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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집과 낱권


보수동 헌책방골목 책흐름은 이곳 일꾼들 스스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 눈길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 어버이들은 아이들한테 책을 사 줄 때 ‘전집’으로 많이 사 줍니다. ‘낱권책’으로 하나씩 사 주는 어버이가 차츰 늘기는 하지만, 전집으로 덩이채 사는 어버이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헌책방에서도 이런 젊은 어버이들 눈길에 맞추어 전집 갖추기에 마음을 많이 기울입니다.

 

젊은 어버이들이 이런 흐름에 휩쓸리더라도 헌책방 일꾼들이 꿋꿋하게 ‘낱권책도 함께 다루는’ 일손을 붙잡고 있으면 좋으련만, 넓지 않은 매장을 지키면서 모든 책을 골고루 다루기는 버겁습니다. 이리하여 서울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도 ‘낱권책’보다 ‘전집’으로 바뀌는 집이 제법 많아요.

 

슬슬 골목길을 둘러보며 책을 살피다가 <학문서점>에서 발을 멈춥니다. 낱권으로 된 책들도 쏠쏠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2> 버스 차장이 남긴 글


철지난 조그만 잡지가 한 움큼 보여서 어떤 책인가 살짝 펼쳐 봅니다. 부산 쪽에서 나오는 잡지라면 몇 가지 구경해야지 생각합니다.

 

<수필>(아성출판사) 15호(1978)를 펼칩니다. 낯선 이름들만 죽 있는 가운데 이오덕 님 글 한 꼭지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책 안쪽을 펼치니 ‘이덕오’로 이름이 잘못 찍혀 있네요.


.. 이제 농민들의 성격은 어떻게 변하여 갈 것인가? 도시에 대한 농촌의 경제와 문화의 예속상태가 식민지적인 가혹성을 띠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농민들의 뼈속 깊이 박혀 있는 봉건성과 보수성―그 일면에 지닌 평화의 정신도 모두 포함해서―이 급격히 무너져 없어짐과 함께 이번에는 더욱 뿌리깊이 물들여질 새로운 색소가 염려된다.

 

그것은 부박한 유행을 따르는 노예근성이다. 이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이 어린 농민의 아이들도 멀지 않아 거지와 동냥꾼을 보고 돌질을 하게 될 날이 오리라. 내가 교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  〈90쪽〉


저한테 낯선 이름인 분들 글을 읽어 봅니다. 잡지이름이 ‘수필’이기는 하지만, 수필에는 어떤 틀이 없을 텐데, 글멋이나 글치레가 적잖이 보입니다. 어쩌면, 이런 멋부리는 수필 흐름은 오늘날까지도 고이 이어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끄적이는 글도 수필이요, 자기 일기장에 적바림하는 글도 수필일 텐데, 담아야 할 이야기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부터 제대로 갈피를 못 잡는구나 싶네요.

 

 ‘애절한 여차장 고백수기’라는 작은 이름이 붙은 <윤미화-흰구름 가는 곳>(유정출판사,1978)은, 버스 차장으로 일한 이야기를 풀어낸 수기.


.. 정류장마다 문앞에 떼로 몰려와서 문을 열라고 아우성치는 것을 볼 때 한두 사람 더 태울 수는 있었지만 겁이 나서 문을 못 열었다. 차가 영천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한두 사람씩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내리는 사람보다 매달리는 사람은 몇 곱이었다. 앞차장은 앞에서 빨리 하라고만 야단이었다. 미안하지만 다음 차를 이용해 달라는 나의 친절한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올라서지도 못하는 문앞에 서서 억지들을 썼다. 이 난국에 어떻게 써비스를 하며 어떻게 친절할 수가 있을까 도저히 힘으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모여 선 사람들은 대부분이 등교하는 학생들이었다. 나는 도리를 벗어난 일인 줄 알면서도 학생들의 모자를 벗겨서 팽개쳐 버렸다. 학생들은 모자 때문에 문앞에서 떨어져나갔다. 나는 잽싸게 올라서서 문을 닫고 발차 신호를 했다. 뻐스를 못 타서 등교시간에 안타까와 하는 학생들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차를 못 타게 되면 그 분풀이를 나에게 하는 학생들도 있다. 얼굴에 침을 뱉는가 하면 책가방으로 등덜미를 치고 도망가면서 약을 올리는 학생도 있었다. 모든 것이 나 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참기도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지며 눈물이 나기도 했다...  〈145∼146쪽〉


국민학교 3학년(1984년)인가 4학년까지 버스 차장을 보았습니다. 저한테는 차장 누나이지요. 같은 국민학생이면서도 동무들 가운데에 버스삯을 속이려는 아이나 숨어서 안 내고 내리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가기를 즐겼습니다. 아침마다 숨막힐 듯 터지려고 하는 버스가 싫었어요. 버스를 타면 금방이지만, 걸어가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 어렴풋한 옛생각을 떠올려보면, 국민학교 1학년 1학기까지만 버스를 내내 탔고, 2학기부터는 걸어다녔습니다.

 

1982년에 국민학생 버스삯은 60원.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햄버거빵(속에는 아무것도 안 든)’ 하나에 50원. ‘딱따구리 과자’도 50원. 그래서 이런 빵이나 과자를 군것질하고 싶기도 해서, 버스삯 60원을 아껴서 학교로 걸어가서 군것질을 하면 10원이 남습니다. 이렇게 10원이 남으면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학교 앞 새마을문고에 가서 돈을 맡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지만, 그때는 10원이며 20원이며 30원이며 거리낌없이 은행에 맡겼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은행에 돈 맡기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단돈 100원이든 50원이든, 1000원이든.


.. 영하 십육 도의 추운 날씨, 싸늘한 바람이 마구 스며드는 달리는 뻐스 문짝 앞에서 옹크린 어깨를 펴 보지도 못한 채 어느덧 하루가 가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는 느낌이다. 두 정거장만 더 가면 오늘 일은 끝나는 것이다. 종점이 가까와옴에 따라 차 안의 자리는 점점 비게 되고 거기에 앉아 추위에 옹크린 채 몇몇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서글프게만 보인다 …… 종점이 가까와오길래 학생표를 추려서 세고 있는데, 그 여인이 스테프 아래로 내려서서 차가 정차하기도 전에 자기가 문을 열고 뛰어내린 것이 그만 빙판에 나동그라져 사고를 냈다는 것이다...  〈181∼182쪽〉


 제가 인천에서 살던 국민학생 때까지만 해도 버스 차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옛생각이 많을 법도 하지만, 버스삯이 아깝고, 또 만만치 않다고 느껴서 줄이고 아끼며 살다 보니까, 몇 가지 떠오르는 일이 없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차장 일을 맡은 누나한테 “안녕히 계셔요”나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 주던 일, 사람들이 잔뜩 미어터져서 숨이 막힐 때 저 같은 국민학교 꼬맹이들을 감싸 주면서 다치지 않게 해 주던 일, 뒷문을 채 닫지도 못하는 가운데 대롱대롱 매달리면서도 버스를 달리던 모습, 손으로 여닫는 그 문을 잽싸게 놀리던 모습,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버스삯을 걷는 모습 들이 아련합니다.

 

이분들, 차장 누나는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사라지기 앞서 버스마다 ‘자동 단추’가 앞뒤로 생겼습니다. 한동안은 버스 차장이 손으로 문을 여닫지 않고 단추를 또깍 움직여서 여닫곤 했습니다. 버스 차장이 사라진 뒤에는 손님이 또깍 움직여서 내리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뒷문에 달린 단추는 없애고 버스 기사 혼자서 움직이는 장치로 바뀌었고, 버스기사는 때때로 ‘귀찮게 내가 이걸 다해야 하나?’ 하고 푸념하기도 했습니다.

 


.. 물이 없어서 씻지도 못했지만 잠자리가 구해진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입안은 양치질을 못해서 텁텁하고 악취가 풍겼다. 손거울로 얼굴을 보았더니 먼지가 살갗에 죽음깨처럼 배어 있었다.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더니 새까맣게 먼지가 묻어나왔다 …… 휴무날이면 반장의 인솔 하에 한강으로 나가서 빨래를 하기도 하고 머리도 감으며 이틀 동안 뒤집어쓴 먼지때를 강물에 씻기도 했가. 그러나 마음을 휴식할 시간은 없었다. 정해 준 시간 내에 젖은 빨래를 꾸려 가지고 숙소로 가야 했다. 외출은 두 번 휴무에 한 번.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이며, 외출시에는 감독이 끊어 주는 외출증도 받아야 하고 창고 속으로 들어가 뱀의 머리같은 징그럽도록 섬세한 손더듬질로 센타표 조사를 한 다음에 결정이 내려진다. 수중에 현금이 있을 때는 감독이나 사무실에 맡겨놓고 타서 써야 한다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  〈198쪽〉


 버스 차장 이야기를 담은 책은 아주 드뭅니다. 어쩌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만 있는지 몰라요. 이 가운데 <최명자-우리들 소원>(풀빛)은 버스 차장 삶을 꾸밈없이 담아낸 보기드문 책입니다. <흰구름 가는 곳>은 얼마나 있는 그대로 담아낸 책일까요? 노동자나 고학생 글을 책으로 묶어낼 때면 살살 매만지거나 꾸미며 ‘문학다와 보이도록’ 고치는 일이 흔했던 지난날입니다(요즘이라고 썩 나아졌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찬찬히 읽는 동안, 버스 차장이 겪어야 했던 일, 버스 차장이 부대껴야 한 삶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분 글을 읽으며 제가 어릴 적에 보았던 그 버스 차장 누나가 왜 저렇게 고단하고 힘든 얼굴이었으며 늘 짜증을 많이 부렸는지, 그러면서도 우리들(국민학생)을 보며 때때로 웃음을 지었는가를 살며시 곱씹습니다.

 

1970년대나 1980년대에 나왔음직한 <연변조선족자치주지도> 가운데 반 토막을 봅니다. 중국땅은 워낙 넓다 보니 접힌 길그림을 죽 펼쳐도 다 담아내기 어려운 모양인데, 이 길그림은 둘로 나뉘어서 붙여서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쉽게 오른쪽 것은 없지만, 그런 대로 길림성 둘레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3> 책이 걸어온 자취


일본 ‘改造社書店’ 책싸개가 보입니다. 책싸개만 따로 보이지 않고, 다른 책에 싸여 있습니다. 어떤 책을 쌌나 싶어 펼쳐보니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책. 책싸개는 일본 ‘개조사’ 출판사에서 따로 꾸리는 책방에서 쓰던 1970년대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할까. 나한테 쓸모없는 저 책까지 함께 살까. 책싸개만 달라고 말씀을 드려 볼까. 이래저래 망설이다가 책값을 치를 때 책싸개만 따로 얻습니다. 책 파는 분들로서는 이런 책싸개가 번거로울 수 있고, 책손님 가운데에는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이가 많아서 ‘책방 일꾼 눈에 뜨이는 대로 북북 뜯겨지’곤 하거든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책싸개 하나도 ‘책이 걸어온 길’입니다. 책 안쪽에 찍혀 있는 ‘아무개 도서관 도장’ 또한 책이 걸어온 발자국이에요. 책을 처음 사서 읽었던 사람들 손글씨도 책이 걸어온 자취이고요. 그래서 저는 헌책방에서 책을 사들일 때에는 이런 ‘책자취’를 안 다치려고 합니다. 되도록 있는 그대로 살려놓으려고 합니다.

 

지금 이 책을 집어든 저한테는 이 책에 담긴 줄거리가 소중한데, 제가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지난날 이 책을 사 준 사람 손길이 있잖습니까. 줄거리는 줄거리대로 받아들이면서, 이 책이 걸어온 발자취는 발자취대로 함께 느끼고 싶습니다. 발자취가 있기에 줄거리가 있고, 줄거리가 있기에 발자취를 남길 만한 책으로 이어온다고 느껴요.

 

덧붙이는 글 | - 부산 보수동 〈학문서점〉 / 051) 255-2484 . 010-7750-5259

지난 9월 마지막주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네 번째 헌책방골목 잔치"를 열었습니다. 어느덧 석 달이나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는데, 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맡기고 찾고 스캔 하고 이러는 동안 시간이 퍽 흐르는 바람에, 좀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느즈막히 올리는 소식이기는 하지만, 헌책방골목 문화, 또 헌책방 일꾼들 스스로 마련하는 지역 문화 잔치, 여기에 2008년에 다섯 번째로 치르고자 또다시 바지런히 준비하고 있을 여러 분들 몸씀을 북돋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렇게 몇 가지 기사를 붙여서 띄워 보고자 합니다.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태그:#헌책방,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헌책방골목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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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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