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 주인 되는 데 인생을 걸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순전히 위의 한 문장 때문이었다. 책을 읽기로 작심하고 나선 2학기부터 퇴근 후 나의 발길은 늘 강진도서관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18년 동안 유배된 강진 땅에서 그의 사상을 꽃 피웠던 강진의 땅 냄새는 어느 때부턴가 다산을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압도했다. 희망이 없는 유배지에서 확실한 목적의식으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역사의 주인이 된 다산 정약용.
이 책은 다산이 그의 제자와 자식들에게, 가까운 지인들에게 편지 형식을 빌어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 분야가 방대하여 경세(정신을 맑게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경제 분야에 이르기까지 크게 10개 분야로 대별하여 글을 싣고 있다.
1독을 마치고 10여일이 지나 다시 들어가 읽어보면 다른 목소리가 들리는 책이다. 옛 사람의 글이로되, 그 생각은 현대에도 딱 들어맞는 말들이 즐비하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죽비소리가 겨울바람처럼 차갑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글로 일갈하는 다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새롭거나 경이롭기보다는 그 설득력에 깨달음이 번쩍인다. 한문학을 전공한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가 다산어록에 해석을 붙이고 풀어 쓴 소개서이다.
"열흘 만에 버리는 것은 누에의 고치다. 여섯 달 뒤에 버리는 것은 제비의 둥지다. 일년 후에 버리는 것은 까치의 집이다. 인간의 백년이 길어 보여도 누에의 열흘과 다를 게 없다."
하루살이의 하루와 나의 인생이 결코 다르지 아니 하니 슬프다! 그래도 꿈꾸는 자로 살려고, 청복을 누리려고 퇴근 후 도서관에 앉아 다산의 어록을 읽으며 나를 닦다가 일갈하는 그의 목소리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얕은 내 지식과 지혜의 샘물에 한탄한다.
다산의 목소리는 독서법은 물론이고 시 창작의 정신과 문학 수업, 이잣돈 굴리는 법과 같은 실물 경제론까지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바탕은 모두 인간됨이 기본이니 무릇 '사람이 먼저'임을 가르치고 있다. 명예와 작위도 그의 인품에서 비롯되고 얼굴 모양까지 직업군에 따라 분류하는 대목에 서면 놀라울 뿐이다.
"공부하는 학생은 그 상이 어여쁘다. 장사치는 상이 시커멓다. 목동은 상이 지저분하다. 노름꾼은 상이 사납고 약삭빠르다. 대개 익힌 것이 오랠수록 성품 또한 옮겨간다. 사람은 생긴 대로 노는 것이 아니다. 노는 대로 상이 생긴다" 하였으니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현대적 해석과 통하는 면이 있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 맘에 걸렸지만 굽힐 줄 모르는 선비의 기개라고 미루어 생각해 보았다.
다섯 살만 먹으면 일을 시켜야 하고 근면하고 부지런함을 강조한 다산의 실학 사상은 현대의 부모들이 깊이 새겨 들을 일이다. 공부만 시키고 집안 일에는 등한한 요즘의 가정 교육을 경계하는 말이니 한 사람이라도 놀고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의 경중이 아니라 협동 정신과 근면함을 강조한 것이다. 가장 눈길이 오래 머문 대목은 '시다운 시'를 논한 다음 글이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대를 상심하고 시속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찬미하고 풍자하며 권면하고 징계하는 뜻이 없다면 시가 아니다. 때문에 뜻이 서지 않고 배움이 순수하지 않으며 큰 도를 듣지 못하여, 임금에게 미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할 마음을 지니지 못한 자는 능히 시를 지을 수가 없다."
이 대목에 대하여 정민 교수가 풀어 쓴 글은, 음풍영월은 시가 아니다. 자아도취가 시가 아니다. 시를 쓰려면 먼저 뜻을 세워라. 시를 쓰려면 먼저 배움에 몰두하라. 가슴에 큰 도를 품어 세상일을 제 일처럼 근심하는 마음을 지녀라. 시는 안타까움에서 나온다. 시인이란 명성을 탐하여 개폼이나 잡으려거든 차라리 붓을 꺾어라!
글을 읽고 생각이 차서 뭔가 쌓이면, 세상 일에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면 쏟아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려서 자판 앞에 습관처럼 앉았던 지나온 내 시간을 한 문장으로 때려 눕힌 천둥치던 다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두 달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책과 함께 살아야 하고 작은 가르침이나마 날마다 전해야 하는 내 자리의 엄정함을 생각하며 부끄러운 글일지라도,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라도 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힘도 다산어록의 힘이다.
사람이 되고자 고전으로 돌아가 죽비를 달게 맞는 나의 노력을 눈감아 준 것은 역시 책이었으니, 나의 짧은 필력으로 함께 나눔이 부족하신 분은 필히 읽어 보실 것을 권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