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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에 얽힌 어린 시절의 추억

 

지금 아이들은 아침에 눈 떠 세수하고 밥 먹고 나서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바쁘지만, 나의 어린 시절엔 그렇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온갖 잔일들과 심부름을 도맡아야 했다. 닭 모이 주는 일에서 소에게 줄 꼴을 베어오는 일, 쇠죽 쑤는 일까지 끝내고 나서 학교에 가야 했다. 학교에 갔다 다녀와서도 논이나 밭일을 거들거나 나무를 하러 가야했다. 그 시절엔 어린 아이도 엄연히 하나의 노동력이었다.

 

나의 하루 일과의 시작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닭장 문을 열고 밤새도록 그 안에 갇혀 있던 닭을 밖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다른 집과 달리 우리 집 닭장은 특이했다. 토방 아래로 깊고 길게 굴을 파고 만든 것이었다. 닭장 문 앞은 커다란 돌로 막았다. 저녁때가 되면 마당과 텃밭을 떠돌며 자유를 즐기던 닭들을 닭장 안으로 몰아넣는 일도 나의 일이었다.

 

그때마다 닭들과 나의 숨바꼭질이 되풀이되었다. 닭들은 본래 새였던 자신들의 정체성에 걸맞는 권리장전을 누리려 하고 어린 나는 그 권리장전을 무력화하려는 싸움이었다. 이리저리 도피하다가 맨 나중에 잡힌 닭은 모가지를 꽉 잡힌 채 닭장 안으로 내던져지곤 했다.

 

새벽엔 닭장 문을 가로막고 있던 돌을 치웠다. 그러면 닭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간밤에 닭장 안에 맨땅 위에 낳았던 제 혈육의 존재는 내팽겨친 채 '화려한 외출'을 감행하는 것이다. '새 대가리'들이란 경멸을 자초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닭들이 다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어두컴컴한 닭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암탉들이 낳은 달걀이 눈에 띄는 대로 망태에 주워담았다. 이제 막 닭의 몸을 빠져나온 달걀을 손에 쥐었을 때는 얼마나 따스했던가. 그것은 잠 안 오는 밤에 주물럭거리면서 잠을 청했던 할머니의 젖무덤에서 느끼는 따스함과는 다른 따스함이었다.

 

배가 출출할 땐 망태에 담는 대신 달걀을 슬쩍 깨트려 톡, 톡 입안으로 털어넣는 때도 있었다. 원소유주인 암탉들과 관리를 위임했던 할아버지께는 미안했지만 삶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단백질을 보충해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모인 달걀은 짚으로 달걀꾸러미를 만든 다음 10개씩 담았다. 닷새마다 광주 서방시장 장날이 돌아오면 할머니는 달걀 2~3꾸러미를 들고 팔러 가셨다. 가내미 고개를 넘고, 금단동 고개를 넘고. 각화재를 넘어서 가야 하는 50-60리나 되는 먼 길이었다. 쌀 몇 되, 콩이나 팥 몇 되를 팔고 나면 더 이상 팔아서 가용으로 쓸만한 게 별로 없었으니 그것이라도 팔아야 했던 것이다.

 

나도 가끔 할머니를 따라 서방 장에 간 일이 있다. 새벽에 길을 떠나 각화재에 당도해 땀을 가라앉히고 잠시 쉬노라면 들릴 듯 말 듯 정오를 알리는 오포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각화재에서는 광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멀리 시꺼멓고 높다란 굴뚝이 보였다.

 

- 할머니, 저게 뭐냐?

- 응, 전남제사공장이란다. 거기서 번데기가 나온단다.

- 번데기가 어떻게 생겼는데?

- 누에처럼 쭈글쭈글하게 생겼다.

 

내가 실제로 번데기를 맛본 건 5학년 때 광주공원에서 열렸던 엑스포에서였다. 그때 "동해의 왕자가 광주에 왔다"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고래 미라도 처음 봤다.

 

서방장에 도착하면 오후 1시가 넘었다. 말바우 앞 길가에 앉아서 계란을 팔았다. 밀고 당기는 흥정이 아주 치열했다. 그때 달걀 한 줄에 30원가량 했던가. 하도 오래된 일이라 가물가물하다. 5원만 덜 준다고 해도 팔지 않고 버티다가 나중에는 싸구려로 넘기는 수도 없지 않았다. 어렵게 달걀을 판 다음 국밥 한 그릇을 사먹고 나서 다시 집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했다.

 

달걀 판 돈 몇 십 원은 대부분 내 학용품 값에 충당했다. 그 돈으로 김덕령 장군 생가가 있는 성안 마을 안에 하나밖에 없던 '점방'에서 공책도 사고 연필도 사고 책받침도 샀다. 때로는 풍선뽑기에 매진하다가 공책 살 돈을 몽땅 날리기도 했다. 어린 날, 작은 달걀들은 그렇게 내 삶의 질을 쥐고 흔들던 아주 소중한 것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한 편의 시로 찾아온 추억

 

이제는 멀어져 간 추억이다. 내 생에서도 멀어졌지만,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풍경이다. 이제 그 추억은 한 편의 시로 날 찾아오곤 한다.

 

 

일어나자마자 닭장으로 달려가면 
아버지가 손에 쥐어주던 갓 낳은 달걀로부터 
나는 따뜻함을 배웠다.
   
분노를 배운 것도 닭장에서였다. 
부리로 상대의 눈을 쪼아대며 
어느 하나가 죽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는. 
   
건넛마을 아파트에 달걀을 팔러 가던 날 
친구를 만날까봐 언니 뒤에 비비 숨던 어느 대낮 
그러나 닭도 달걀도 별로 돈이 되지는 못했다. 
   
텃밭의 채소 몇 뿌리와 더불어 
무언가 기른다는 것이 아버지를 살게 하는 힘이었다. 
그 손에서 길러짐으로써 닭들은 아버지를 살렸다. 
종종거리며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양계장집 어린 딸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결국 닭은 닭장 속에서 견디며 
우리 二代를 견디게 한 셈이다.

 

- 나희덕 시 '양계장집 딸' 전문

 

나희덕 시 '양계장집 딸'은 1994년도에 나온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 실려 있는 시다. 시를 읽으면 맨 먼저 풍겨오는 건 아련한 닭똥 냄새이다. 사진으로 보는 시인의 얼굴은 영락없는 '범생이'다. 시까지 아주 얌전하다. '얌전하다'는 말이 좀 과하다면 '곱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시들을 읽을 적마다 그런 냄새를 맡곤 한다.

 

솔직히 그런 '범생이'인 시인이 달걀의 따스함을 안다는 건 의외였다. 그러나 그가 따스함을 맛본 달걀은 "아버지가 손에 쥐어주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달걀에서 느낀 따스함보다 그가 느낀 따스함이 더 컸을는지 모른다. 아버지라는 육친의 손을 거쳐서 왔기 때문이다. 시인이 느낀 건 이중의 따스함이다.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나보다 한참 뒤에 이 세상에 왔다. 그의 어린 시절에도 여전히 "닭도 달걀도 별로 돈이 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건넛마을 아파트에 달걀을 팔러 가"면 왜 창피했을까. 친구를 만날까봐 언니 뒤에 비비 숨었다니 말이다.
어쨌든 닭들은 "아버지를 살"렸고, "양계장집 어린 딸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결국 닭은 닭장 속에서 견디며/ 우리 二代를 견디게 한 셈이다"라고 고백할 만큼.

 

겨울 눈보라 속에서 눈뜨는 육친의 따스함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가 손에 쥐어주던 갓 낳은 달걀로부터/  나는 따뜻함을 배웠다"라는 첫 번째 연에 다 들어 있다. 나머지는 그것을 연역적으로 풀어나가는 것뿐이다.


겨울이란 계절은 어느 계절보다 육친의 따스함이 그리운 계절이다. 육친의 정은 아늑함보다는 거친 눈보라 속에서 눈뜨는 것이다. 점점 나이들면서, 내 마음은 나날이 고체가 되어 간다.

 

우리는 노상 지구의 온난화를 걱정하지만, 이 시대엔 왜 이리 가슴을 적시는 따스한 것이 드문가.  오늘 같은 날은 어린 시절처럼, 막 닭의 몸을 빠져나온 따스한 달걀 한번 만져보고 싶다. 그 온기를 가슴에 품고 남은 세상을 헤쳐나가고 싶다.


#달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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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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