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예인
어렸을 적, 내 정서를 지배한 것은 뽕짝이었다. 뽕짝의 시대가 지난 후, 내 정서를 다스린 건 팝송과 샹송이었다. 내가 젊었던 시절엔 팝송과 샹송에 대한 지식이 교양의 깊이를 재는 척도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 음악이 가진 깊이에 눈뜬 것은 나이 마흔이 가까워서였다.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듣게 된 김영동의 '어디로 갈거나'라는 노래가 나를 국악의 깊은 세계로 이끌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서양문화와 그 감수성이 나를 지배했지만, 내 핏줄 속에 도도히 흐르는 전통의 유전자까지 바꾸진 못했다.
우리 음악에 점점 깊게 동화되었다. 들을수록 더욱 깊숙이 빠져들었다. 소리를 직접 배우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나이였다. 게다가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었다. 대신 옛 명창들의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우리 음악을 잘 들을 수 있는 '귀 명창'이라도 되고 싶었던 것이다.
'참 소리가 좋다'고 느낀 명창이 있으면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책을 사고 자료를 구했다.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까지도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성음을 가진 명창의 소리를 접했을 때는 직접 찾아가 뵙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에 둔 명인이 벌써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내가 1980년대 중반과 90년대 초반에 읽었던 <숨어 사는 외톨박이>1·2권이나 <민중 자서전>(뿌리깊은나무) 등은 내가 직접 보지 못한 예인들에 대한 궁금증과 갈증을 해소해주었던 샘물 같은 책이었다. 그 책들 속에는 세상의 천대 속에서 예술가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살았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음악과 예술을 오롯이 지켜낸 예인들의 삶이 있었다.
요즘 책방에 가서 문화예술에 관한 책들을 뒤적일 때마다 느끼는 불만은 '왜 우리나라 출판계는 <숨어 사는 외톨박이>1·2권이나 <민중 자서전> 같은 책을 출판하지 않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전통예술 연출가 진옥섭이 쓴 <노름마치>라는 책은 그런 내 갈증과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준 책이었다. 책 속엔 내가 몰랐던 예인들이 많았다. 우리 음악이나 전통예술에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이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알지 못했던 숨은 명인이 그렇게 많았던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런 명창, 그런 춤꾼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내게 '노름마치'란 책 이름은 그리 낯선 게 아니다. 비나리를 잘하는 이광수 선생이 이끄는 '이광수와 노름마치'라는 사물놀이패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어원까지는 알지 못했다.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한 말로 최고의 잽이(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라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고수 중의 고수가 노름마치인 것이다.
'말하는 꽃'의 삶이라 숨기고 살아왔지만서론을 빼면 책은 모두 3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모두 아홉 사람의 노름마치가 등장한다.
첫 번째 장인 '예기, 이화우 흩뿌릴제'에는 권번 예기(藝妓) 출신인 장금도, 유금선, 심화영의 스산한 삶과 예술에 얽힌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들은 선생에게 채(회초리)를 맞으며 춤과 소리를 배운 사람들이다. 그렇게 배운 예술이건만 예기 출신이란 세상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자신의 소리와 춤솜씨를 숨기며 산다.
가장 먼저 독자와 마주치는 사람은 군산의 민살풀이 춤꾼인 장금도(1928년생)이다. 민살풀이춤이란 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살풀이춤이다. 열두 살에 권번에 들어간 그이는 춤과 노래로 김제만경 지주들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나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일찌감치 춤을 접고 만다. 그런 그가 다시 춤을 춘 것은 1983년 사진작가 정범태에게 끌려서 나간 '한국명무전'에서였다.
살풀이춤은 눈 아프도록 보아왔지만 민살풀이춤은 아직 보지 못했다. 저자 진옥섭이 보기에 요즘 사람들이 추는 춤은 '해서'다. 판에 박은 춤이란 뜻이다. 그에 견주면 장금도의 춤은 '초서'다. 자연스런 춤이란 뜻이다. 장금도란 분은 군산에 사는 분이다. 20여 년을 그곳에 살았던 내가 이분의 함자마저 귀동냥하지 못했다니 한심한 일이다.
동래 기생이었던 유금선(1929년생)은 입소리로 악기를 흉내 내는 구음이 뛰어난 분이다. "팔자에 소리를 새겨 나왔다"고까지 말할 정도이다. 그이의 소리를 두고 저자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낭랑한 음, 끊길 듯 이어지며 강약을 부가해 음을 착탁 친다"라고 소리의 특징을 냉큼 잡아낸다.
내포 사람 심화영(1913년생)은 중고제 판소리를 할 줄 아는 마지막 소리꾼이다. 애절하지만 감정을 다 꺼내놓지 않은 목소리를 지닌 분이다. 중고제 판소리의 명맥을 이어온 그이는 춤도 곧잘 춘다. 승무로 충남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그이가 말하는 춤의 요체는 "맹글어 추지 않고 호흡보다 먼저 몸이 노는 것"이다. 저자식으로 말한다면 '초서'의 춤을 춘다는 뜻이다. 그이의 삶과 운명을 함께 할 판소리 중고제의 앞날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우리의 춤을 빼놓고 풍류를 논하지 말라
두 번째 장 '남무, 춤추는 처용애비들'에는 영남춤의 대가인 문장원, 하용부, 김덕명에 관한 이야기가 독자를 기다린다. "소리는 호남, 춤은 영남"이라던가. 이들의 춤은 단아함과 절제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멋을 지녔다.
마지막 동래 한량 문장원(1917년생)의 추는 춤의 생명력은 '엇'에 있다. '엇'이란 '어긋난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로 장단을 앞지르거나 뒤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 '엇'이 지나치게 되면 가락을 '삐는' 꼴이 된다. 모든 예술 장르가 다 그렇지만 파격이란 "모 아니면 도"가 될 수 있는 위험이 뒤따른다. 문장원의 춤은 파격의 춤이긴 하지만 걷노라면 자연스레 밟히는 춤이기도 하다.
"춤은 숨"이며 "북은 내 심장"이라고 말하는 하용부(1955년생)는 4대에 걸쳐 밀양북춤을 추는 사람이다. 할아버지인 하보경(1906~1997)의 "몸에 뼈다구가 없어"라든가 "버드나무가 흔들리듯이"라는 말을 기준 삼아 춤을 익혔다.
김덕명(1924년생)은 학춤을 추는 사람이다. 처음에 양산 통도사에서 추었다 하여 '양산사찰학춤'으로 알려졌다가 사찰과는 무관한 춤이라서 지금은 '양산학춤'이라고 부르는 춤이 그가 추는 춤이다. 타고난 몸으로 우기듯이 추는 장쾌한 춤사위가 그의 춤이 가진 멋이다.
두루마기 소매를 펼치며 '동래입춤'을 추는 한량 문장원, 북 하나에 삶의 온갖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하용부, 학이 되어 비상하고 싶은 마음을 무대에 펼쳐놓는 김덕명. 그들은 여성 편향의 춤이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춤판에서 밤하늘의 북두칠성보다 더 영롱하게 빛나는 존재들이다.
귀에 앵기는 소리가, 소리가 그립다마지막 세 번째 장인 '득음, 세상에서 가장 긴 오르막'엔 정광수, 한승호, 한애순 등의 명창에 얽힌 이야기가 서술돼 있다.
우리 민족에게 판소리는 무엇인가. 때로는 권력을 풍자하고, 때로는 서러운 민중의 한을 대변하기도 하면서 왕으로부터 저 아래 밑바닥 인생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사랑받았던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이제 농경사회의 황혼과 더불어 우리민족에게서 점차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판소리가 처한 운명이다.
지난 2003년에 세상을 떠난 정광수(1909년 생)는 판소리 적벽가를 잘 부르던 분이다. 그는 함부로 옛 법통 소리를 뜯어고치는 법이 없이 자신이 배운 그대로의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 주었다. 소리도 좋지만 그의 발림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발림은 온몸을 움직여 판소리의 정황을 표현하는 몸짓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도 2002년도, 국립국악원에서 정광수 선생이 소리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아흔이 넘은 연세인지라 소리는 희미했지만, <적벽가> 새타령 속 활 쏘는 흉내를 내던 그의 발림은 우아함의 극치였다. 세상을 뜨기 전에 그렇게라도 그의 모습을 뵐 수 있었던 것은 내겐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 정광수 선생은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생 동안 발 족(足)자가 들어간 만족과 부족이 무서웠소"라고. 참으로 무서운 예인의 혼백을 지닌 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승호(1924년생) 선생 역시 판소리 <적벽가>를 잘 부르는 분이다. 그이의 장기는 "산천은 험준하고 수목은 총잡헌디 만학에 눈쌓이고…"로 시작되는 '군사설움대목'이다. 가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녹음한 음반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소리를 듣는다. 그때마다 난 아득한 옛날로 이끌려가 적벽싸움에 참가한 병사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뛰어난 소리 공력을 지닌 분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제자가 없다. 그의 소리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즉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판소리를 배우는 사람들조차 힘들다고 그에게 배우는 것을 꺼리는 형편이다. 5명창 시대의 법통 소리를 그대로 간직한 그의 소리 공력이 여기에서 끊어진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한승호 선생은 공연에서 몇 번 뵌 적이 있다. 소리 하다 말고, "이 대목은 막걸리 한 잔 해야 소리가 잘 나오는디"라며 아니리 아닌 아니리를 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책의 맨 끝에 등장하는 사람은 판소리 명창 한애순(1924년 생)이다. 그이의 소리 선생은 박동실이다. 해방공간에서 '해방가', '열사가'를 만들어 불렀던 소리꾼 박동실이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박동실은 6·25 전쟁의 와중에서 북쪽을 택하고 만다. 박동실은 그렇게 우리 판소리사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바람에 제자들도 덩달아 초야에 묻히고 만다. 한애순이 박동실에게 소리를 배운 곳은 내 고향 근처인 전남 담양 지실마을에 있는 '지실초당'이다. 소쇄원에 들를 때마다 박동실과 한애순의 소리 이력을 떠올리게 된다.
국악의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대중론'이나 '개량론'을 들먹일수록 정광수, 한승호, 한애순 세 국악인의 존재는 더욱 무게감을 더한다.
깊은맛이 우러나는 춤과 소리를 기다리며이렇게 해서 전통예술 연출가인 진옥섭 덕택에 집에 가만히 앉아서 이 시대 최고의 명인이랄 수 있는 아홉 사람의 예인을 만났다. 저자가 부지런히 발품 팔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만난 분들이다. 그 중에서도 동래야유의 명인 문장원을 무대에 올리려고 만나는 장면이 단연 압권이다.
공연을 기획하던 그는 부산까지 내려가서 문장원에게 출연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그러나 꼬박 3일을 기다린 끝에 기어이 출연 약속을 받아낸다. 전통예술에 대한 저자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이 지닌 예술세계는 우뚝했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 외로웠던 이 시대 마지막 예인들의 삶과 예술은 그렇게 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우리 앞에 놓였다.
이 책 속에는 또 다른 재미 한 가지가 숨어 있다. 책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촌철살인의 명구를 읽는 맛이다. "춤은 '드러냄'이 아니라 '드러남'이다"라든가 "전통춤이 단아와 절제로 표현하며 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면 '엇'은 그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일 것이다"라든가 춤은 "추는 게 아니라 추어지는 거다"라든가 하는 구절들이 그것이다. 모두 전통예술 연출가인 저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토해질 수 없는 명징한 에스프리들이다.
저자는 신재효의 '광대가'에 빗대어 '신광대가'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거기에'꾹'이란 말을 추가하고 싶다고 말한다. 오랜 푸대접을 견디고 요즘 극진히 대접받는 슬로 푸드(slow food)처럼, '꾹' 참고 시간을 견뎌 진정한 깊은맛을 내보자는 뜻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요즘 젊은 판소리 창자에게선 깊은맛을 느낄 수 없다. 한시라도 세상에 빨리 나와 이름을 내보자는 성급함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전통의 황혼이다. 그런 쓸쓸하고 슬픈 시간에 우리 전통예술의 뿌리를 간직한 아홉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는 시간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할 수는 없을까?'라는 물음이 마음 한 켠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심청가>에 나오는 심봉사는 다름 아닌 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심청은 물론 이 책의 저자인 진옥섭이다. 그의 덕분에 나는 우리 전통예술과 예인에 대한 눈을 조금 더 떴다. 아직도 전통문화에 대한 눈을 뜨지 못한 이 땅의 많은 분께도 감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노름마치> 1 / 진옥섭 지음 / 생각의 나무 펴냄 / 1만원 / 2007.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