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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잘난 자식보다 못난 자식이 더 부모를 챙긴다. 왜 그럴까. 왜 삶에는 종종 그런 아이러니가 끼어드는 걸까. 이런 변수야말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결정짓는 요소다.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들판은 쓸쓸하다. 황금 물결 출렁이던 벼 이삭도, 바삐 오가던 농부의 발길도 뜸해졌다. 빈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허수아비들이다. 허수아비의 기능은 농부가 애써 기른 곡식을 호시탐탐 노리는 새를 쫓는 것이다. 그러나 허수아비의 역할이 거기서 끝난다면 너무 싱거운 일이다.
 
허수아비에겐 사람을 윽박지르는 권위가 없다. 제아무리 잘 만든 허수아비일지라도 덜 떨어진 모습이긴 마찬가지다. 허수아비에겐 바라보는 사람을 절로 미소 짓게 하는 해학이 있다. 과장과 단순함이 빚어내는 익살스러움이 있다. 그 해학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지난 10일, 충북 영동 여행길에서도 허수아비들을 만났다.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본 것이 무슨 이야깃거리가 되겠는가. 허수아비들은 영동문화원 앞길 감나무 가로수에 기대어 서 있었다. 10월 30일 영동문화원이 개최했던 허수아비 만들기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이만든 것을 이곳으로 옮겨다 전시해 놓은 것이다.
 
문화원 안 마당까지 길게 늘어선 허수아비들은 제 고향인 들판을 떠난 온 탓인지 약간의 우수(憂愁)가 느껴졌다. 들판에 선 허수아비에게서 느껴지던 달관한 자의 느낌은 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가 지닌 본래의 해학이야 어디 가겠는가.
 
 
 
 
 
허수아비가 은연중 경계하는 건 인간의 헛된 욕망
 
허수아비란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허수아비란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일까? 아니면 한자말과 합쳐진 말일까?
 
나는 허수아비라는 이름이 합성어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둔다. 허수(虛手)라는 한자말에 아비라는 우리말이 합쳐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손이 비어 있어서 허수(虛手)아비인가? 아니면 언덕에 서 있어서 허수(언덕 허 墟)아비인가? 어느 쪽이 됐든지 간에 깨끗한 이름인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허수아비는 빈 들에 서서 새떼들의 욕망을 제어한다. 그러나 허수아비가 은연중 경계하는 것은 인간의 헛된 욕망이다. 허수아비는 자유분방하고 천진하고, 천진하면서도 치기어린 모습으로 자신을 희화화하면서 자신을 만든 인간들을 풍자한다.
 
허수아비는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나라 들판을 지켜온 것일까. 농경생활의 시작과 더불어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한참 후에야 생겨난 것일까? 그 시원을 우리가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리라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들판을 지켜왔던 허수아비도 새총 등 새로 태어난 문명의 자식들에게 점차 자리를 물려주면서 사라지고 있다. 영동 문화원 앞과 안뜰에 서 있는 허수아비들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이 또한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들 표상이 아닐는지.

태그:#허수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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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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