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 부설 간판문화연구소와 행정자치부는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좋은 간판 사진을 올리면, 추천 및 심사를 통해 좋은 간판에 상을 주는 <대한민국 좋은간판상 www.ganpansang.org>(이하 <좋은간판상>)을 제정, 운영하고 있다. 좋은 간판상 선정을 위해, '간판별동대'라는 도시 간판문화 개선을 이끄는 시민동아리이자 연구모임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간판별동대는 11월 17일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로부터 "Social Designer Story"라는 제목의 특강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는 먼저 자신을 소셜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고 소개했다. 좀 더 살기 좋고 아름답고 민주적인 우리나라, 세계를 디자인하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소셜디자이너의 노트북엔 공공디자인이라는 폴더가 있었고, 그는 디카를 들고 찍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안에는 이미 엄청난 정보들이 축적되어 있는 듯했다. 그는 국내외 출장을 다니며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찍고 정리하여 다른 곳에 적용할 수 있도록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보물창고를 채워가고 있었다. 별동대들은 각자 관심있는 주제의 폴더를 열어봐달라고 했다. 외국의 셔터, 버스/택시정류장, 자판기, 전화기, 의자, 각종 안내표지판, 지하철, 공원, 수하물 보관소, 심지어 도심의 수도시설까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크고 작은 아이디어들이 폴더에 가득했다.
예를 들어 일본이나 홍콩의 많은 상가들은 내려진 셔터에 마을지도나 그림을 그려, 지나가는 시민들이 활용하는 동시에 도시미관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뉴욕의 한 개인 건물 앞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벤치를 놓았는데, 의자 하나가 지나가는 통로에 불과했던 그 공간을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장소’로 바꾼 것이다. 박원순 상임이사는 공공디자인이나 간판 문제의 핵심을 외형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 생각, 발상으로 보았다. 도시의 이미지와 색깔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조형물이나 건축물이 아닌 작은 소품들이라는 것이다. 산뜻한 초록색으로 칠해진 수도배관, 지하철 벽의 세계인권선언문, 창의력이 클 수 있는 놀이터 등 시민을 배려하는 작은 아이디어가 정책이나 경제 시스템 못지않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역사라는 큰 틀에서 도시를 만들어 가야함을 강조했다. 외국의 한 도시는 작은 건물 하나를 철거하고 새로 지을 때에도, 문틀이나 간판 등 옛 건물을 흔적을 하나라도 남겨야 한다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이전 세대들의 삶을 통해 마련된 것임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다음 세대에 흔적을 남길 것이라는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도시계획을 세울 때 있어서도 어떤 역사적 결과물이라도 현재에 의미를 남길 수 있도록 전환되어야 하며, 동시에 다음 세대가 그들의 요구와 비젼을 가지고 채워갈 여지를 남겨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민주주의의 모습일 것이다. 베를린의 Industrial Park는 산업화 초기의 폐공장을 공원 및 콘서트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테이트모든 화력발전소는 외관을 유지한 채 유명한 미술관이 되었다. 탄광지역의 티센제철소는 디자인 센터로 탈바꿈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었다고 한다. 박원순 상임이사는 전통과 역사가 남아있는 도시에는 그 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아이콘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만든 표어나 캐릭터가 아니라 그 도시의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함께 일구어온 정체성이라 하면서 서울의 아이콘은 무엇인지 별동대에게 물었다.
우리는 무엇이든 부수고 팔아먹을 아파트만 짓고 있지 않냐는 물음에 별동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를 둘러봐도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 숲. 우리는 장대한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평가하고 복원할 눈과 손을 가지지 못했다. 그것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 다들 씁쓸해졌다.
그는 간판문제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법을 통해 간판을 정비하고, 디자이너를 양성해 간판디자인을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간판주가 갖고 있는 자기 공간에 대한 정체성과 그것을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간판은 자신의 역사성과 삶의 편린들의 집합물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외부의 디자이너가 함부로 결정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이야기, 컨텐츠에 자신이 있어질 때 간판은 저절로 작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지금과 같은 획일적이고 요란한 간판이 난립하는 것은 스스로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간판문화는 깊고 성숙한 사회의식의 변화와 함께 올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강조했다. 간판이 간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역사, 경제, 제도, 심리 등 매우 복합적인 문제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강의를 통해 한 층 더 깊은 곳까지 고민과 활동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강의를 듣는 이들 모두 엄숙하고 진지해지는 듯했다.
박원순 상임이사는 미래는 창의력이 지배하는 사회, 문화와 예술과 디자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간판문화연구소와 간판별동대는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가장 앞서서 맞이하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사회의 변화를 읽을 줄 아는 우리 손에 세상을 바꿀 가능성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강의를 마치고 박원순 상임이사가 질문을 던졌다. 별동대 활동이 끝나는 동시에 그 가능성을 찾아 길을 떠나겠냐고. 간판별동대는 열정을 가진 소셜디자이너가 될 것을 약속했다. 강의 중 비가 내렸었는지 젖은 아스팔트 위에 바람이 꽤 차갑게 불었다. 종로 거리의 저 요란한 간판들도 언젠가는 2007년 서울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보존될 날이 올 것이다. 우리에게 어지럽고 참기 힘든 현재의 이 거리가, 다양하면서도 질서있는 거리를 누릴 미래의 그들에게 하루 빨리 역사가 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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