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이 되려면 목에서 피가 토해지도록 노래를 불러야 하고 가야금이나 기타를 잘 퉁기려면 손가락에 피멍이 들다 못해 굳은살이 안착해야 이제 뭐가 좀 되나 보다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정래 선생은 원고지를 사용해 글을 쓰다 보니 어깨관절이 또 그렇게 홍역을 치렀고, 발레리나 강수진은 그이의 발이 수난을 증명해 준다.
그러면 도예가는? 도자기를 많이 만들고 또 그것을 가마에 들고 내고 하려면 팔이 많이 아프지 않을까. 아니면 무거운 것을 들어야 되니 일단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도천 천한봉 선생의 <그릇과 나의 인생>(도서출판 호미)을 보니 도예가는 팔과 허리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발’이 한계를 뛰어넘어야 진정한 도예가가 될 수 있나 보았다.
'호롱불에 의지하여 밤이 새도록 물레를 찼다. 하루에 작은 종지의 경우는 800개를 만들고 굽까지 다 깎았다. 만들 때는 왼발로, 또 굽을 깎을 때는 오른발로 물레를 차다보니 발이 성할 날이 없었다. 맨발로 물레를 차다보면 살이 터지고 닳아서 피가 흐르다 나중에는 굳은살로 변했다. 몇 년 후에는 검정고무신이 시중에 나와 신고했는데, 얼마 안가서 구멍이 뚫리곤 했다.'(본문-18쪽)먹고 살기 위하여 도자기를 배워...
선생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강제징용을 당하였기에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해방이 되었고 선생의 가족들은 고향땅 문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1년도 되지 않아 부친은 돌아가고 선생은 14살 어린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4형제의 장남이었던 선생은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하여 도자기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일이라고는 하지만 나이도 어리고 할 줄 아는 게 없다보니 허드렛일이나 잔심부름을 주로 하였다. 그러니 새벽부터 종일 일해도 품삯은 고작 ‘보리쌀 한 되’였다. 그에 비해 사기그릇을 만드는 장인들의 경우 이틀에 ‘쌀 한가마니’를 받아갔다.
이에 선생은 기술만 배우면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하루 일과 후 밤마다 몰래 텅 빈 작업장에 들어가 물레 돌리는 연습을 밤이 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을 연습하자 자신감이 생겼고 꾀를 내어 대장들 앞에서 물레를 돌릴 기회도 잡았다. 한 달간의 맹연습을 모르던 대장님들은 ‘이놈은 천재다’ 감탄하였고 기술도 조금씩 가르쳐 주었다.
항상 배울 자세가 되어있었던 선생은 매사에 열심이었고 그러다보니 18세에 이미 문경에서는 이름난 도예기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의 선생은 사발, 대접, 술잔, 탕기, 종지, 반상기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플라스틱과 스테인레스가 등장하면서 그러한 것들로는 더 이상 밥벌이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요강과 화분, 칠기항아리, 석간주단지 등은 수요가 있어 그것들을 만들며 가족들을 부양했다.
‘고려다완’과의 운명적인 만남
화분 만들기에 열중하던 선생에게 어느 날 일본에서 한 노스님(사꾸라가와스님)이 찾아왔다. 그 스님은 교토의 대각사 주지로 <고려 다완>이라는 책에 실린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모양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사진 속 도자기는 선생이 전에 많이 만들어 보던 사발과 비슷한 것이라 바로 뚝딱 하나 만들어 보였다.
스님은 선생의 능숙한 작업 모양을 보더니 일본의 다도열풍과, 그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고려다완(사실은 조선다완)’에 관심이 많음을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다완을 한번 만들어 볼 생각이 없는지 물었고, 선생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여 스님이 놓고 간 책을 보며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고자 불철주야 몰두하였다.
김해다완, 웅천다완, 정호다완. 다완의 형태는 노력으로 되었으나 색깔은 아무리 노력해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흙이 문제인지, 유약이 문제인지. 고심 끝에 다완의 이름이 붙은 지역에 내려가 그 지역 땅의 흙을 퍼와 만들었다. 김해다완은 김해의 흙으로 만들어보고 웅천다완은 웅천의 흙을 가져와 만들어 보고….결과는, 그것이 정답이었다.
드디어 대각사 스님이 준 책자의 다완에 근접했음을 확인한 선생은 스님께 연락하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스님은 모든 공정을 지켜보았고 완성되었을 때는 800점 중 60점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파기’하라고 하였다. 작품이 못된 나머지 그릇들을 깨면서 선생은 뭔가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열림을 직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선생은 그날 이후 고려다완 만들기라는 새로운 삶에 접어들었다. 이전의 삶이 오로지 밥벌이를 위한 그릇 만들기였다면 이후의 삶은 밥벌이를 넘어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썼던 그릇들을 자신의 혼을 담아 다시금 재현해 내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문경의 흙과 유약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전국 어디든 민요지를 찾아다니면서 흙과 파편을 모았다. 주워온 파편은 일일이 맛을 보았다. 그 지방의 흙이 녹았는지 안 녹았는지 측정할 만한 기구가 따로 없던 터라 일일이 혀에 대어 봤다. 혀에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 있는 것은 불이 약하고 화도가 낮은 것이다. 파편의 기공을 통해서도 흙의 화도와 불의 세기 등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어느 지방 흙인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즉 파편을 통해 유약재료, 농도, 가마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본문-95쪽)찻물이 가득 들어 있는 차 그릇이 제일 흡족 선생의 다기를 사 가는 사람들은 그 정성 기울임을 알기에 귀한만큼 고이 모셔 둘 수도 있을 것인데 선생은 이 경우 제일 마음이 ‘상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제일 흡족한 때는? 차인들 손에서 찻물이 가득 들어있는 상태로 있을 때 가장 흡족하다고 하였다. 쉬이 깨어질까 염려하며 장식장에 넣어두고 보기만 할 게 아니라 ‘소중히’ 다루며 실제로 사용하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흙이 지닌 본질적인 생명력을 사랑한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느낌은 더 깊어진다. 오랜 세월에 삭은 흙을 퍼와 물에서 모래를 걸러내고 남은 부드러운 흙, 세상에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 있나 할 정도로 촉감이 좋다.'(본문-165쪽)올해로 선생은 작도(作陶) 60주년을 맞았다. 14세에 시작하여 60년을 한 결 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러한 만큼 이젠 현역에서 제대(?)하여 편히 쉬어도 될 터인데 여전히 현역이시라 한다.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그날 해야 될 분량의 ‘모든 공정’을 몸소 해내는 그 한결같은 열정이 부럽고 존경스럽다.