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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성 망막증입니다. 스트레스가 원인이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치료되기도 하지만…."

 

진단을 받고 나니 안심이 된다. 저절로 나을 수 있는 병이란다. 약 3주일 전부터 오른쪽 눈이 침침하고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병원에서 시력 측정을 해보니 왼쪽 눈은 1.0, 오른쪽 눈은 0.8이다.

 

몇 날 며칠을 별러서 안과 병원을 찾았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오늘은 정말 가야지'라고 다짐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게으른 탓이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병원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지는 않았다.

 

맨 처음 눈이 침침하고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할 때는 며칠 그러다가 말 줄 알았다. 잠을 못 자고 심하게 피곤하면 가끔 눈이 침침한 경우가 있었기에.

 

한쪽 눈 시력이 갑자기 떨어지고 나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초점이 잡히지 않으니 머리까지 ‘멍’ 한 상태가 계속됐다. 왼쪽 눈으로 보면 커다란 글씨가 오른쪽 눈으로 보면 작고 찌그러진 글씨로 보였다.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가 가장 답답했다.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으니 말소리까지 멀게 느껴졌다.

 

1주일 정도 지나고 난 후부터는 ‘그래 한번 느껴보자’라고 생각했다. 시력 나쁜 사람들 마음을 알아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평생 눈 때문에 고생한 형님 마음을 한번쯤 느끼고 싶었다.

 

시력만은 자신 있었다. 양쪽 모두 1.0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여섯 살 터울 형님 시력이 모두 내게로 와서 눈이 밝은 것이란 생각이 들 만큼. 형님은 시력을 유아기 때 영양실조로 잃었다. 부모님은 그것을 늘 가슴 아파하신다. 형님 시력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형님 안경을 쓰면 어지러워서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었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형님은 '안경잽이'였다

 

 형은 시력이 너무 나빠서 학창시절 안경이 없으면 신문도 읽을 수 없었다.
형은 시력이 너무 나빠서 학창시절 안경이 없으면 신문도 읽을 수 없었다. ⓒ 이민선

 

2001년 11월 13일, 병원에서 형님 유품을 받았다. 간호사가 내미는 유품을 보고 있자니 늦가을 찬바람 맞으며 뒹구는 은행잎을 보고 있는 것만큼이나 쓸쓸했다. 콘택트렌즈를 소독할 때 쓰는 식염수 한 통과 렌즈 케이스, 그리고 안경이 전부였다.

 

안경이 나를 울렸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한참을 훌쩍거렸다.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리고 노숙자 차림으로 내게 찾아왔을 때, 비상용으로 쓰라고 맞춰 준 것이다. 형님은 렌즈가 없으면 장님과 마찬가지였다.

 

안경은 맞추지 않겠노라 고집을 부렸었다. 안경을 맞춰도 어차피 쓰고 외출할 일은 없다고 했다. 얼굴이 꼭 원숭이처럼 변한다는 이유였다. 그 이유는 안경을 받아본 이후에야 알 수 있었다. 도수가 너무 높아서 안경알을 바라보기만 해도 어지러웠고 얼굴 모양도 이상해 보였다.

 

형님은 안경점에서 안경을 찾기도 전에 다시 떠났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벽은 형님에게 내려진 천형이었다. 십수 년을 그렇게 떠돌아다녔다. 육 년 전 11월, 경북 청도에서 쓰러진 형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때 나이 마흔,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오랜 방랑 때문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이 패혈증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안경은 돌아가시기 일 년 전 추석날 시골집에서 건네준 것이다. 하영이(딸, 형님에게는 조카, 당시 3살) 옷 한 벌 사들고 온 형님 손에 안경을 쥐어줬다. “급할 때 써, 렌즈 잃어버리면 하나도 안 보이잖아”라고 말하자 형님은 살짝 눈시울을 붉히고는 다시 떠났다.

 

하룻밤 자고 가라고 가족들이 말렸지만 무엇이 그리 급한지 서둘러 떠났다. 그것이 살아생전 가족들과 마지막 조우였다.

 

어렸을 때 형님 별명은 '안경잽이', '쌍창', '해태눈깔' 등이었다. 안경 때문에 놀림을 당했던 것이다. 그 당시 시골 학교에 안경 쓴 아이는 극히 드물었다. 놀림 받는 것이 싫었던 형님은 안경을 쓰지 않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그러다가 안경알도 깨 먹기 일쑤였고 때론 잃어버리기도 했다.

 

이제 나도 '안경잽이'가 돼야 할 듯

 

이제 내 나이 마흔, 형님이 돌아가실 때와 같은 나이다. 눈에 이상이 왔을 때 형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서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6년이 흘렀을 뿐인데 난 가끔 형님이 내 인생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무심한 나를 일깨우기 위해 형님이 돌아가신 11월에 ‘중심성 망막증’이란 병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지난 13일, 형님 제사를 지내며 눈에 대해 생각했다. 오른쪽 눈 초점이 흐려져 있어서 영정 사진이 흐릿하고 어둡게 보였다. 형님이 언젠가 내게 했던 말과 같은 현상이었다. 형님은 “눈 나쁜 사람은 모든 것이 흐릿하고 어둡게 보이는 거야”라고 하면서 언젠가 콘택트렌즈를 힘겹게 눈에 끼워 맞춘 적이 있다.

 

형님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넘게 초점 맞지 않는 눈으로 지냈다. 이 정도면 무심한 동생에 대한 서운함은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나도 눈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안경을 맞춰야 할 것 같다. 그때는 나도 형님처럼 안경잽이가 되는 것이다.

 

찬바람이 낙엽을 쓸고 다니는 11월, 마흔에 돌아가신 형님과 안경을 생각하니 쓸쓸함이 더욱 깊어진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안양뉴스(aynew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안경#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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