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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가는 길에 영모당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미 지나쳤으니 획 돌아다본다. 대궐 같은 집이 멀어져 간다. 차를 돌려 다시 간다. 혼자 와서 둘이 된 여행길. 혼자 배낭을 메고 뚜벅이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차를 갖다 대 주니 마음도 덩달아 흡족해졌다.

 

강진에서 해남으로 막 넘어 가려는 찰나 만난 해남 윤씨 문중의 제각이다. 조선 숙종 13년(1687년)에 지었다니 320년이나 된 집이다. 해남윤씨 묘소가 있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지었다는데 크기도 하거니와 보존상태도 좋아 보인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안채. 안채가 전부 대청 마루인 듯, 방도 없이 모두 강당처럼 넓게 트여 있다. 오른쪽 작은 문을 열고 뒤란으로 들어가보니 그곳엔 비석(?)이 잔뜩. 300여년 전, 그때는 제사를 위해 이렇게 큰집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사를 점차 줄여나가고 있는 추세.

 

바쁜 현대에 제사라니! 같은 도시에 있어도 출장이다 뭐다 해서 전부 챙기기 어렵다고 토요일이나 공휴일로 몰아서 처리(?) 하자는 쪽인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가정도 허다하고. 그렇다면 앞으로 300년 후는 어떨까?

 

나는 제사감 먹는 재미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잠를 참았던 세대다. 그런데 꼭 시간이 임박하면 눈꺼풀의 힘을 누르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다시 일어나 제사를 보고 제사밥도 먹고 내 몫의 제사감을 직접 받은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제사감은 다음 날 아침 내 머리맡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늘 공평하게 나누어져서. 지금도 제사에 대한 기억은 귀찮음보다는 뿌듯함이 더 많이 남아 있다.

 

바깥 마당에서 안마당으로 그리고 뒤란으로 갔다가 소나무가 휘영청 서서 손님을 접견하는 산소로 내달렸다. 혼자 바빴다. 내 길동무는 주차장에 서서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 있고. 역시 제사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과 갖고 있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아릿한 기운이 가슴께로 전해져 온다. 다 지나간 옛 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녹우당으로 향했다.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 한 해남읍 연동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다. 게다가 해남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전통고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를 제일 먼저 반긴 건 500년이나 된 은행나무. 이 집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듯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압도한다. 해남윤씨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나무로서의 권위가 느껴진다.

 

녹우당은 고산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자리 잡았다고 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중 하나이며, 현재는 고산 윤선도의 14대손인 종손 윤형식씨가 살고 있다. 녹우당이 있는 연동 마을은 예전에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공적으로 조영한 연못이 있다.

 

녹우당에는 안채를 비롯 사랑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 추원당 등 전통 고가의 모습이 잘 갖추어져 있다. 늙은 은행나무 옆으로 난 높다란 솟을대문으로 들어서자 녹우당이 나온다. 이곳의 가장 상징적인 고 건축물이다.

 

녹우당은 고산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고산이 봉림대군인 효종의 스승이었다)이 고산에게 하사한 집을 1669년(고산이 82세 되던 해) 뱃길로 옮겨와 다시 지은 집이라고 한다. 한때 아흔 아홉 칸에 달하던 녹우당 고택은 현재 55칸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사대부 양반가의 고택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녹우당. 녹우당 하면 고택 전체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나, 녹우당은 이 집의 사랑채를 말한다. 사랑채인 녹우당이 들어서면서 전체적인 모습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현판으로 걸려 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는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쓴 것으로 이때부터 이 집의 공식적인 명칭이 됐다. 옥동 이서는 집 앞의 푸른 은행나무 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을 보고 녹우당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고산 윤선도(1587년, 선조20∼1671년 현종12년)는 조선중기에 호남이 낳은 대시인이며, 조선조 시조문학을 마지막 장식한 대가이다. 문학뿐만이 아니었다. 철학을 위시해서 경사서 제자백가에 통달하여 천문, 지리, 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나 특히 시조문학을 으뜸으로 꼽았다.

 

또한 그의 후손인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되었고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해남의 문예부흥이 이곳 녹우당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오래 전 다녀 갔던 녹우당은 그동안 몹시 쇠락해 있었다. 쓸쓸한 가을이라 그럴까? 그때는 꽃피는 봄날이었다. 그때 난 이곳이 무릉도원 같다고 생각했다. 여행이란 참 시시때때로 다른 기분을 맛보게 한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혹은 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돌담길을 걸어 나가 고산 사당을 지나고 어초은 묘소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어딜 가나 호젓한 산길을 걷는 기분은 참으로 좋다.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산길은 아침의 정기를 받아 마음까지 촉촉해진다. 발길을 돌려 다시 안채로 돌아온다. 그래도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쓸쓸하다.

 

다시 한 번 둘러보고 나오는데 양쪽을 차지한 고려당 같은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왼쪽은 유물전시관인지 알겠는데 오른 쪽은 뭘까? 가까이 가서 보니 관리소다.  막 눈길을 거두는데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이 길을 가신다.

 

금방 마음이 숙연해진다. 돌아서서 녹우당을 한 번 더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꼬부랑 할머니 같은 녹우당에 위풍당당 젊은 사람 같은 부속 건물이구나. 그러면서 아쉬워한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원칙은 없나. 문화재를 기준으로 해서 부속건물을 짓든지 하는. 이런 기분 나만 느끼는 걸까?

덧붙이는 글 | 11월 9일 다녀왔습니다.


태그:#해남, #녹우당, #영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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