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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길에서 나를 만나다>
 <그길에서 나를 만나다>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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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의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좋은 사람들과 알코올을 앞에 두고 밤이 새도록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통화를 한 친구와의 마지막 인사는 꼭 이랬다. ‘하여간, 우리 언제 만나면 정말 찐하게 한잔 마시며 원 없이 얘기하자’였다. 물론 그러한 약속들은 공수표가 되기 쉬웠고 그랬기 때문에 알코올과 대화에 대한 아쉬움은 늘 일었다.

그러면 지금은? '술'에서 '걷기'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술과 수다’였다면 지금은 ‘걷기와 수다’가 되었다. 등산이든, 그냥 평지든, 공원길이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는 굽이굽이 끝도 없이 걸으면서 그 길만큼이나 끝도 없이 얘기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내 쪽에서 하는 통화의 결말은 늘 ‘우리 늙으면 정말 어디어디를 발이 부르트도록 쏘다니자’가 된다.

아무튼 내 마음이 이러하기에 언제부터인가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읽거나, 보거나 할 때면 아직은 떠날 수 없는 처지이기에 간접체험만으로도 충분하고 그런 체험을 준 이들이 고맙기까지 하다.

스페인 순례의 길,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도 언제부터인가 나는 동경하게 되었다. 그 길은 누구랑 갈까? 일단은 걷는 능력이 있어야 되니까 아무래도 작은 언니에게 후보 1순위를 줘야겠지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는데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은행나무)를 읽고 나니 용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생겨났다.

독일의 인기 코미디언인 저자는 오랜 방송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와 만성피로로 청력이 약해졌는가 하면 응급실에 실려가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지경에도 이르게 되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랬다고 그는 그 참에 자신에게 ‘휴식’을 주기로 하였다. 그 휴식은 다름 아닌 ‘야고보의 길’을 걷는 것.

저자는 ‘생장피드포르’에서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까지 장장 42일 동안 600여 킬로미터를 걸었다. 평소 계단 한 층도 걸어 오르지 않던 게으름뱅이였던 그로서는 대단한 일을 한 것이었다.

그 길은 대단히 험하여라

나는 야고보 성인이 걸었다는 그 순례길이 포도밭을 지나고, 밀밭을 지나며, 때로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도열한 시원한 가로수 길들로 이루어진 줄 알았다. 그래서 아주 낭만적인 길이자 사색하기 좋은 ‘폭신폭신’한 길일 거라 생각했는데 천만에.

물론 내가 상상한 대로 아름다운 길도 있지만 이 책 저자의 경험을 보자면 그런 폭신폭신한 길보다 힘들고 위험한 길들이 훨씬 많아 보였다. 어떤 길엔 ‘들개’들이 출몰하고 또 어떤 길은 갓길도 변변치 않은데 덤프트럭들이 미친 듯이 질주하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걸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기온 40도의 대지에서 경사진 오르막길만 11킬로미터를 걸어야 되는 곳도 있었다.

특히 저자의 길동무가 된 영국인 ‘앤’의 경우, 수도복을 경건히 차려입고 순례하기에 어디로 보나 신심 깊은 순례자인가 싶어 안심하고 동행하였는데 알고 보니 치한이어서 혼비백산한 일도 있었다고 하였다. 유서 깊은 순례의 길인만큼 적은 순례자의 정신과 육체뿐인가 했는데 그 길도 이 속세 못지않게 알 수 없는 위험들이 항시 도사리고 있나 보았다.

때문에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순례의 길에 오르지만 오직 ‘15%’만이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그러하기에 옛 시대의 순례자들은 더러 순례 도중 생을 마감하여 길가에 묻혀 이름 없는 십자가로 남아 있다고.

이 책을 읽고 나자 나는 이 순례의 길을 걸을 자격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서워하는 개, 그것도 그냥개가 아닌 굶주린 ‘들개’라니. 저자는 귀엽고 애처롭다고 했지만…. 게다가 치한이라, 엄두가 안 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친구만 있으면 또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산티아고 순례 길에 대해 낭만으로만 가득 찼던 내 맘에 현실을 알려준 책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그 길’을 가려면 우선 다리 튼튼하고 담이 큰 길동무를 하나 아닌 ‘여럿’ 확보해 두는 것이 급선무겠다.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야고보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은행나무(2007)


태그:#야고보,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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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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