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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진! 그가 23일(금)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여수 신기초등학교 강당에서 연 <행복도시를 만드는 시민운동> 출판기념회에는 3백여명의 지역인사와 뜻을 같이하는 운동가들이 그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집중하여 '서울 공화국'이란 말로 모든 것이 압축되는 한국 사회. 그 속에서 지방분권화를 외치며, 지역을 떠날 능력이 없어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바로 ‘행복도시’라는 말로 서두를 장식했다.

 

그는 1955년 여수시 수정동에서 태어나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곳에서, 태평양으로부터 밀려오는 외세와 거센 파도를 보며 오동도 부둣가에 정박한 외항선을 보고 자랐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보낸 그는 광주교육대학과 조선대학을 졸업했다. 고향으로 발령난 그는 고등학생 이상 단체 해산을 명령했던 암울한 70년대 긴급조치 상황에서, 학생아카데미와 청년아카데미를 조직하여 흥사단 여수분회를 창립하였다.

 

시민단체로는 YMCA밖에 없었던 시절에 우수 학생을 선발하고 자부심과 긍지를 갖도록 지도한 그는, 학생과 주위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모범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새벽 6시 자산공원에 올라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애국가 4절까지 부르기, 3분 스피치, 쓰레기 줍기, 독서토론회, 금요강좌, 수련회, 문답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심어주며 ‘여수의 도산 안창호’라는 말을 들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을 맞이하여 시 단위지역에서는 전남에서 유일하게 헌혈운동과 성명서를 등사기로 밀어 숨겨 다녔다. 울분과 분노를 삭이면서 행동하지 않은 양심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던 그는, 6월 항쟁을 겪으면서 소수 엘리트 중심의 흥사단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이름처럼 해직을 밥 먹듯 한 정해직 선생님을 만나면서 느낀 부끄러움이 잠재되어서, 우연찮게 교육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1987년 9월 26일 여수·여천 교사협의회가 창립되고, 88올림픽으로 썸머타임제가 실시된 어느 날 근무하던 여도국민학교교사협의회 회장이 되었다. 그 후 '빨갱이 교사'라는 누명과 ‘교사가 어찌 노동자인가?’라며 전국 최초의 사립초등학교 해직교사가 되었다.

 

해직을 반대하는 많은 학부모 서명과  집회에도 소용이 없었다. 명동성당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열흘간의 단식과 13번의 경찰 연행은 오히려 그의 투쟁 의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됐고 재야 운동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해직당한 직후 자전거 뒤에 참교육 티를 싣고 다니면서 마련한 돈으로 ‘열린교실’을 만들었다. 주민도서관과 문화 공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동료 교사와 학생, 학부모, 지역 주민을 만나며 그들의 애환을 듣고부터 지역의 크고 작은 일에 나서기 시작했다.
 
교육감이 초도순시 차 여천교육청을 방문할 때는 혼자서 종이 피켓을 들고 앞마당에 걸터앉아 1인 시위를 했다. 시의원 징계에 맞서 시청 정문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밀고 당기는 대치 속에 육중한 쇠문이 발등에 떨어져 발가락이 부러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말은 거칠어갔고, 최루탄과 곤봉을 무서워하지 않는 싸움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수뿐만 아니라 여의도, 광주 금남로, 부산, 마산 등 전국을 다니면서 거리 시위와 점거 농성을 하였고, 집회에 나서서 선동하는 발언을 사자후처럼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여수 YMCA이사, 환경교사모임, 여수여천지역사회연구소, 환경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등 시민단체를 조직 또는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KBS 여수방송국 고정 칼럼 방송, 다른 방송사와 언론의 인터뷰와 출연이 계속되었다.

 

1994년 여천시 관내로 복직되면서 학교 밖에서 참교육을 외쳤던 당사자로써, 사회가 교육과 교사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복직교사로서 내부 개혁은 당연한 과제였다. 오랜 관행에 젖어있는 학교를 바꾸는 것에 대한 높은 벽에 복직 2년만에 쓰러져 2개월 병가를 내야만 했다.

 

이미 무쇠처럼 단단해진 그의 의지는 지역의 최대 현안인 3려통합운동과 민선 단체장 선거를 맞아 시장 후보 정책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시민자치운동으로 방향 전환했다.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여천시민협’으로 통합 후, ‘여수시민협’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여수의 일은 여수에서, 여수 사람이 나서서 해결한다는 분권 의식으로 참여와 자치를 위한 새로운 시민운동을 시도하였다. 상근자 중심이 아닌 직업을 가진 시민들이 일을 서로 나눠서 작은 참여 속에  큰 기쁨을 거둔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문화관광답사와 시민토론회, 자치 강좌, 의정 감시, 시내버스 공동 배차제 실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지역의 주요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연대 활동이 자리 잡았다. 90년대 초반 ‘여수여천지역사회운동협의회’를 시작으로 시민단체연대회의 정책위원장과 집행위원장을 겸하면서 여수가 전국 제일의 시민운동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한 선생 또는 한 대표라고 불린다. 한 선생은 교육 운동을 상징하고, 한 대표는 시민운동을 상징하는 호칭이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겪기 힘든 이중 고통에 시달렸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면서 “아이들이나 열심히 가르칠 것이지 저런 데까지 나설까?”하는 의구심과 “자기일도 못하면서 시민운동을 한다”는 비아냥을 듣지 않기 위해 몇 배로 노력해야 했다.

 

전국YMCA연맹 이학영 총장은 “오늘 우리 사는 세상에 한창진 선생님 같은 분 천명만 계신다면 아마 세상이 변해도 야무지게 변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말한다.

 

대학생 시절부터 30년지기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전국 흥사단 이사장 겸 월드리서치 대표 박인주씨는 “한씨를 통해서 여수의 희망을 보았다. 앞으로 여수를 더욱 아름답고 행복한 도시로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축하의 말을 했다.

 

30년 시민운동을 결산하면서 쓴 그의 책은, 시민의 자존심 3려통합, SOC의 싹 세계박람회,  보물단지 여수산단, 성숙한 시민사회, 미래의 투자 지역교육, 시민참여 자치 행정의 6개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 다 있는 자가용도 없이 매일 운동화를 신고 출퇴근하는 그는, “여수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사는 것이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한씨는 ‘아름다운 여수, 살기 좋은 여수, 자랑스런 여수’가 되는 행복한 도시의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오늘도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맨다.


태그:#한창진, #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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