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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부터 두 달여 동안 홍콩 아시아인권위원회의 인턴 자격으로 인도 바라나시에서 빈민 지역(달리트 공동체가 있는 도시 외곽이나 시골 지역, 도시 내 달리트 슬럼가) 현장조사를 한 진주 기자가 11월에 다시 바라나시를 찾았습니다. 아시아인권위 연구원으로서 내년 2월까지 머물며 기아, 빈곤, 아동노동 현황을 살피고 가장 차별이 극심하게 이뤄지고 있는 곳을 조사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땡땡 부어오른 지가르의 온몸(2007. 11. 21).
 땡땡 부어오른 지가르의 온몸(2007. 11. 21).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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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오후 6시가 되기도 전에 이곳 바라나시에도 어둠이 짙게 깔립니다. 이제 두 살 된 지가르가 아빠의 품에 안긴 채 바라나시의 공공병원(Varanasi District hospital Din Dyal Upadhyay hospital)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50분.

아빠 문나와 엄마 강가잘리에게도 지가르만큼이나 도시는 낯설고 두렵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도시에 왔고, 생애 처음으로 이렇게 큰 병원엘 왔습니다. 임신 7개월째인 강가잘리는 맨발이 아픈지도 모른 채, 오는 내내 손을 꽉 잡고 놓질 않았습니다.

마을에서 도시까지 거리는 40km 정도입니다. 이만하면 먼 거리도 아닌 듯 들립니다. 마을과 도시 사이에는 도로도 있고, 교통수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가르를 병원에 데려가기로 결정한 시간은 정확히 오후 3시 20분. 40km를 가는 데 3시간 30분이나 걸리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차별적인 카스트 차별... 무사하르와는 차도 함께 타기 싫다

지가르가 사는 무사하르(쥐를 먹는 사람이란 뜻으로, 달리트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자티 중 하나) 공동체는 아네이(Anei)라 불리는 마을에 있습니다. 큰 도로에서 쭉 걸어 들어오면 상층카스트인 브라만들의 논밭을 지나 무사하르들이 살고 있는 작은 공간이 눈이 들어옵니다. 진흙을 개서 만든 초가집이 대부분이라, 한눈에 봐도 제일 가난한 이들의 낮은 땅이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지가르의 몸은 땡땡 부어오른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지가르의 몸에 열이 오르고 설사를 하기 시작하자, 11월 초쯤 아빠 문나는 지가르를 데리고 보건소(Primary Health Centre, PHC)에 가서 약을 타왔습니다. 그런데 지가르는 그 물약을 먹고 난 후 몸이 조금씩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약을 복용하는 건 중단시켰지만, 지가르의 상황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11월 20일이 넘어가면서 지가르는 먹는 것도 힘들어했고, 몸은 더 부풀어 올라 원래의 모습을 알 수조차 없게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가르의 엄마 강가잘리는 문나가 돈이라도 가져와서 병원에 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웃 마을 랄리푸르에서 카펫을 짜는 문나의 수입은 한 달에 1200루피(약 2만8천원) 정도입니다. 요즘엔 농사일이 있어서 상층카스트 브라민인 논 주인에게 곡물을 받아오기도 합니다.

보건소에라도 가려면 차량을 불러와야 하지만 이조차 쉽지 않습니다. 약한 자들이 더 약한 자들을 핍박하기 쉬운 법이지요. 무사하르들이 차량을 안으로 부르면 운전수는 400루피를 요구합니다. 문나에게는 한 달 수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돈입니다. 무사하르라는 이유로 보통 사람의 두 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가르의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병원에 데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바라나시에서 이런 마을 단위로 일하는 인권단체의 도움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차량을 부르러 간 사람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덜거덕거리는 차를 한 대 불러왔습니다.

처음에 어렵게 잡은 차의 운전수는 동반하는 손님을 기다리길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한참 뒤에 온 브라만 출신의 여자 손님은 무사하르 공동체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합석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거리도 멀지 않고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한다고 아무리 사정해도, '무사하르'라는 단어를 듣는 그 순간 얼굴을 찡그린 채 같이 합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운전수도 무사하르 공동체에는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차량을 또 잡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카스트 차별은 모든 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이뤄집니다.

청진기는 들이대면서 책임은 질 수 없다?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오후 5시. 보건소에 왔습니다. 있어야 할 의사도, 간호사도 보이지 않습니다. 의사 한 명은 이미 퇴근했고, 다른 한 명은 전근 대기 중이었습니다. 전근을 기다리는 의사에게 지가르를 데려갔습니다. 맥을 짚고, 청진기를 여기저기 들이대었습니다. 의사는 친절해보였습니다. 아이가 심각하니 바라나시의 큰 병원으로 당장 데려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의사에게 진단서를 요구했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기 전 보건소의 진단서는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전근을 대기하고 있다며 자신은 진단서를 쓸 수도, 처방전을 줄 수도 없는 위치, 즉 책임질 수 없는 처지라며 거부했습니다.

진료실 바닥, 진료대, 책상, 세면대, 의자.
 진료실 바닥, 진료대, 책상, 세면대, 의자.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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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에는 항시 2명의 의사가 근무하고 있어야 합니다. 인도 중앙정부는 기초적인 보건소부터 큰 주정부 병원에 이르기까지 정부 소속 의료기관에 대해 각각 표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근 대기 중인 이 의사가 이 구역의 보건소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새로 발령받은 의사가 현재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는 전근을 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떠나는 시간을 늦추고 있었습니다. 보건소에서 지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으며, 다음 의사가 올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의사였습니다.

이처럼 마을의 가난한 이들이 무료로 갈 수 있는 정부 의료기관들은 약이나 기본시설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의 전문성은 물론 생명에 관한 도덕성도 시설만큼이나 형편없습니다. 강가잘리를 위한 약만 타가지고 보건소를 떠났습니다.

강가잘리는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마을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지가르의 병이 심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탈수 증세에다 몸도 무거웠던 강가잘리에게 어두워져버린 시간에 일생 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로 나간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강가잘리의 얼굴색은 바라나시에 깔리는 어둠보다 더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21세기 인도 정부병원은 전시 수용시설

다시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바라나시를 향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걷고 또 걸어 도착한 바라나시 정부병원. 사실 인도의 정부 의료기관에 가보는 건 보건소 이후 이곳 병원이 처음이었습니다. 보건소는 보건소니까 시설도 빈약하다고 치부할 수 있었지만, 이 썰렁하고 지저분한 큰 병원을 눈앞에 대하자 과연 이곳의 의사 손은 깨끗할지, 누워있을 침대는 어떨지가 먼저 걱정되었습니다. '이곳, 정말 병원인가.'

다행스러운 건 의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저분한 건 뒤로하고 의사는 지가르와 강가잘리를 차례로 진찰했습니다. 의사는 강가잘리가 방금 전 보건소에서 타온 약 가운데 두 종류는 산모에게 해가 된다며 복용을 금했습니다. 지가르에겐 약물중독 진단과 함께 좀 더 상세한 검사를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지가르가 주사를 맞은 뒤에서야 얼굴이 환해진 엄마 강가잘리.
 병원에 도착해 지가르가 주사를 맞은 뒤에서야 얼굴이 환해진 엄마 강가잘리.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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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실로 옮겨진 지가르는 두 대의 주사와 함께 따뜻한 우유를 제공받았습니다. 환자실은 어두웠고 지저분했지만 시트는 씌워져 있었습니다. 밤이 지나면 낯선 병원도 조금은 익숙해질 것입니다. 지가르의 검사를 위해 이들은 병원에서 며칠 지내야 할 테니까요.

지저분한 선반 위의 약과 주사.
 지저분한 선반 위의 약과 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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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찍 두 손에 사과와 바나나를 들고 서둘러 병원에 갔습니다. 지가르는 2층 소아들을 위한 병동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곳엔 소아들을 위한 작은 침대들이 몇 개 놓여 있고, 그 옆 칸에는 성인들이 누워있습니다.

여전히 어두웠고 지저분했습니다. 아침엔 병원 직원이 바닥을 걸레질하는 것이 청소의 전부였습니다. 환자가 있는 침대에만 시트가 씌워져 있고, 주사와 약은 신문지 한 장으로 청결함을 위장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나올 법한 수용시설이나 간이병원시설 같았습니다.

지가르는 피검사, 소변검사와 함께 X-ray도 찍을 겁니다. 아침 내내 소아과 담당 의사를 찾았지만, 담당 진료실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의사들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면 늘 손해 보는 건 환자이기 때문에 늘 조심스럽게 존중하면서 부탁해야 합니다.

다른 의사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지가르의 검사를 진행시켜 달라고 부탁해봅니다. 그러나 지가르의 피검사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몸이 너무 부어있어 주사바늘이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피검사를 시도한 사람은 울어대기만 하는 지가르의 팔을 여기저기 찔러보다가, 어딘가에서 배달된 인도식 차(짜이)를 한 잔 마시다가, 다시 피를 뽑아보려다가 그만둡니다. 전문가를 부르겠다고 합니다.

어둡고 시트도 없는 소아용 침대.
 어둡고 시트도 없는 소아용 침대.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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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뽑고 있는 직원.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짜이를 들고 서 있다. 오른쪽 세면대에선 물이 나올 것 같지 않다.
 피를 뽑고 있는 직원.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짜이를 들고 서 있다. 오른쪽 세면대에선 물이 나올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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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빨간 사과와 불량(?) 식빵

지가르의 '불량'식빵과 정체불명의 사과.
 지가르의 '불량'식빵과 정체불명의 사과.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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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병실에서 햇살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비타민이 풍부한 사과를 열심히 깎아서 지가르가 먹기 편하게 으깨서 입에 대어줍니다. 그런데 지가르는 냄새도 맡기 싫은 듯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비타민이 풍부하다는 둥, 몸에 좋다는 둥 이런저런 말로 유혹해보지만, 인상만 찌푸립니다. 이 좋은 사과가 왜 싫다는 거야, 속으로 툴툴거렸습니다.

그 사이 아빠 문나가 어딘가를 다녀옵니다. 손에는 신문지에 싸인 튀긴 식빵이 들려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보면 길거리 불량식품입니다. 지가르는 너무나도 좋아했습니다. 아빠가 사다 준 불량(?) 식빵은 지가르의 입맛에 딱 맞는 맛난 음식입니다. 꼭꼭 씹어서 즐겁게 먹고 좀 쉬고 있으면 아빠가 그새 알아차리고 우유를 먹입니다. 우유를 벌컥벌컥 마셔댄 뒤 다시 '불량' 식빵을 맛있게 먹습니다.

낯섦과 친숙함의 차이. 음식은 사람의 몸에 오랫동안 들어있는 가장 기본적인 문화입니다.

단 한 번도 사과는커녕 과일 자체를 먹어본 적이 없는 지가르에게, 사과는 정체불명의 이상한 물건일 뿐 음식에 속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과의 상큼한 냄새도 '불량' 식빵 앞에선 시큼함으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도시에 나와 본 적이 없는 지가르네 가족들이 도시가 낯설고 두려운 것처럼, 사과는 지가르에게 낯설기만 할 겁니다. 그게 무조건 좋다고 억지로 먹이려고 하고 투덜거린 게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지금까지 무사하르로 살아온 이들에게 삶의 질서를 바꾸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설령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할지라도 온몸을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아이, 지가르의 고통이 지금 마을을 서서히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태그:#달리트, #무사하르, #바라나시, #카스트,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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