기식한다거나 수많은 (여행)비결들이 떠다닌다는 풍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카오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배낭 멘 이방인들

하여간 언제부터인가 배낭을 멘 푸른 눈 붉은 수염의 이방인들이 카오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거리는 이들로 항시 넘쳐났다. 금발을 질끈 묶은 어떤 여자는 먼 곳을 향해 다시 배낭을 꾸리고, 이제 막 도착한 닭벼슬 같은 펑크머리의 어떤 남자는 배낭을 푼다. 새벽 어스름에 나그네처럼 찾아오기도 하지만, 한밤중에 방랑자처럼 떠나기도 한다.

도착한 이는 일용할 물품을 꺼내고, 떠나는 이는 소중한 것을 채워넣는다. 배낭은 기념품, 추억, 인연 따위로 금세 채워진다. 그리하여 카오산을 드나드는 배낭은 언제나 자기 키만큼 높고, 자기 몸만큼 땡땡하다. 떠나는 자의 아쉬움과 오는 자의 설렘으로 카오산의 길바닥은 항시 흥건하다. 밟으면 저벅저벅하는 소리가 전율처럼 등골을 타고오른다. 이른바 카오산 로드(Khaosan Road)다.

여기선 배낭이 신분증이다. 배낭을 메고 있으면 이곳의 신민임이 자연스럽게 증명된다. 그렇다고 이곳의 신민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민의식을 부여받을 뿐이다. 카오산의 신민의식은 자유다. 누구나 카오산에 오면 자유의 냄새에 흠뻑 젖는다. 어떤 사람은 너무 강한 자극에 재치기를 연방 해대고, 어떤 사람은 일부러 맡기 위해 킁킁대기도 한다.

계절의 바뀜은 달력이나 온도계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코끝을 스치는 바람과 그 바람에 실려 있는 냄새로 구분한다. 우리가 복날의 더위와 처서가 지난 더위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비록 온도는 비슷하더라도 냄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카오산을 찾은 배낭족
 카오산을 찾은 배낭족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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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산의 자유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자유와 냄새가 다르다. 일상에서 느끼는 자유는 어쩌면 자유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갈망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틈새에서 생활이 허락한 자유. 그 틈새를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어딘가를 쌩하니 다녀오든가 혹은 무언가를 하며 주어진 시간을 허겁지겁 메운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라고 우긴다. 일상이 하던 일과 반대되는 일을 하고 나서 자유를 누렸다고 위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하지 않는 자유이다. 자유를 누리러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느끼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카오산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자유가 있다. 특이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행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카오산에서는 느긋하게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볼거리를 찾는다면 오고가는 사람들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온갖 인종과 온갖 언어들. 줄지어선 노천카페에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오산인들이 있고 이제 막 보헤미안을 꿈꾸며 배낭을 메고 입성하는 이들이 또 이들을 구경한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며 이곳의 자유를 서로에게 감염시킨다.

여행이 자유라면, 자유 여행은 단연 카오산에서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나도 이번 여행의 출발지를 카오산으로 삼고 이 글 또한 카오산에 관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22일부터 일주일 간 태국에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국의 역사 도시를 일별한 바, 그 여행기를 25회 내외 분량으로 연재할 계획입니다.



태그:#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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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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